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없는 번영 -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팀 잭슨 지음, 전광철 옮김 / 착한책가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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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택에 있어서 외관이나 평면 구성의 형태 변화는 약 3~40년의 기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형태는 그만한 시간을 지나왔지만 각 방의 평면을 결정하는 설계의 원칙은 최근까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따로 건축학을 배운 적은 없으므로 그저 경험에 의한 나의 추측이지만 바로 장의 크기에 맞추는 것이다.

이전 세대부터 물려 내려온 이불장, 자개장, 옷장의 크기가 방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다.

여섯 자, 아홉 자, 열두 자 이런 식으로 방의 어느 한 면의 크기가 정해진다.

그래서 방의 폭이 미터 단위로 규정되기보다 3600 X 3900이거나 3200, 2700, 2400 이런 식으로 자의 단위가 아직도 지켜지는 것이다. 외국의 아파트와는 평면의 치수가 다른 것이다. 요즘에는 외국처럼 시스템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파트는 아직도 그 치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 내부공간의 평면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예컨대 아파트를 팔아야 하는 건설회사들의 입장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신상품의 개발이 필요 했을 것이고 그런 요구에 의하여 아파트 평면에서 변화를 준 것이 베란다였다.

70년대의 아파트는 규모 면에서도 연립주택의 수준이었지만 베란다가 따로 없는 것이 많았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 고층아파트가 생겨나면서 베란다가 생겼고(아마 고층에서 내려다 볼 때 생기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완충효과 때문일 이유가 조망을 위한 툇마루의 기능의 요구보다는 크다고 생각하지만……)80년대에는 베란다의 폭이 1200㎜정도에서 90년대의 1500㎜정도로 다시 10년 후 1800㎜까지였다가 이제는 2000㎜정도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최근 지은 아파트에 가보면 베란다의 크기가 평균 2000㎜정도라서 마치 작은 마당을 보는듯하다.

그리고 그 면적을 거실이나 방으로 확장하다 보니 그 비용만 수천만 원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아파트의 구조변경이 주택업계에서는 신상품의 개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상품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건축기술로서 구조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신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기술을 적용하게 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이 변경되었으며 입주 후 부가되는 구조변경 덕에 파생된 직업들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니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조변경이나 형태의 변경을 위한 신상품개발이 지금 막혀있는 것 같다. 최근 신도시의 주상복합건물 형태의 아파트가 마치 신상품인 것처럼 광고하지만 20년전에 마포구의 시장 재건축을 할 때 그런 구조가 계획되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 순환은 맞더라도 신상품은 아니다. 신상품개발을 막고 있는 것이 경기침체로 인한 거래부진이든 법규나 제도의 규정 때문에 한계에 부딪혔든 혁신적인 상품을 적용하기에는 기술이 못 미치든 평면에서 변화를 가져올 주기(그 동안의 변화를 볼 때 대략 10년 주기)가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아파트의 평면적 신상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상품의 혁신을 불러오기도 한다는데 있어서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만큼은 맞는 것 같은데 여러 부정적 요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활로를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Joseph Schumpeter는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에는 혁신과정, 사실상 신상품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자본주의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고 말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기업조차 단지 비용최소화를 통해서만은 살아남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중략…06. 소비주의의 철창’ 128p

이런 말을 들으면 계속 뭔가가 변화되어야 하며 재벌들이 광고나 언론을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동안의 아파트는 주거공간의 역할만이 아닌 어떤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택, 산동네의 양철지붕 집부터 신 상품이 나오기 전까지의 아파트에 사는 모두가 새집으로 새집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던가? ‘실 수요자라고 밝히는 대부분의 수요자도 사실은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감추기 위한 변명으로서의 상징으로 그 단어를 쓸 뿐이다. 그러니 돈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신 상품아파트를 갖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이 돈을 쓰기 위한 신상품개발이 막혀있으니 Trickle Down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경제성장면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상품 개발을 통한 소비 촉진은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지금의 부정적 요인들은 그런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한계란 내 생각에는 의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한계가 아닐까? 또는 투전 판과 같은 부동산시장에서 거래를 하기 위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수요가 전체 거래량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서 아닐까? 요컨대 비싼 물건을 공급하기 위한 원재료인 토지 값의 상승이 일부의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나머지 분량을 소비하기 위해서인 대상에게는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신상품은 이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물론 신상품은 무엇보다 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정보를 드러낸다.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 1세기전에 이미 지적했듯이 이목을 끄는 소비는 신상품 구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최신제품과 패션 대부분은 처음에는 부자들만 접근할 수 있다. 신제품이 비싼 까닭은 그것들이 소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기꺼이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 신제품은 특별한 가격으로 시장에 출시되기도 한다. 일부 사람들의 과시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에는 모방이 뒤따른다. …중략소비상품은 항상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해왔다. 그것은 과거에도 자주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과정과 이토록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06 소비주의의 철창’ 132P”

하지만 주택이 소비제품인가?

