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크 - 첫 2초의 힘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무열 옮김, 황상민 감수 / 21세기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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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라면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영화중에 '쥬라기공원'은 집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본 것으로 기억한다.
지질시대의 나무의 수지(樹脂)가 굳어서 형성된 호박(琥珀) 속에는 희귀하게 모기가 갇혀 있는 경우가 있는데, 거부인 사업가가 생명공학자들을 동원하여 호박 속의 모기가 빨아먹던 피 속에 있는 미량의 공룡의 DNA를 추출한 다음, 같은 파충류인 개구리의 유전자와 결합시켜 공룡의 알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부화시켜서 공룡을 재생해 내어 공룡들이 뛰노는 대규모 놀이공원을 적도 부근의 코스타리카의 서해안의 한 섬에 조성했는데(물론 영리적인 목적으로), 공룡학자와 고식물학자 일행이 헬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가는 장면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공룡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박사는 화석으로만 보던 공룡들이, 그것도 여러 종류가 눈앞의 초원에서 뛰어 노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어서 일행은 실험실로 안내되는데 놀이공원을 만든 부호가 공룡의 알이 부화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충류나 조류 같은 하등의 척추동물은 알에서 부화하는 순간에 눈에 보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어미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동물이던 아니던 간에 움직이는 것이면 그것을 따르는 본능이 있고, 자연상태라면 알에서 갓 깨어난 새의 지근거리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 동물의 어미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그것을 어미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의 본능적인 경향을 각인(刻印, imprinting)이라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부자 사업가는 자신을 공룡들에게 어미로 각인시킬 요량으로 공룡들이 알에서 부화하는 시간마다 껍질을 이제 막 벗은 아기공룡을 귀여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공룡들이 자라서 본인한테 위해가 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는 것이기도 했다.


2.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인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는 알에서 갓 깨어난 duckling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물체를 그들의 어미로 인식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실제로 강(江)에서 duckling들에게 어미로 각인되어 가면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른 사람이 duckling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이들은 놀래면서 로렌츠에게로 피하곤 했었다.
duckling이나 병아리들에 있어서 각인의 효과는 부화하고 나서 약 30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고 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러한 현상은 조류의 뇌의 한 부분의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포유류인 개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진돗개의 강아지는 한 번 길들여진 주인 이외에는 친해지기가 어려워서 군견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친해진 병사가 제대하고 나면 후임자와는 친해지기가 어려운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인간의 언어발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인간의 두뇌 중에서 언어와 관련된 부분의 성장이 이루워지는 기간, 곧 결정적시기(critical period)라는 것이 있어서 2세에서 12세 사이의 기간이 지나서 사춘기로 접어들면 학습이라는 자극이 가해져도 언어 습득이 어렵다고 한다.
외국어 학습도 이 시기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서 이 기간이 지나면 네이티브 스피커와 같은 외국어 구사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조기 유학의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도 때가 있듯이 인생살이의 모든 것은 적합한 때가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면 노력만 많이 들고 효과는 적게 나타나는 고비용 저효율 씨스템으로 가는 것의 근본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유전자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3.
해가 바뀌면서 혹한에 폭설이 겹쳐서 나갈 수도 없어서 집에 틀어박혀서 책 한권을 읽었는데 말콤 블래드웰(Malcolm Bladwell)의 '블링크(Blink)'라는 책이다.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행동양식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있는 이 책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행한 다양한 실험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한 인상적인 예를 들면, 대학생들을 두 군(群)으로 나누고 A군에게는 여러 단어 중에 '공격적으로agressively', '대담한bold', '무례한rude', '어지럽히다disturb', '강요하다intrude', '침해하다infringe'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들을 섞어 놓은 것을 읽게 했고, B군에게는 '존경하다respect', '사려깊은considerate', '감사하다appreciate', '참을성있게patiently', '양보하다yield', '공손한polite', '예의바른courteous'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읽게 했다.
그 후에 문장테스트를 마친 대학생들을 한 명씩 복도를 지나가게 했는데 복도의 끝에서는 다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게 했다.
A군의 학생들은 평균 5분 후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으나, B군의 학생들은 82%가 대화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예비군 끝나면 인생의 낙도 끝난다'는 낙 없는 시절을 살고 있지만 예비군에 가던 시절에는 의무적으로 예비군에 나가는 일이 무던히도 싫었다.
무더운 강당에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재미 하나 없는 정신훈화를 듣게 하는데 중간의 휴식시간에 하는 행동들을 보면 가관이었다.
사회에서는 넥타이 매고 점잖은 사람들이 일단 예비군복을 입으니 아무데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는 것은 기본이고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따라서 대화의 내용도 예비군복에 걸맞는 수준으로 추락하고 귀가하는 길에는 삼삼오오 시장바닥의 막걸리집으로 직행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본대로 들은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며 이러한 일련의 실험들은 우리가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착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환경이라는 조건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드웨어가 사람의 내부에 있어서, 인생의 대부분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전적인 자동조종장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경상도 사람이 어렸을 때 배운 억양을 일생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 특정한 음식에 대한 기호, 특정한 대상에게 친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길들여지는 것, 개인이나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행위, 정인(情人)에게 죽고 못 사는 순애보(殉愛譜)적인 행위, 은혜나 원한을 뼈에 아로새겨 잊지 않는 것(刻骨難忘)들도 후천적으로 사회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무엇에 의하여 발현되는 것이라고 보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4.
그러므로 긍정적인 자극으로 결정적인 시기(critical period)에 임프린팅시키는 것이 인생에서 더 없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선철(先哲)들은 그들의 통시대적인 통찰력으로 눈앞의 일에만 목숨을 걸고 일희일비하는 어리석은 중생에게 훈계하고 있다.

