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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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 부조화


스포츠를 즐겨하지는 않으나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남들 하는 대로 중계방송을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대학 시절 무하마드 알리나 홍수환의 권투시합이 있으면 학교 앞 다방의 주인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한 몫 잡으려고 텔레비전 앞에 의자를 빽빽하게 배치해 놓곤 했었는데, 나는 주머니를 털어 커피값을 마련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이 앉아 있는 손님들 속에 섞여서 손에 땀을 쥐고 구경을 하곤 했었다.
외국에서 하는 축구 시합 같은 경우는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 밤중인 경우도 있어서 새벽 3시에 얼람시계를 맞춰 놓았다가 자다가 일어나서 본 경우도 가끔 있었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나 팀이 원하는 대로 우세한 기량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승리하면 커피값이 아깝지 않았고, 잠을 설쳐가며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있는 보람이 있었으나, 어떤 경기를 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게임이 이상하게도 풀리지가 않아서 애를 태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력만 따지면 오히려 상대 팀 보다 나은데, 팀에 소속된 선수 한 명이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순간에 팀의 구성원 사이의 사인이 맞지 않아서, 혹은 경기의 흐름의 분위기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결정적 순간에 주심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 등으로 이길 듯 이길 듯하다가도 승기(勝機)를 놓치고 분루(憤淚)를 삼키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게임이 풀리지 않을 경우, 그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경기가 끝나가는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게임을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를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1점 차이로 패하고 있는 축구 시합에서 한 골을 만회하는 듯하더니 주심의 애매모호한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어 골이 무효화되고, 이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기회를 잡아서 슈팅한 것이 프런트 바에 맞고 튀어 나오고 말더니 타임아웃의 휘슬이 울리더라는 식이다.
전반 45분 후반 45분 동안에 볼 점유율이 더 높고 슈팅이 많아서 우세한 경기를 운영했다고 한들 천금 같은 골 한 방이 없어서 무릎을 꿇고 만다.  

소설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스포츠보다도 더 치열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루 말로 다해서 무엇할 것인가.
월드컵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결승에 오르는 두 팀보다는 훨씬 더 많은 팀들이 폐회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먼저 조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어야만 하듯이, 많은 이들이 인생의 초입인 대학입시에서 부터 탈락하여서 빛나는 인생의 장밋빛 그림을 먹을 듬뿍 뭍힌 두꺼운 붓으로 무깨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 수많은 탈락과 낙오의 불행한 사연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조상들의 삶의 기록 속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니,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천재였으나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언행으로 '천지간에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허균(許筠)은 어떠하며, 조부가 홍경래(洪景來)의 난중에 역도에게 항복해 버린 사실도 모르고 과거(科擧)에서 조부를 비판한 내용의 시제(詩題)로 급제하자 이름을 버리고 평생을 삿갓에 죽장망혜(竹杖芒鞋)로 떠도는 영혼이 되어버린 김병연(金炳淵)은 또한 어떠한가.

찬바람 불어오는 스산한 초겨울 날씨에 마음도 심란하던 중, 책 한 권을 손에 잡게 되니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선비들의 삶과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장을 넘겨가던 중 남종현(南鍾鉉,1783~1840)이라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름이 생소한 한 선비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인상적이었는데, 그의 생몰연대를 살펴 보니 정조 2년에 태어나서 헌종 6년에 몰(歿)한 것이 된다.
남종현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미(寒微)한 존재였으며 서당의 선생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의 집은 서대문 근처의 성벽에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적십자 병원 근처라고 한다.

그가 말년을 숨쉬었던 헌종(憲宗)년간에는  천주교도의 학살사건(1841, 己亥邪獄)이 있었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강화도령 철종의 직전 임금되는 헌종은 8세에 즉위하여 15년간을 재위했었는데 그 중 어머니인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수렴첨정을 한 기간이 7년간이었다.
계몽군주였던 영, 정조(英正祖)의 자강 노력도 정조의 요절로 무위로 끝나고, 순조와 헌종 등 어린 임금들의 즉위는 안동김씨 대왕대비들의 수렴첨정으로 이어져 왕권은 약화되고 오백년 나이의  늙은 조선은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척족세력의 정권쟁탈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840년은 아편전쟁이 시작된 해이니 서세동점의 시대도 다가오고 있었다.
내우외환으로 말미암아 침몰해 가는 일엽편주와 같은 조선에서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묘지명(墓誌銘)은 묘지(墓誌)에 새긴 글을 말하는데, 이는 묘 앞에 세워 놓은 비석과는 달리 비바람이나 풍화작용을 피하기 위하여 망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돌이나 도자기 판에 새겨서 봉분의 인근에 묻어 두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찬묘지명이란 자기의 일생을 스스로 평가하는 글이 되는 것이니 특별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모년 모월 모일 남종현이 병들어 죽게 되자, 관도 쓰지 말고, 옷가지도 넣지 말며, 묏자리를 가리지도 말고, 봉분을 꾸미지도 말며, 묘지명을 장만하여 넣지도 말라고 분부하였다.
그 대신에 스스로 종잇조각에다 사연을 써서 시체를 묻은 구덩이에 집어넣게 하였으니 그 글은 이러하다.

종현은 자가 현여(玄汝)로, 계묘년 2월2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몹시 아둔한데다 병치레가 잦았다.
장성해서도 인사를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서하고 글 지을 줄은 알았으나 문장의 도는 알지 못했다.
나이 15, 16세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시험장 문을 두드렸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고문을 삼십년 동안이나 익혔으나 문장 또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늘 하는 말은 이랬다.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요순임금조차도 하기 어렵고, 타고난 지능과 재능은 안회(顔回)와 도척(盜跖)이 똑 같다.
좋은 시기를 만나야 제 뜻을 펴는 우연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고 생각을 잘하고 못하기는 바보나 현자가 마찬가지다."
"악인을 보면 같은 나라에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자는 죽음을 맹세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는 먼 옛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고, 먼 옛말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았다.
권세를 가진 자에게 아첨할 줄 모르고 궁하게 지내도 변치 않았다.
천지 가운데 나 같은 자 하나 없을 수 없겠는가?
말을 꺼내면 반드시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행동을 하면 반드시 풍속과 어긋났다.
제 성질대로 살기 때문에 집안사람조차 가까이 하지 않고, 저 혼자 행동하기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렸다.
문장을 일삼으면서 돼먹지 않은 글쟁이로 지목 당하는 것을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천한 주제에 귀한 자를 섬기지 않으므로 버릇없는 사람이라 비난당하는 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천지 사이에 나 같은 자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아! 나 같은 자가 있는 것은 오십년에 불과한 반면, 나 같은 자가 없는 것은 장차 몇천만년에 이를 것이다.
도리를 지킨 옛사람들은 잠깐의 시간에도 무궁한 세월 동안 누릴 명성을 이루었지만, 지금 종현은 오십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고도 오십년이 지난 뒤 몇 시간 몇 달 동안의 명성을 누릴 행위도 하지 못한 채 끝내 사라지는구나! 슬프도다!
아내는 허씨로 양천(陽川)이 본관이며 지평(持平)을 지낸 간(暕)의 딸이다.
아들은 두지 못했다.

명(銘)을 짓는다.
말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고,
행동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으며,
장례는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만을 택했다.
남들이 그의 어짊을 말하지 않으므로
내 알겠다, 그의 어리석음을.

(200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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