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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없는 번영 -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팀 잭슨 지음, 전광철 옮김 / 착한책가게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주택에 있어서 외관이나 평면 구성의 형태 변화는 약 3~40년의 기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형태는 그만한 시간을 지나왔지만 각 방의 평면을 결정하는 설계의 원칙은 최근까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따로 건축학을 배운 적은 없으므로 그저 경험에 의한 나의 추측이지만 바로 장의 크기에 맞추는 것이다.
이전 세대부터 물려 내려온 이불장, 자개장, 옷장의 크기가 방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다.
여섯 자, 아홉 자, 열두 자 이런 식으로 방의 어느 한 면의 크기가 정해진다.
그래서 방의 폭이 미터 단위로 규정되기보다 3600 X 3900이거나 3200, 2700, 2400 이런 식으로 자의 단위가 아직도 지켜지는 것이다. 외국의 아파트와는 평면의 치수가 다른 것이다. 요즘에는 외국처럼 시스템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파트는 아직도 그 치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 내부공간의 평면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예컨대 아파트를 팔아야 하는 건설회사들의 입장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신상품의 개발이 필요 했을 것이고 그런 요구에 의하여 아파트 평면에서 변화를 준 것이 베란다였다.
70년대의 아파트는 규모 면에서도 연립주택의 수준이었지만 베란다가 따로 없는 것이 많았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 고층아파트가 생겨나면서 베란다가 생겼고(아마 고층에서 내려다 볼 때 생기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완충효과 때문일 이유가 조망을 위한 툇마루의 기능의 요구보다는 크다고 생각하지만……)80년대에는 베란다의 폭이 1200㎜정도에서 90년대의 1500㎜정도로 다시 10년 후 1800㎜까지였다가 이제는 2000㎜정도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최근 지은 아파트에 가보면 베란다의 크기가 평균 2000㎜정도라서 마치 작은 마당을 보는듯하다.
그리고 그 면적을 거실이나 방으로 확장하다 보니 그 비용만 수천만 원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아파트의 구조변경이 주택업계에서는 신상품의 개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상품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건축기술로서 구조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신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기술을 적용하게 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이 변경되었으며 입주 후 부가되는 구조변경 덕에 파생된 직업들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니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조변경이나 형태의 변경을 위한 신상품개발이 지금 막혀있는 것 같다. 최근 신도시의 주상복합건물 형태의 아파트가 마치 신상품인 것처럼 광고하지만 20년전에 마포구의 시장 재건축을 할 때 그런 구조가 계획되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 순환은 맞더라도 신상품은 아니다. 신상품개발을 막고 있는 것이 경기침체로 인한 거래부진이든 법규나 제도의 규정 때문에 한계에 부딪혔든 혁신적인 상품을 적용하기에는 기술이 못 미치든 평면에서 변화를 가져올 주기(그 동안의 변화를 볼 때 대략 10년 주기)가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아파트의 평면적 신상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상품의 혁신을 불러오기도 한다는데 있어서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만큼은 맞는 것 같은데 여러 부정적 요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활로를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Joseph Schumpeter는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에는 혁신과정, 사실상 신상품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자본주의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고 말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기업조차 단지 비용최소화를 통해서만은 살아남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중략…06. 소비주의의 ‘철창’ 128p
이런 말을 들으면 계속 뭔가가 변화되어야 하며 재벌들이 광고나 언론을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동안의 아파트는 주거공간의 역할만이 아닌 어떤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택, 산동네의 양철지붕 집부터 신 상품이 나오기 전까지의 아파트에 사는 모두가 새집으로 새집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던가? ‘실 수요자’라고 밝히는 대부분의 수요자도 사실은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감추기 위한 변명으로서의 상징으로 그 단어를 쓸 뿐이다. 그러니 돈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신 상품아파트를 갖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이 돈을 쓰기 위한 신상품개발이 막혀있으니 Trickle Down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경제성장면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상품 개발을 통한 소비 촉진은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지금의 부정적 요인들은 그런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한계란 내 생각에는 의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한계가 아닐까? 또는 투전 판과 같은 부동산시장에서 거래를 하기 위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수요가 전체 거래량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서 아닐까? 요컨대 비싼 물건을 공급하기 위한 원재료인 토지 값의 상승이 일부의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나머지 분량을 소비하기 위해서인 대상에게는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신상품은 이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물론 신상품은 무엇보다 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정보를 드러낸다.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이 1세기전에 이미 지적했듯이 ‘이목을 끄는 소비’는 신상품 구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최신제품과 패션 대부분은 처음에는 부자들만 접근할 수 있다. 신제품이 비싼 까닭은 그것들이 소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기꺼이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 신제품은 특별한 가격으로 시장에 출시되기도 한다. 일부 사람들의 과시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에는 모방이 뒤따른다. …중략… 소비상품은 항상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해왔다. 그것은 과거에도 자주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과정과 이토록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06 소비주의의 ‘철창’ 132P”
“하지만 주택이 소비제품인가?