보유량이 한정된 나라에서 재활용하기 어려운 주택단지로만 토지를 개발하는 것은 토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닐까?

그런데 자꾸만 물건을 만들어 내고자 단지 지정을 해대면 공급량에 맞춰 구매자도 늘어나거나 인구가 증가해야 하는데

그런 점은 정책입안자들의 욕구에 따라주지 못하는 불가항력 아닌가?

그러다 보니 인구 유입을 위하여 신 모델의 주택을 공급하려 하고,

인구비율과는 상관없이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기반시설을 늘리고,

기반시설의 유지관리비를 확충하기 위한 세수의 마련을 위해 토지제한을 풀어 주택단지용 토지를 또 공급하고,

다행히 늘어난 인구의 교통편의를 위하여 다시 기반시설을 늘리고,

또 다시 모자라는 세수를 위해 해제할 토지가 모자라면 외부의 자본을 차입하고,

그런 현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주민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번쩍이는 불빛으로 둘러싸인 위락시설을 짓기 시작한다.” (도심 확장)

 

끊임없는 신상품추구는 오랜 세월 각인되어온 공동의 노력이 지닌 가치를 파괴한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회제도는 성장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버렸다. 요컨대 사회를 희생시켜 개인주의를 강화하고, 전통을 희생시켜 혁신을 자극하는 소비문화적 흐름은 인류에게 의미 있는 것들에 대한 왜곡을 불러온다.” <성장 없는 번영 12 번영의 지속 259P>

 

다만 아파트의 평면이 남향위주에서 전망위주로 변하는 추세이며 세대의 분리나 독립으로 인한 주거형태가 변하다 보니

방이 나란히 배치되는 호텔 식의 구조나 임대를 위한 분리세대(이것도 신상품은 아니다.)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구조는 세대간의 분리와 소통의 단절을 발생시키기도 하는 점에서 혁신이 전통을 희생시키고 문화를 왜곡시킨다는 지적은 일리 있어 보인다.

 

이제 우리의 아파트는 다른 이유로 침체의 시기를 맞고 있지만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의 경제를 성장시킨 것은 맞다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발의 매력을 잊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과거의 거래를 되살리려 한다는 의미로 신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까 주택관련법은 며칠마다 바뀌어 누더기처럼 되고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분기마다 규제를 들먹이고 완화를 발표한다.

그나마 좁은 면적의 나라에서 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개발할 재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선진국대열에 동참하려는 경쟁에 끼어들어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는 목적을 우선시하여 개발우선정책을 시행하고 환경이나 생태계를 지금처럼 파괴한다면 막상 성장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선진국이라는 집단에 속할 때에는 그런 파괴행위가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이미 겪은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아 환경과 생태계에 대하여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지금 세계는 가용 자원이 줄어들고 있고, 환경의 절대적인 한계와 마주하고 있으며, ‘빈곤의 바다위에 번영의 섬들이 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01 17P 잃어버린 번영 더욱이 앞으로 세계 인구가 90억 명이 되는 시점에 그들 모두가 OECD국가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풍요로움에 도달한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제규모가 2050년까지 지금보다 15배이상(1950년의 75)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금세기 말에 가서는 현재의 경제규모보다 40배이상(1950년의 200배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체 그러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단 말인가? 진정 그것이 지속 가능한 공동의 번영을 이루는데 신뢰할 만한 전망을 제공하는가?”  01 30P 잃어버린 번영

 

사람들이 잘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어느 형태가 잘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모두 같은 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현실 속의 사람들은 잘 사는 것에 대하여는 한가지의 형태로 모방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도킨시안 Dawkinsian들의 주장대로 모방이 인간 유전자에 자리 잡힌 진화의 근거라고 해도 부의 과시를 위한 소비의 집착은 상징의 의미(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상품이 제공하는 상징언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상품이 제공하는 상징언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물건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 예컨대 가족, 친구관계, 소속감, 공동체, 정체성, 사회적 지위,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까지 소통한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사회적 소통이 우리가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매게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번영이 상징언어를 통한 소통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04. 성장의 딜레마 75P)를 벗어나 인간이란 파괴를 위한 악마의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주장에 할말이 없게 만든다.