공자는,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고, 하루의 계획은 인시(寅時)에 달려 있으며, 일생의 계획은 어렸을 때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一年之計 在於春, 一日之計 在於寅, 一生之計 在於幼), 인시는 새벽 3시에서 5시까지를 말하는 것이니 금년에는 일단 일찍 일어남으로서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지 말고 볼 일이다.

바울은 에베소의 옥중에서 빌립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신약성서, 빌립보서 4:8)라고 했으니 긍정적인 좋은 생각으로 끊임없이 각인시키다보면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20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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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알
나가이다카시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6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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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탄이 떨어진 땅에서 살아가기


지난 봄 일본의 동북지방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폭발하였다.
방사능이 대량으로 누출되고 있는 이 사건은 재앙의 핵심인 원자로가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재앙이기도 하다.
우리 한국 국민은 일본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섭섭한 것이 많지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 나라에 대하여 옛 원한을 따지지 아니하고 앞장서서 도와주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이 원전사고로 일대 재앙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도 일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묵주알’이라는 문고본 책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카톨릭 계통의 출판사에서 나온 조그만 책이다.
책꽂이를 정리하여 필요없는 책을 버리는 작업을 하던 중에 10여 년 전에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만 기억이 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게 된 것이었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과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책이 좋은 책이란 말이 상기되는 책이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던 일본의 무릎을 꿇게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조기에 이루어지게 했다.
당시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방사선과 교수였던 나가이 다카시(永井隆)는 그가 연구에 몰두하던 의과대학의 건물이 폭심(爆心)에서 떨어져 있어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학생 사상자 처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사흘 만에 집에 들어갔을 때 자기가 살던 마을 전체가 재의 벌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목도한다.
부엌 뒤쪽에서 검정색 덩어리가 보였는데 이것이 아내의 타다 남은 골반(骨盤)과 요추(腰椎)였다. 그 옆에는 십자가가 달린 묵주(默珠)가 남아 있었다.
그는 타다가 남은 아내를 바께스에 주워 담고서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간다.

아내의 뼈를 묻은 그는 피난을 가있는 어린 것들을 찾아 처갓집으로 갔다.
판자문을 열고 토방으로 올라서니 마침 거기에는 그의 어린 두 자녀 세이이찌와 가야노가 매미를 잡아다가 울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들은 이윽고 문간으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세이이찌의 손에서 매미가 울면서 달아났다.
그때부터 두 어린이는‘엄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불행한 사람은 어느 사이에 그 불행에 익숙해져 불행을 느끼지 않게 된다.
세 식구가 모두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세상은 이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딸인 가야노는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저녁때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는 울고 싶어지곤 했는데 가야노는 타버린 황폐한 벌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벽돌에 걸려 넘어져도 기왓장에 발꿈치가 벗겨져도 잠자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흘러내리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씻을 뿐, 커다란 들개가 쫓아올 때도 새파랗게 질린 채 판자집으로 달려들어 오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쓸쓸해도 슬퍼도 아파도 무서워도 다만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참는 아이가 되었다.

