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알
나가이다카시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6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원자탄이 떨어진 땅에서 살아가기


지난 봄 일본의 동북지방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폭발하였다.
방사능이 대량으로 누출되고 있는 이 사건은 재앙의 핵심인 원자로가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재앙이기도 하다.
우리 한국 국민은 일본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섭섭한 것이 많지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 나라에 대하여 옛 원한을 따지지 아니하고 앞장서서 도와주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이 원전사고로 일대 재앙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도 일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묵주알’이라는 문고본 책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카톨릭 계통의 출판사에서 나온 조그만 책이다.
책꽂이를 정리하여 필요없는 책을 버리는 작업을 하던 중에 10여 년 전에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만 기억이 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게 된 것이었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과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책이 좋은 책이란 말이 상기되는 책이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던 일본의 무릎을 꿇게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조기에 이루어지게 했다.
당시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방사선과 교수였던 나가이 다카시(永井隆)는 그가 연구에 몰두하던 의과대학의 건물이 폭심(爆心)에서 떨어져 있어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학생 사상자 처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사흘 만에 집에 들어갔을 때 자기가 살던 마을 전체가 재의 벌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목도한다.
부엌 뒤쪽에서 검정색 덩어리가 보였는데 이것이 아내의 타다 남은 골반(骨盤)과 요추(腰椎)였다. 그 옆에는 십자가가 달린 묵주(默珠)가 남아 있었다.
그는 타다가 남은 아내를 바께스에 주워 담고서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간다.

아내의 뼈를 묻은 그는 피난을 가있는 어린 것들을 찾아 처갓집으로 갔다.
판자문을 열고 토방으로 올라서니 마침 거기에는 그의 어린 두 자녀 세이이찌와 가야노가 매미를 잡아다가 울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들은 이윽고 문간으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세이이찌의 손에서 매미가 울면서 달아났다.
그때부터 두 어린이는‘엄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불행한 사람은 어느 사이에 그 불행에 익숙해져 불행을 느끼지 않게 된다.
세 식구가 모두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세상은 이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딸인 가야노는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저녁때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는 울고 싶어지곤 했는데 가야노는 타버린 황폐한 벌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벽돌에 걸려 넘어져도 기왓장에 발꿈치가 벗겨져도 잠자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흘러내리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씻을 뿐, 커다란 들개가 쫓아올 때도 새파랗게 질린 채 판자집으로 달려들어 오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쓸쓸해도 슬퍼도 아파도 무서워도 다만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참는 아이가 되었다.

달밤에는 시가지였던 곳에 사람들의 뼈가 하얗게 널려 있는 것이 보였고 아이들은 발길에 부딪히는 뼈를 가지고 화장터 놀이를 했다.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폭심지에 쌓여있는 뼈의 무더기를 스쳐가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아, 살아있군요.’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인사였다.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과 군벌은 남의 나라를 빼앗고 그 국민을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살아남았고 민초들이 그들의 죄값을 대신하여 몰살을 겪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원자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일상의 어려움이나 상실에 대하여서도 힘들어하고 슬퍼하는데 우리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되면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슬픔이나 괴로움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정서적 반응이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대하여서 인간은 그것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만약 처음 왔을 때의 강도로 아픔이 지속된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는 장시간 지속되는 고통에 대하여서는 그것을 덜 느끼게 하는 씨스템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몸이 그 문제를 안고서 죽을 수는 없으므로 살아남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생리학적인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생 시절 유물론자였으나 뇌일혈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잊지 못한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없이 아들을 사랑하시던 어머니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말없이 바라보시던 그 눈은 ‘나는 지금 죽어가지만 이 어미의 영혼은 영원히 네 옆에 머물러 있겠다.’ 라고 확실히 말씀하신 것으로 각인되었다.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던 그가 이 일을 겪고는 아무 의심도 없이‘어머니의 영혼은 육신을 떠났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으로 알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유물론에 회의를 가지게 된 저자는 만주사변에 군의관으로 종군하고 나서 귀국한 후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이 책에는 핵 피폭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의사의 관점에서 본,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원자탄이 떨어진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전쟁 직후의 일본의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남양군도에서 살아 돌아온 한 병사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 집 앞에서 주저앉으며, 위암에 걸려서 생명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남편에게 외아들의 전사 소식을 감추려하는 한 여인은 마음의 이중고로 얼굴이 수척해 가는데 자신이 죽을 운명인 것도 모르는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근심하는 장면이 나오며, 핵이 떨어졌던 땅에 보리가 자라고 재로 뒤덮인 땅에서 고사리가 자라고 깨어진 기와조각 사이에서 나팔꽃이 피며, 핵에 피폭된 잔디밭에는 잔존방사능 때문에 네잎 클로버가 많아졌다.
불행의 밑바닥에서는 행복해질 일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땅에서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므로 복이 있다.
슬퍼할 것만 남아있는 땅에서 우리는 애통해 하는 자가 되므로 복이 있다.

(201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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