공허한 자아의 불안이 확장된 자아로 나아가도록 자극한다.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갈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비교를 하게 만든다. 시장 경쟁에서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창조적 파괴를 부추긴다. 살기 아니면 죽기, 바로 정글의 법칙이다. 이것은 소비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지점에서 본성과 사회구조가 서로 결합하여 우리를 소비주의의 철창 속에 단단히 가둬버린다.

06. 소비주의의 철창’ 135P

나는 아무리 이 업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이처럼 끝을 모르고 오르려고 하는 본능을 가진 괴물은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포커 판이나 노름판에 가보면 돈이 있는 사람이 최후에 남게 되어있는데 마찬가지로 돈 가진 사람들의 배팅에 놀아나다가 결국에는 꽁지 돈도 못 쓰는 신세로 내몰릴 가능성이 백 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택의 가격이 평당 5천만원가까이 오르게 되면 그것을 살 사람은 누가 될까? (부동산 상념1. 지공주의)

그러므로 지금 이런 시기에 자연스레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부동산 경기의 활성화라고 하기 보다는 주거나 주택 또는 부동산 전체에 대한 개념의 의식변화라고 하고 싶다. 누구나 잘사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지만 누구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만 빈부의 폭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희망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정말로 사는 것에 만족하려면 노동시간의 절감도 필요할 것이고 노동의 분배도 필요할 것이며(하루 24시간중에서 8시간을 자고 16시간동안 일을 하면 많이 살수는 있겠지만 산다고는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노력은 실업의 감소효과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일은 지금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직업상의 범주에 한하여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개발사업은 확장의 형태에서 환원의 상태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높게 더 넓게 가 아니고 더 자연적이게 더 생태적이 게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개발이 아니라 없애는 것, 창조를 위한 파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회귀를 위한 파괴도 개발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결정적으로 믿음직스러운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 달려있다. 이 대안은 덜 물질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회 차원에서 이것은 물질적, 재정적, 심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재투자를 뜻한다. 특히 공공재 개념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공공장소, 공공기관, 공동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되살려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목표와 자산, 사회기반시설에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그다지 실속 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녹지 공간, 공원, 여가활용시설, 운동시설, 도서관, 박물관, 대중교통, 지역시장, 명상센터, 축제 등은 새로운 사회참여의 기대와 가능성을 높이는 구성요소들이다.” 12 번영의 지속 246P

 

경제와 수학은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을 만큼 무지한데 자본주의의 종류나 역사 미래경제니 거시경제니 하는 말은 알지 못한다.

책을 봐도 1분만 지나면 앞에 읽은 것은 잊어먹을 정도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한 성장의 한계라는 책을 먼저 읽고 느낀 점을 <도심 확장>이라는 글로 이미 나타냈던 것처럼 경제는 모르더라도 지금처럼 경제 성장, 서민경제 회생 등의 말로 정치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은 내게는 시민을 데마고기 Demagogy 하려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누구나 올바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떠올리는 말들은 이 책의 저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실현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때 주저할 뿐이지……

 

소유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현인들의 지혜이기도 한데 이는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부가 어디에 있는지 갈수록 알아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풍요의 미궁에 갇혀 주문이 풀리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화려함 속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분간하지 못한 채 우리는 길을 잃고 말았다.  12 번영의 지속 242P