보유량이 한정된 나라에서 재활용하기 어려운 주택단지로만 토지를 개발하는 것은 토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닐까?
그런데 자꾸만 물건을 만들어 내고자 단지 지정을 해대면 공급량에 맞춰 구매자도 늘어나거나 인구가 증가해야 하는데
그런 점은 정책입안자들의 욕구에 따라주지 못하는 불가항력 아닌가?
그러다 보니 인구 유입을 위하여 신 모델의 주택을 공급하려 하고,
인구비율과는 상관없이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기반시설을 늘리고,
기반시설의 유지관리비를 확충하기 위한 세수의 마련을 위해 토지제한을 풀어 주택단지용 토지를 또 공급하고,
다행히 늘어난 인구의 교통편의를 위하여 다시 기반시설을 늘리고,
또 다시 모자라는 세수를 위해 해제할 토지가 모자라면 외부의 자본을 차입하고,
그런 현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주민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번쩍이는 불빛으로 둘러싸인 위락시설을 짓기 시작한다.” (도심 확장)
“끊임없는 신상품추구는 오랜 세월 각인되어온 공동의 노력이 지닌 가치를 파괴한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회제도는 성장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버렸다. 요컨대 사회를 희생시켜 개인주의를 강화하고, 전통을 희생시켜 혁신을 자극하는 소비문화적 흐름은 인류에게 의미 있는 것들에 대한 왜곡을 불러온다.” <성장 없는 번영 12 번영의 지속 259P>
다만 아파트의 평면이 남향위주에서 전망위주로 변하는 추세이며 세대의 분리나 독립으로 인한 주거형태가 변하다 보니
방이 나란히 배치되는 호텔 식의 구조나 임대를 위한 분리세대(이것도 신상품은 아니다.)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구조는 세대간의 분리와 소통의 단절을 발생시키기도 하는 점에서 혁신이 전통을 희생시키고 문화를 왜곡시킨다는 지적은 일리 있어 보인다.
이제 우리의 아파트는 다른 이유로 침체의 시기를 맞고 있지만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의 경제를 성장시킨 것은 맞다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발의 매력을 잊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과거의 거래를 되살리려 한다는 의미로 신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까 주택관련법은 며칠마다 바뀌어 누더기처럼 되고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분기마다 규제를 들먹이고 완화를 발표한다.
그나마 좁은 면적의 나라에서 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개발할 재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선진국대열에 동참하려는 경쟁에 끼어들어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는 목적을 우선시하여 개발우선정책을 시행하고 환경이나 생태계를 지금처럼 파괴한다면 막상 성장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선진국이라는 집단에 속할 때에는 그런 파괴행위가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이미 겪은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아 환경과 생태계에 대하여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지금 세계는 가용 자원이 줄어들고 있고, 환경의 절대적인 한계와 마주하고 있으며, ‘빈곤의 바다’위에 ‘번영의 섬들’이 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01 17P 잃어버린 번영 “더욱이 앞으로 세계 인구가 90억 명이 되는 시점에 그들 모두가 OECD국가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풍요로움에 도달한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제규모가 2050년까지 지금보다 15배이상(1950년의 75배)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금세기 말에 가서는 현재의 경제규모보다 40배이상(1950년의 200배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체 그러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단 말인가? 진정 그것이 지속 가능한 공동의 번영을 이루는데 신뢰할 만한 전망을 제공하는가?” 01 30P 잃어버린 번영
사람들이 잘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어느 형태가 잘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모두 같은 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현실 속의 사람들은 잘 사는 것에 대하여는 한가지의 형태로 모방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도킨시안 Dawkinsian들의 주장대로 모방이 인간 유전자에 자리 잡힌 진화의 근거라고 해도 부의 과시를 위한 소비의 집착은 상징의 의미(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상품이 제공하는 상징언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상품이 제공하는 상징언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물건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 예컨대 가족, 친구관계, 소속감, 공동체, 정체성, 사회적 지위,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까지 소통한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사회적 소통이 우리가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매게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번영이 상징언어를 통한 소통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04. 성장의 딜레마 75P)를 벗어나 인간이란 파괴를 위한 악마의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주장에 할말이 없게 만든다.