달밤에는 시가지였던 곳에 사람들의 뼈가 하얗게 널려 있는 것이 보였고 아이들은 발길에 부딪히는 뼈를 가지고 화장터 놀이를 했다.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폭심지에 쌓여있는 뼈의 무더기를 스쳐가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아, 살아있군요.’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인사였다.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과 군벌은 남의 나라를 빼앗고 그 국민을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살아남았고 민초들이 그들의 죄값을 대신하여 몰살을 겪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원자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일상의 어려움이나 상실에 대하여서도 힘들어하고 슬퍼하는데 우리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되면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슬픔이나 괴로움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정서적 반응이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대하여서 인간은 그것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만약 처음 왔을 때의 강도로 아픔이 지속된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는 장시간 지속되는 고통에 대하여서는 그것을 덜 느끼게 하는 씨스템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몸이 그 문제를 안고서 죽을 수는 없으므로 살아남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생리학적인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생 시절 유물론자였으나 뇌일혈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잊지 못한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없이 아들을 사랑하시던 어머니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말없이 바라보시던 그 눈은 ‘나는 지금 죽어가지만 이 어미의 영혼은 영원히 네 옆에 머물러 있겠다.’ 라고 확실히 말씀하신 것으로 각인되었다.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던 그가 이 일을 겪고는 아무 의심도 없이‘어머니의 영혼은 육신을 떠났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으로 알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유물론에 회의를 가지게 된 저자는 만주사변에 군의관으로 종군하고 나서 귀국한 후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이 책에는 핵 피폭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의사의 관점에서 본,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원자탄이 떨어진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전쟁 직후의 일본의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남양군도에서 살아 돌아온 한 병사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 집 앞에서 주저앉으며, 위암에 걸려서 생명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남편에게 외아들의 전사 소식을 감추려하는 한 여인은 마음의 이중고로 얼굴이 수척해 가는데 자신이 죽을 운명인 것도 모르는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근심하는 장면이 나오며, 핵이 떨어졌던 땅에 보리가 자라고 재로 뒤덮인 땅에서 고사리가 자라고 깨어진 기와조각 사이에서 나팔꽃이 피며, 핵에 피폭된 잔디밭에는 잔존방사능 때문에 네잎 클로버가 많아졌다.
불행의 밑바닥에서는 행복해질 일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땅에서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므로 복이 있다.
슬퍼할 것만 남아있는 땅에서 우리는 애통해 하는 자가 되므로 복이 있다.

(201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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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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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 부조화


스포츠를 즐겨하지는 않으나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남들 하는 대로 중계방송을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대학 시절 무하마드 알리나 홍수환의 권투시합이 있으면 학교 앞 다방의 주인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한 몫 잡으려고 텔레비전 앞에 의자를 빽빽하게 배치해 놓곤 했었는데, 나는 주머니를 털어 커피값을 마련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이 앉아 있는 손님들 속에 섞여서 손에 땀을 쥐고 구경을 하곤 했었다.
외국에서 하는 축구 시합 같은 경우는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 밤중인 경우도 있어서 새벽 3시에 얼람시계를 맞춰 놓았다가 자다가 일어나서 본 경우도 가끔 있었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나 팀이 원하는 대로 우세한 기량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승리하면 커피값이 아깝지 않았고, 잠을 설쳐가며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있는 보람이 있었으나, 어떤 경기를 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게임이 이상하게도 풀리지가 않아서 애를 태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력만 따지면 오히려 상대 팀 보다 나은데, 팀에 소속된 선수 한 명이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순간에 팀의 구성원 사이의 사인이 맞지 않아서, 혹은 경기의 흐름의 분위기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결정적 순간에 주심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 등으로 이길 듯 이길 듯하다가도 승기(勝機)를 놓치고 분루(憤淚)를 삼키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게임이 풀리지 않을 경우, 그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경기가 끝나가는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게임을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를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1점 차이로 패하고 있는 축구 시합에서 한 골을 만회하는 듯하더니 주심의 애매모호한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어 골이 무효화되고, 이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기회를 잡아서 슈팅한 것이 프런트 바에 맞고 튀어 나오고 말더니 타임아웃의 휘슬이 울리더라는 식이다.
전반 45분 후반 45분 동안에 볼 점유율이 더 높고 슈팅이 많아서 우세한 경기를 운영했다고 한들 천금 같은 골 한 방이 없어서 무릎을 꿇고 만다.  

소설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스포츠보다도 더 치열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루 말로 다해서 무엇할 것인가.
월드컵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결승에 오르는 두 팀보다는 훨씬 더 많은 팀들이 폐회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먼저 조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어야만 하듯이, 많은 이들이 인생의 초입인 대학입시에서 부터 탈락하여서 빛나는 인생의 장밋빛 그림을 먹을 듬뿍 뭍힌 두꺼운 붓으로 무깨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 수많은 탈락과 낙오의 불행한 사연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조상들의 삶의 기록 속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니,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천재였으나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언행으로 '천지간에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허균(許筠)은 어떠하며, 조부가 홍경래(洪景來)의 난중에 역도에게 항복해 버린 사실도 모르고 과거(科擧)에서 조부를 비판한 내용의 시제(詩題)로 급제하자 이름을 버리고 평생을 삿갓에 죽장망혜(竹杖芒鞋)로 떠도는 영혼이 되어버린 김병연(金炳淵)은 또한 어떠한가.