우리가 결코 회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 우리는 생태 한계를 무시 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사회라는 세계를 찬조하고 또 재창조할 수 있다. 사회구조와 제도들이 규범과 전망을 빚어내고, 반대로 그 규범과 전망이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 번영의 지속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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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에 반대한다 - 인간, 생태, 지구를 생각하는 세계 지성 55인의 반성과 통찰
존 저잔 지음, 정승현.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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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정치적 음모설에 빠져있거나 빈부격차나 제3세계의 인권문제에 할말이 있거나 또는 밀양송전탑이나 원자력 발전소, 사대강의 보나 댐, 이런 것들이 환경을 해친다는 이유로 촛불을 들거나 행진에 나서거나 댓 글을 단다거나 토론에 참여한다거나 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일에 평생을 바쳐 일하거나 작은 범위의 적극성이라도 보이는 삶들은 존중 받을만하다고 생각된다. 사회는 언젠가부터 그런 사람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생각으로만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도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야 핏대를 세울 수 있는 소시민이지만 이 책의 각 주제에 대하여 자기 주장을 편 사람들은 그런 환경문제나 사회의 불평등문제, 국가간이 불균등 문제 등에 한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그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이 문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은 그런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 인간이 문명의 발아래 종속되는가 아닌가를 논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문명이란 것이 이기(利器)라고만 배워온 나에게는 이들의 주장에서 새로운 느낌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문명자체를 없애자는 극단주의자로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 이규태 주간(主幹)우리의 집 이야기에서 그렸던 풍경 정도의 문명. 그런 정도에서 멈추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크다. 그는 책에서 과거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 Strauss 1970년대에 내한하여 우리네 시골풍경을 보았을 때 자기네 문명과는 다르게 우리의 집에 굴뚝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기(前記)한대로 종선, 횡선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글에서 저자는 우리의 예전 풍경을 낮은 처마에 가려져 있는, 그것도 집의 북쪽에 소담하게 자리잡은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 오르면 그 연기마저도 하늘로 곧장 오르지 않고 집의 처마를 감싸고 지상으로 은은히 퍼져나가게 했다는 지상지향적 굴뚝문화로 말하고 있다. 그 풍경은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에 나오는 풍경 같기도 하다. 요즘 우리 주변에도 도심을 떠나 귀농이라던가 귀향을 하여 문명의 제도를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디어에 소개되고는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비록 피켓을 들거나 촛불을 들고, 또는 과감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폭탄을 들고 댐을 폭파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위로 더 위로, 크게 더 크게를 외치는 문명에 길들여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는 일탈로 비쳐지지 않고, 미래의 문명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에 제동을 걸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선구자로 비쳐지길 바란다.

 

 

 슬픈 일이지만, 무능하거나 주저하며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예컨대,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운동가들 역시 모두가 알고 있는 무분별함을 드러낸다. …… 이런 무분별함은 용기 부족이 아니라 잘못된 도덕관념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칼 괴르델러 Karl Goerdeler (히틀러 정부시절 물가통제위원으로 반 히틀러 운동을 주도했다. 히틀러 암살계획에도 가담하지만 실패하고 19455월 처형당했다.)는 품격 있는 새 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헌신했지만 히틀러의 암살에는 완고히 반대했다. 둘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만 히틀러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무분별함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희망과 거짓 희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

문명에 반대한다. `와이즈북 2009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 데릭 젠슨(미국 환경운동가 겸 무정부-원시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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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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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자유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 또는 상대적 소수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

마찬가지 원리로 민주주의는 대중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종하는 법을 아는 소수 엘리트에 의해 운영된다.”

 

요즘 C.I 광고들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감성적인 시나 에세이를 읽어주는 듯하다.

광고는 광고일 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잘 알려진 팝콘과 콜라 속에 숨겨진 잠재의식 광고에 대한 광고의 세뇌효과 이야기가 있다.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기가 막힌 광고기법들이라며 음모론에 가까운 광고형태의 예를 들고 있다. 팝콘과 콜라이야기는 그 실험의 당사자가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고도 하지만 그 실험의 사실여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근대에 들어서 잠재력 Potential효과 또는 잠재의식, 무의식의 존재여부는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근거 없는 이야기라거나 카드 점이나 미신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지는 않고 있다.

당시의 실험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콜라의 매출이 팝콘의 매출보다 적었지만 20% ~ 50% 정도의

매출이 올랐다고 한다는 점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도중에 절반 정도의 인원이 들락거리며 음식을 사다 먹는 행위가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연스런 행동으로서 받아들여지는 문화패턴이어야 가능했었을 실험이었을 텐데 영화관람자에게는 비밀이었을 테니까 - 그런 상황이 허락되는 관람문화라면 누구에게도 당연하다 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닐까?

