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평점 :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제목부터 통통 튈 것 같은 제목을 가진 여행기..
하지만 오십을 맞아 훌훌 털어내며 제주로 떠난 저자는 이를 ‘유배’라고 칭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재미난 여행기 인가 보다 하고 예측을 했었는데, 웬걸 초반부터 진지하다. 그녀는 왜 유배기라로 칭하는 지를 초반에 알뜰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여기를 읽으며 마냥 남 사정이라고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몇가지 중 어느 언저리는 나도 그렇구나 하고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다가 문득 다 새롭게 다시 살아내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데, 저자는 바로 제주여행을 그 계기로 삼고 있었다.
다른 여행에세이와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하루하루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작은 메모로 넣어놓았다는 점이다. ‘유배’라고 정의한 일정답게, 매일 작은 것이라도 챙기려는 모습이 내게 새로운 여행법으로 와 닿았다. 그래서 하루의 긴 글을 읽은 후에 이 짧은 메모를 따로 읽어보았던 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이것만 가져가도 성공한 독서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예상외로 굉장한 몰입감이 있는 에세이였는데 아마도 저자의 유려한 글솜씨 때문이였던 것 같다. 같은 상황이나 풍경도 그 표현이 지루하지가 않고 개성 있었다. 적당한 깊이감과 감수성, 개인사와 맞물려서 읽는 이들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해주고 있었는데, 참 좋아서 또 접하고 싶은 문체였다.
여행에 목마른 요즘 시기에, 여행기를 보는 것은 고문이자 즐거움이다. 잠깐이나마 저자와 함께 떠난 제주는 달리보였고 흔히 거론되는 장소들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듯하였다. 인생의 어느 정점에서 고민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단순히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해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내용이다.
지금은, 그녀의 다음 도전기가 궁금하다.
_부끄러워서 여행을 떠났어요.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벌이라면 짧고 상이라면 긴 시간, 30일._
_나는 언젠간 아버지의 책을 끌어안은 책방을 하고 싶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책을 아이들 나간 빈 방에 한 면 가득 쟁여 놓고 있다._p40
_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뜨거운 오뎅 국물이 간절했다. 그래도 걸었다. 바람싸대기 세게 맞으며, 바당길보다 숲길이 좋고, 숲길보다 밭담길이 좋고, 밭담길만큼 마을길이 좋다. 낡고 닳은 건물 앞, 닫힌 문 앞에서 물끄러미 안을 살핀다.
새것 앞에선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낡은 것 앞에서 시간을 헤아린다. 함께 여위어간 누군가의 마음을 생각한다. 금능도 아늑하다. 낮은 담을 따라 걸으며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모슬포는 어쩌지._p82
_굴거리나무 이파리는 캉캉춤을 추는 무희를 닮았고, 참식나무 새잎은 금빛으로 빛난다. 설마 금색일까 싶지만, 정말로 금빛 털이 빼곡해서 해를 받으면 찬란한 금색이 된다. 나무 하나 꽃 하나를 알아가며 걷는다._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