-
-
멈춰서서 가만히 - 유물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은 뭐가 좋을까
정명희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4월
평점 :
유물과 대화를 나누고 그 유물을 수선(?)해 주는 주인공이 나오는 웹툰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유물들은 영이 각각 있어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오래된 것일수록 이야기도 많고 영도 강하고(?), 아주 작은 손때 묻은 물건이여도 주인의 마음에 따라 존재가 커지기도 하고....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정명희의 유물 이야기, <멈춰서서 가만히>는 고급스러운 확장판 같았다 (물론 비교의 여지는 없지만). 유물 하나하나의 스토리들이 마치 소설처럼 들어가 있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작품들의 특징들도 이렇게 다정하게 풀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유물이 흥미로워 읽다보면 저자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정명희 저자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우리들에게 가만히 멈춰서서 유물들과 대화를 나눠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그녀를 따라 각 편을 즐겁게 읽으며 넘어가는데 내 숨을 턱하니 막히게 했었던 곳은 바로 두 반가상이 함께하는 공간인 ‘사유의 방’이였다. 작은 사진으로만 접하는데도 그 공간감과 시간이 내게 확 덮치는 듯해서 움찔했다. 실제로 저기에 들어서면 정말 말 그대로 멈춰서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졌다.
그 외에 너무 아름답고 섬세해 보여서 실물이 보고 싶어진 백자 청화 산 모양 연적, 참 따뜻하고 귀여운 변상벽님의 고양이도 잔상이 계속 남는다.
이렇듯 책으로만 보고 읽었는데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다. 아마도 일순간이라도 이들과 아주 작은 교감을 나눴을지도 모른다. 많은 지식이나 감상법보다도 ‘느낌이 먼저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은 아주 단순한 것 같다.
_그림을 사랑하게 된 이는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내 안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바깥을 향해 열린다. 대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고 알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 그림 한 점 앞에 오래 서서 머물기도 하고, 이미 본 그림을 또 보러 가기도 한다. ..... 사랑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다. 언제나 그랬지만 느낌이 먼저다._p19
박물관이 모든 이들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삶에 감동 한 자락 전해주고 싶은 큐레이터의 마음이 아주 잘 느껴지는 책이였다. 참 쉽고 다정하게 우리를 역사 속 유물들에게 안내해주고 있었다.
누구나 이 책을 접하고 나면 “박물관이 이렇게 친근한 곳이였어?” 하게 될 것이다.
_전시실에서 구름과 학, 활짝 핀 모란 무늬가 있는 이 청자 배개를 처음 봤을 때,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인 구멍을 보고 좀 떨렸다. ‘아, 한단침이구나.’ 노생이 빨려 들어갔다는 구멍을 보기 위해 진열장 옆으로 몸을 옮겨보았다._p139
_명작에는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있다. 어줍지 않게 함부로 쓸 수 없으면서도, 누구에게든 열려 있고 자신의 느낌을 얼마든지 갖게 할 만큼 여유롭다._p158
_먹이 묻은 붓을 씻어낼 때 사용하는 백자 필세는 뾰족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많고 깨끗한 백자 태토에 점을 찍듯 까슬까슬한 산의 질감을 새기고, 붓으로 철 성분의 옅은 동화 안료를 칠하자 단풍 가득한 붉은 산이 나타났다._p204
_변상벽(1730~?)의 고양이: 고양이를 항상 관찰하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그릴 수 있었을까?_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