그러나 비단 영화관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런 광고가 미디어에 감추어져 있다는 이야기는 더러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런 의미로의 잠재의식을 노리는 광고의 목적이 뇌의 기능이 자율적이며 자의적인 의지의 실행만이 아니라 자극에 속기도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의도한 것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잠재의식 효과subliminal effect는 어떤 의미에서든 작용하는 것이 맞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광고가 에세이나 시와 같은 이미지에서 주는 효과를 기대한대로 일부 시민의 잠재의식 속에 녹아 든다면 광고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는 현실이 기업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출되게 될 때 그 동안의 광고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대중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소유여부 또는 성공한 기득권자의 의도에 순종하려는 심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논리가 맞는다면 그런 광고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 기업의 본질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시민이 알 수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시적 문장이나 에세이와 같은 화면을 제공한다고 해서 현실의 부조리도 부정직함도 잊어버리고 긍정적 마인드만 키워야 하는 것일까?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고 否定을 하기 위한 부정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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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한계 - 30주년 기념 개정판
도넬라 H. 메도즈.데니스 L.메도즈.요르겐 랜더스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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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약적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가 끊임없이 벌어지게 만드는 그 구조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구조가 작용한다고 본다. 첫 번째 구조는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것을 갖도록 자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만은 사회제도들 많은 문화권에서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특정 문화권에만 있는 것도 있다. – 과 관련이 있다. 드러내놓고 또는 은밀하게 자행되는 인종 차별에서 부자들의 탈세를 조장하는 허술한 세제,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영양 결핍과 부자 나라 아이들의 고급 교육, 심지어 민주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일어나는 정치적 흥정을 위한 뇌물 수수, 그리고 은행의 이자 지불이 사실은 가난한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시스템 역학에서는 이러한 구조를 성공이 성공을 부르는Success to the Successful 순환고리라고 부른다, dl 순환고리는 성공한 것이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가도록 여러 가지 수단들을 제공하는 양의 순환고리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공정한 시합을 할 수 있는 평등한 규칙을 만들지 않는 사회라면 어디서든 나타난다.” 성장의 한계2장 한계초과의 원인: 기하급수적 성장 갈라파고스 간() Donella H. Meadows

 

우리네 개발계획은 어느 곳에 신도시나 무슨 무슨 단지가 들어선다는 계획이 발표되면 어김없이 전철연장계획이 발표되거나 선거철의 공약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내 생각에 전철은 어느 곳이나 필요하긴 하지만(버스는 수도권의 주민들이 이용하기에 서서 가든 앉아서 가든 승차감에 있어서 피로를 가져온다. 그것도 많이……) 그 지역의 모두에게 이익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철계획의 발표는 교통의 필요성만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침체된 부동산의 가격상승을 위한 재료라고 보는 이유가 더 크다고 본다. 개발 호재도 없고 인구의 유입도 정지된 상태의 수도권은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부동산 가격은 신 상품이 들어서면서 자연히 하락하거나 물가상승률 정도의 상승폭만 유지해갈 뿐이다.

그 시기가 되면 주민들의 욕구와 정치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개발계획을 만들어 발표하면 그 효과로 인하여 집값이 들썩거린다. 그 기간은 대략 10년정도 걸리는 것 같은데 그 때가 되어 이미 10년이 넘은 주택에 사는 주민들은 개발의 효과를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냥 주변에 먼지 나는 공사장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시스템에서도 득을 보는 부류는 한정되어있을 뿐이다.

그런데 전철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유입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역의 발달은 지역주민의 도심으로의 전출을 도와주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게 발달된 전철은 도시 집중과 학장만을 일으키며 전력에너지를 잡아먹는 괴물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은 초가을 출근 기차에 에어컨을 틀어대서 춥기까지 한데 그 전철은 전기료 안내는 자가발전 전차인가? 자동차의 에어컨은 전기료 안내지만 기름값으로 대체되어 지불된다. 지난 여름의 전력난에 전국의 도심지하를 돌아다니는 전철의 영향은 얼마나 될까?

프랑스는 수도권에 살수록 이득이 주어진다고 들은 것 같은데 우리는 여러모로 손해다.

