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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평점 :
_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_
_신이란 그래야 하지 않는가. 광채가 나고 권력과 힘이 있는 존재. 그런 신만이 구원하고 악을 물리친다._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파이 이야기>를 읽었다.
동물원 녀석들을 싣고, 가족들과 캐나다로 향하던 파이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간신히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혼자 살아남은 이 소년은 이 구명보트에 자신 외에, 리처드 파커라고 불렸던 큰 뱅골호랑이도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긴 여정의 기록....
영화로 알고 있었던 내용은 이 정도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 파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많은 설명이 전반부에 있었는데,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모두 믿는 인도 소년이다. 종교의 주요 화두인, 삶과 죽음, 악과 선에 대한 질문과 물음의 글을 따라 읽은 내용들은 추후에 긴 표류시간들과 연결 지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리처드 파커와 함께한 여정에 대한 설명은 생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고 매우 디테일해서, 판타지로 느껴졌던 영화의 여운을 완전히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호랑이의 존재감도 훨씬 실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제대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은 조난기, 표류기로 다가왔다.
호랑이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깊은 유대로 서로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진실에 대한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이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를 3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버전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삶에 대한 태도가 결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생략된 숨은 배경들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만약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좋아한 이들이라면 꼭 이 원작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그 판타지스럼이 벗겨지는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상징과 의미들을 담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인생책을 만났다...
_배의 껍질을 쭉 당겼다. 빨려드는 소리를 내면서 어렵사리 벗겨졌다. 껍질 속에 있던 것들이 뒤틀리고 꼬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근육, 지방, 피, 내장, 뼈. 아직도 바다거북은 버둥댔다. 나는 녀석의 목에서 척추까지 쭉 갈랐다. 소용이 없었다._
_내가 모기라도 되는 듯, 내 손길이 닿자 그는 몸서리를 쳤다. 마침내 물에 반쯤 담긴 머리를 흔든다. 익사보다는 물을 마시는 게 낫다. 좋은 징조다. 꼬리가 선다._
_다음 날 아침,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더 이상은 리처드 파커를 보살필 수 없다는 슬픈 결론에 이르렀다. 동물원 관리자로서 실패한 셈이었다._
_나는 미친 게 아니었다. 내게 말하는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지독한 녀석 같으니! 같이 오래 있었으면서, 하필 죽기 한 시간 전에야 지껄이기 시작하는군._
_구명보트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를 약간 자극해서, 그의 마음에 내가 남아 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_
_리처드 파커는 쭉 나와 함께 있었다. 그를 잊어본 적이 없다. 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 보고 싶다. 지금도 꿈에서 그를 본다. 주로 악몽이지만, 사랑이 얼룩진 악몽이다. 사람의 묘한 심리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