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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
이기진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서문, 첫 문단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이 유쾌한 도서, ‘파리로 간 물리학자’!
시작 문단은 이렇다:
_지금 이 순간이 어떤 세계로 연결될지 아무도 모른다. 미궁에 빠질 수도 있지만, 미궁 역시 때가 지나면 자신만의 매력적인 시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 충분히! 삶의 한 기술일 수도 있는 취향. 검증되지도 검증할 수도 없는 그것 하나만 믿고 선택한 여정이 지금, 이 책으로 안내했다._[서문 ‘틀리건 맞건’에서]
진심으로 공감되는 “삶의 한 기술일 수도 있는 취향”.... 예전 한국사회라면 괴짜나 현실을 모른다고 치부될 지도 모르는 취향이라는 것이, 지금은 삶의 무기로 부상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사는 법과 딱 맞는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미궁 역시 때가 지나면 자신만의 매력적인 시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문장이 후회 많은 삶에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이렇게 첫 문단부터 위로 받으며 들어간 책이다.
가수 씨엘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의 프랑스 생활기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삽화들이 만화스럽기도 하고 참 편안한데, 저자가 그림도 직접 그렸으며, 이력을 보니 딸들을 위해 그린 동화도 있는 동화 작가이자 화가이기도 해서 놀랐었다.
프랑스에 가서 생활했었던 곳들의 분위기, 에피소드, 문화.. 때로는 전공 관련 내용도 곁들어서 어느 페이지를 펴도 술술 넘어간다.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는 요리와 음식이였는데, 디저트 밀 푀유가 먹고 싶어졌고, 파리의 새벽에 만나는 빵들이 궁금해졌으며, ‘우아하게 계란 껍질 벗기기’ 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봤다.
저자가 직접 했던 요리의 조리법을 그림으로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_음식은 기억이다. 음식의 향은 더더욱 그렇다. 타임 향을 의식하고 음식을 먹으면 조금씩 이 타임 향이 뇌리에 박힌다._[‘시간을 거슬러 기억 장치에 남아 있는 타임’에서]
_하찮은 감자 으깨기 역시 진화해왔다.
... 이 지그재그 으깨기는 무엇보다도 철사의 곡선이 멋지다. 중간의 굴곡진 부분이 없었다면 재미없는 물건이었을 텐데 굴곡을 만들어 완벽한 물건이 되었다._[‘지그재그 감자 으깨기를 보며 물리학자가 하는 생각’에서]
_요리는 간단해야 한다._[‘20분이면 멋진 순간이 완성된다’에서]
그리고, 종종 나오는 현지사정도 흥미로웠는데 이런 내용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설거지 후에 왜 그렇게 행주로 부지런히 그릇들을 닦나 싶었더니, 그 이유가 석회가 포함된 물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회를 없애는 세제를 사서 제거하거나, 설거지할 때 마른 면 행주로 닦아줘야 하얀 물때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유럽 쪽이 석회 섞인 물 때문에 그대로 마시면 안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설거지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물론 저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것이 아니었고 결론은 식사 후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설거지를 하며 행주로 접시를 닦았던 시간이 참 좋았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환경과 상황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일상을 적어놓은 기록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느낀 진리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이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취향이라는 것은 분위기를 아우르는 힘이 있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호기심은 덤이다.
하지만 저자는 호기심만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삶의 방식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시간들이였던 것 같다. 정답이 없는 세상살이에서 이런 시기는 정말 소중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주며, 이를 통해 삶에 관한 ‘바람 같은 힌트’를 얻어서 각자 멋진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고 있다. 참 따뜻하다.... 다정한 아빠가 들려주는 먼 나라 동화 같기도 하다... ㅎㅎㅎ
나도 나를 살아있게 하고 내 삶을 반짝이게 하는 요소들에 대해 정리해봐야겠다.
_먹고 싶은 디저트는 밀 푀유였으나 12시부터 팔기 시작한다고 했다.
... 12시가 되자 주문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고 테이크아웃은 할 수 없다. ‘즉석에서 예술처럼 만든 것을 즐겨라’는 의미다.
이 달다구리는 구름처럼 심플하고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가벼운 맛이었다. 각각의 재료가 살아 있고 입속에 넣자 서로 이야기를 했다._[‘달다구리가 만들어준 특별한 시간’에서]
_뭐 불편하기는 하지만 멀리서 이 상황을 바라본다면 그래도 낭만이 있네, 하는 여유와 유머가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지 가장 중요한 유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삶의 기술을 터득한 시기다._[‘멋진 시절의 한 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