그냥 부()순환고리를 이어주는 상황만 지속되는 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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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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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폭이 약 4M정도 되는 좁은 길로 차 한대가 지나가면 길옆으로 비켜주던가 아주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 길 옆에는 공장이 하나 있는데 전형적인 가건물 스타일로 프리페브로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몇 년 동안 다니면서 지붕까지 신경 쓰면서 다녀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 오는 길에 멀리서 그 공장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공장이 있는 쪽에 콘크리트펌프 차가 붐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길 저 좁은 골목에 콘크리트펌프 차가 있으면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다시 한번 그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콘크리트펌프 차의 붐은 보이지 않고 공장의 지붕 용마루가 보였다. 순간 나는 내가 착시현상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지붕의 용마루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 콘크리트펌프 차의 붐과 비슷한 색이었고 붐을 비스듬히 펼쳐 꺾은 모습과 비슷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 콘크리트펌프 차의 붐을 보았었고 잠시 고민했던 터여서 순간 그런 현상에 놀랐었다. 그것은 내게는 처음 있었던 착시현상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착시는 무의식의 작용이지만 언젠가의 나의 경험과 판단에 의하여 저장되었던 기억의 왜곡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내게 착시현상의 동기라면 그 좁은 길을 다니면서 그런 길에 공사차량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나하고 언젠가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고, 고민의 이유는 그 길에서 가끔 레미콘 차량이나 대형화물차를 만나는 바람에 자전거에서 내려 비켜서있곤 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중간에 내려 서있는 것은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착시현상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도 어쩌면 심리적 충격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스스로 방어기제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착시현상뿐 아니라 언제부터인가는 꿈을 꾸면서 꿈을 개조하기도 한다. 또는 꿈을 꾸면서 내가 지금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을 자각몽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이와 반대인 현상으로 꿈을 꾸고 있지만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깨어 있는 상태인 것으로 인식하는 거짓각성이라는 증상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 꿈을 꾸는 중에 내가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깨어나는 적이 많다.

 

우리는 눈으로 보자 않는다. 뇌로 본다. 뇌에는 눈에서 눈으로 들어오는 입력정보를 분석하는 여러 장치들이 수십 개나 있다. 뇌의 뒤 쪽에, 후두엽에 위치한 1차 시각피질에서는 망막의 점을 피질 위에 일대일로 옮기는 매핑작업이 이루어진다. 시야에 들어온 빛, 형태, 방향, 위치가 표시되는 곳도 이곳이다. 눈에서 들어온 영상자극은 일종의 우회로를 거쳐 대뇌피질로 가는데, 이 때 일부는 뇌의 반대편으로 건너간다. 그래서 각 눈의 시야의 왼쪽 절반은 우뇌의 후두피질로, 오른쪽 절반은 좌뇌의 후두피질로 간다. 따라서 한쪽 후두엽에 손상이 오면(예를 들어 뇌졸중으로), 시야는 반대쪽 절반이 사라지거나 결함이 생긴다. 이를 반맹이라 한다.

<9장 반쪽 시야를 차지한 환각/209P>

 

착시를 깨어있는 상태에서 뇌가 착각을 하는 것이라면 잠을 자는 상태에서 뇌가 하는 작용을 꿈이라고 할 텐데 인간은 언제부터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수 만년 전 혹은 어느 때부터 인류의 뇌가 발달하기 시작했던 즈음일까? 아니면 현생인류와 비슷한 뇌의 용량이 자리잡은 그 때부터 일까? 혹은 뇌의 역할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꿈을 꾸어온 것일까? 그렇게 어느 시기부터이든 간에 꿈을 기억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특별한 무엇을 보았는데 잠에서 깬 후에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것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당연히 뇌의 작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착시현상과 꿈을 엮어서 이야기를 꾸며내는 능력이 생긴 어떤 사람이 동료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의 일부분이나 한 현상이 상징적으로 나타났거나 전위될 수 있는 상황이 생겼다면? 그가 특히 뇌의 측두엽에 이상이 생겨서 환각을 보는 능력까지 생겼다면? 그는 아마도 인류최초의 주술사나 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보는 또는 겪는 환각이나 착시 또는 자각몽 등의 능력에 따라 의료 혹은 환경, 역술 등의 방향으로 나누어 졌을 것이며 그 능력은 무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나 자연으로부터 보호 혹은 예측 등이 필요한 농경생활에서는 버리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부터 무리의 우두머리와 공존하는 능력을 키웠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원시생활 영화에서 보는 추장과 무당처럼 말이다.