찬바람 불어오는 스산한 초겨울 날씨에 마음도 심란하던 중, 책 한 권을 손에 잡게 되니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선비들의 삶과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장을 넘겨가던 중 남종현(南鍾鉉,1783~1840)이라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름이 생소한 한 선비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인상적이었는데, 그의 생몰연대를 살펴 보니 정조 2년에 태어나서 헌종 6년에 몰(歿)한 것이 된다.
남종현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미(寒微)한 존재였으며 서당의 선생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의 집은 서대문 근처의 성벽에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적십자 병원 근처라고 한다.

그가 말년을 숨쉬었던 헌종(憲宗)년간에는  천주교도의 학살사건(1841, 己亥邪獄)이 있었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강화도령 철종의 직전 임금되는 헌종은 8세에 즉위하여 15년간을 재위했었는데 그 중 어머니인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수렴첨정을 한 기간이 7년간이었다.
계몽군주였던 영, 정조(英正祖)의 자강 노력도 정조의 요절로 무위로 끝나고, 순조와 헌종 등 어린 임금들의 즉위는 안동김씨 대왕대비들의 수렴첨정으로 이어져 왕권은 약화되고 오백년 나이의  늙은 조선은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척족세력의 정권쟁탈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840년은 아편전쟁이 시작된 해이니 서세동점의 시대도 다가오고 있었다.
내우외환으로 말미암아 침몰해 가는 일엽편주와 같은 조선에서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묘지명(墓誌銘)은 묘지(墓誌)에 새긴 글을 말하는데, 이는 묘 앞에 세워 놓은 비석과는 달리 비바람이나 풍화작용을 피하기 위하여 망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돌이나 도자기 판에 새겨서 봉분의 인근에 묻어 두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찬묘지명이란 자기의 일생을 스스로 평가하는 글이 되는 것이니 특별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모년 모월 모일 남종현이 병들어 죽게 되자, 관도 쓰지 말고, 옷가지도 넣지 말며, 묏자리를 가리지도 말고, 봉분을 꾸미지도 말며, 묘지명을 장만하여 넣지도 말라고 분부하였다.
그 대신에 스스로 종잇조각에다 사연을 써서 시체를 묻은 구덩이에 집어넣게 하였으니 그 글은 이러하다.

종현은 자가 현여(玄汝)로, 계묘년 2월2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몹시 아둔한데다 병치레가 잦았다.
장성해서도 인사를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서하고 글 지을 줄은 알았으나 문장의 도는 알지 못했다.
나이 15, 16세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시험장 문을 두드렸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고문을 삼십년 동안이나 익혔으나 문장 또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늘 하는 말은 이랬다.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요순임금조차도 하기 어렵고, 타고난 지능과 재능은 안회(顔回)와 도척(盜跖)이 똑 같다.
좋은 시기를 만나야 제 뜻을 펴는 우연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고 생각을 잘하고 못하기는 바보나 현자가 마찬가지다."
"악인을 보면 같은 나라에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자는 죽음을 맹세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는 먼 옛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고, 먼 옛말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았다.
권세를 가진 자에게 아첨할 줄 모르고 궁하게 지내도 변치 않았다.
천지 가운데 나 같은 자 하나 없을 수 없겠는가?
말을 꺼내면 반드시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행동을 하면 반드시 풍속과 어긋났다.
제 성질대로 살기 때문에 집안사람조차 가까이 하지 않고, 저 혼자 행동하기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렸다.
문장을 일삼으면서 돼먹지 않은 글쟁이로 지목 당하는 것을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천한 주제에 귀한 자를 섬기지 않으므로 버릇없는 사람이라 비난당하는 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천지 사이에 나 같은 자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아! 나 같은 자가 있는 것은 오십년에 불과한 반면, 나 같은 자가 없는 것은 장차 몇천만년에 이를 것이다.
도리를 지킨 옛사람들은 잠깐의 시간에도 무궁한 세월 동안 누릴 명성을 이루었지만, 지금 종현은 오십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고도 오십년이 지난 뒤 몇 시간 몇 달 동안의 명성을 누릴 행위도 하지 못한 채 끝내 사라지는구나! 슬프도다!
아내는 허씨로 양천(陽川)이 본관이며 지평(持平)을 지낸 간(暕)의 딸이다.
아들은 두지 못했다.

명(銘)을 짓는다.
말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고,
행동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으며,
장례는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만을 택했다.
남들이 그의 어짊을 말하지 않으므로
내 알겠다, 그의 어리석음을.

(200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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