공허한 자아의 불안이 확장된 자아로 나아가도록 자극한다.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갈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비교를 하게 만든다. 시장 경쟁에서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창조적 파괴를 부추긴다. 살기 아니면 죽기, 바로 정글의 법칙이다. 이것은 소비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지점에서 본성과 사회구조가 서로 결합하여 우리를 소비주의의 철창 속에 단단히 가둬버린다.
06. 소비주의의 ‘철창’ 135P
나는 아무리 이 업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이처럼 끝을 모르고 오르려고 하는 본능을 가진 괴물은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포커 판이나 노름판에 가보면 돈이 있는 사람이 최후에 남게 되어있는데 마찬가지로 돈 가진 사람들의 배팅에 놀아나다가 결국에는 꽁지 돈도 못 쓰는 신세로 내몰릴 가능성이 백 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택의 가격이 평당 5천만원가까이 오르게 되면 그것을 살 사람은 누가 될까? (부동산 상념1. 지공주의)
그러므로 지금 이런 시기에 자연스레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부동산 경기의 활성화라고 하기 보다는 주거나 주택 또는 부동산 전체에 대한 개념의 의식변화라고 하고 싶다. 누구나 잘사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지만 ‘누구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만 빈부의 폭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희망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정말로 ‘잘’사는 것에 만족하려면 노동시간의 절감도 필요할 것이고 노동의 분배도 필요할 것이며(하루 24시간중에서 8시간을 자고 16시간동안 일을 하면 ‘많이 살’ 수는 있겠지만 ‘잘’ 산다고는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노력은 실업의 감소효과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일은 지금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직업상의 범주에 한하여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개발사업은 확장의 형태에서 환원의 상태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높게 더 넓게 가 아니고 더 자연적이게 더 생태적이 게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개발이 아니라 없애는 것, 즉 ‘창조를 위한 파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회귀를 위한 파괴’도 개발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결정적으로 믿음직스러운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 달려있다. 이 대안은 덜 물질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회 차원에서 이것은 물질적, 재정적, 심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재투자를 뜻한다. 특히 공공재 개념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공공장소, 공공기관, 공동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되살려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목표와 자산, 사회기반시설에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그다지 실속 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녹지 공간, 공원, 여가활용시설, 운동시설, 도서관, 박물관, 대중교통, 지역시장, 명상센터, 축제 등은 새로운 사회참여의 기대와 가능성을 높이는 구성요소들이다.” 12 번영의 지속 246P
경제와 수학은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을 만큼 무지한데 자본주의의 종류나 역사 미래경제니 거시경제니 하는 말은 알지 못한다.
책을 봐도 1분만 지나면 앞에 읽은 것은 잊어먹을 정도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한 “성장의 한계”라는 책을 먼저 읽고 느낀 점을 <도심 확장>이라는 글로 이미 나타냈던 것처럼 경제는 모르더라도 지금처럼 경제 성장, 서민경제 회생 등의 말로 정치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은 내게는 시민을 데마고기 Demagogy 하려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누구나 올바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떠올리는 말들은 이 책의 저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실현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때 주저할 뿐이지……
소유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현인들의 지혜이기도 한데 이는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부가 어디에 있는지 갈수록 알아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풍요의 미궁에 갇혀 주문이 풀리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화려함 속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분간하지 못한 채 우리는 길을 잃고 말았다. 12 번영의 지속 242P
우리가 결코 회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 우리는 생태 한계를 무시 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사회라는 세계를 찬조하고 또 재창조할 수 있다. 사회구조와 제도들이 규범과 전망을 빚어내고, 반대로 그 규범과 전망이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 번영의 지속 24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