인류의 뇌의 역할과 현상이 뇌 과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지는 이제 50년정도 지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거 종교로 발달한 환각이나 환상 착시 등의 현상과 그런 것을 정치에 이용할 줄 알았던 우두머리와의 역사가 이해될 만도 하지 않을까 한다.

 

때때로 무아경 환각은 아주 드물긴 하지만 위험할 수 있다. 데빈스키와 그의 동료인 조지 라이는 그들의 환자가 발작으로 인해 얼마나 위험한 환각을 겪었는지 묘사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자신에게 아내를 죽이고 자살하라고 명령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계속 그 환각에 따라 행동했고, 결국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칼로 찔렀다. 이 환자는 우뇌 측두엽에서 발작 초점을 제거한 후 더 이상 발작을 겪지 않았다. …… 윌리엄 제임스가 주시한 것처럼 한 사람의 강렬하고 정열적인 종교적 확신은 수 천명을 뒤흔들 수 있다.” <이 책: 8신성한질환 202P>

 

그렇게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환각을 보는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런 환각이 정말 환각인지 아니면 부풀려진 환각인지 또는 특별히 이름 붙여진 사람이 특별한 언어능력과 문장능력으로 지어진 환각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저 신비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다 19세기말 ~ 20세기초,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발표하자 사람들은 무의식의 발견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발견으로 여기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태양계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별로, 다윈은 인간을 신이 만든 것이 아닌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 동일한 진화를 거친 포유류로, 프로이트는꿈의 해석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지배하에 있음을 밝혔다는 이유였다. 그 세 가지 발견은 모두 인간이란 우주의 역사에서 한 점에 불과한 시간의 산물임을 알도록 하여 겸손함을 가져다 준 사건이라는 뜻 같다.

그 시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의 가능성과 역할이 신비로움과 함께 서서히 드러나자 일부에서는 심령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초자연현상에 대한 연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염력이나 ESP extra sensory perception같은 현상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심령과학, 초심리학이라고 이름 붙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사람들의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기담의 하나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담으로만 여기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들이 보여지기도 하는데 이런 초상현상에 대하여 현재, 초심리학의 연구가 가장 성행하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인데 심리학자나 의학자만이 아니라 물리학자 등도 참가한 학제적 연구가 성행한다. 러시아에서는 국비를 투자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종교가 아니라 유물론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우주공간에서의 텔레파시실험이나 잠수함을 이용한 실험도 하고 있다. 미국, 러시아에 이어서 연구가 성행한 곳은 인도와 유럽 여러 나라로, 인도에서는 종교의 연구와 관련시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종교적인 현상에 가까운 이유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종교적인 현상으로서의 환각증상은 흔히 영매나 무당 또는 주술사들이 보는 특별한 현상으로 여기지만 이 또한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약물(치료를 위해 먹든 기분 전환용으로 먹든)뿐 아니라 수많은 의학적, 신경학적 질환도 일시적인 기질성정신병을 낳을 수 있다. <10장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 244P>

유체이탈체험은 발작이나 편두통을 겪는 과정에서 뇌의 특정한 영역이 자극을 받으면 발생할 뿐 아니라, 피질에 전기 자극을 가해도 발생한다. 또한 약물 경험으로나 스스로 유발한 황홀경 상태에서도 발생한다. 유체이탈 체험은 심장마비나 부정맥, 다량의 출혈이나 쇼크로 뇌에 충분한 혈액이 공급되지 않을 때에도 발생할 수 있다. <14장 도플갱어 나를 보는 환자 314P>

사람들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문제들.

그 속에는 인간 스스로에 관한 질문들이 아직도 수 없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중에는 인간의 뇌 속에 연결을 이루고 있는 뉴런과 시냅시스의 역할도 있다.

뇌 과학이 학문으로서 증명되고 지금의 모든 과학의 결과물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각자의 시각으로 개인의 경험에 의한 관점으로 그 결과물을 이해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인간들이 행했던 그 과정을 모양과 의식을 바꾼 채 앞으로 수천 간을 또다시 이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대상을 지성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적으로 감지되는 유사 감각적 실재의 형태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동물적 감각은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진화했을 테지만, 종교적인 열정과 확신에 대한 생물학적 기초로서 인간의 고결하고 초월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타자’, ‘존재는 신의 현현이 된다. <15장 환상, 환영, 감각 유령 3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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