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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9월
평점 :
2004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앞두고 부시 측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은
대통령이 따라야 하는 전략을 “낙관 요소와 공포 요소의 적절한 결합”들로 묘사한 바 있다.
131P 4장 테러의 신세계
아침이면 알람 시간에 맞춰 놓은 TV가 켜지면서 뉴스 아나운서가 어제 저녁 뉴스시간에 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잠에서 깬다. 그 것은 지난 밤에는 세상이 주목할만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늘 그렇고 그런 날이 지속된다는 것도 알려주는 셈이다.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 가끔은 이런 뉴스가 들리면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경상수지 사상 최고기록”
네, 한국은행은 지난달 경상수지가 95억 천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벌써 21개월째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배 정도인데요.
한국은행은 올해 630억 달러의 흑자를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철에서 보게 되는 스마트 폰 속의 포탈사이트 뉴스헤드라인에는 기업이 1000원어치 팔아서 47원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면 사상 최고의 경상수지 흑자라는 것은 어디에서 근거한,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뉴스였을까? 통계의 마술에 현혹된다.
그런데 이 뉴스에서 ‘사상최고’라는 수식어에 놀라야 하는 것인지, 숫자가 말해주는 단위에 놀라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단위로 보여주는 통계상의 경기와, 현실에서 부딪히는 체감경기와의 간극. 그런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그런 뉴스에 -<장사를 해서 수입이 늘었으면 뭔가 나아지는 것이 있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 생활에 변화가 없음은, 이를 테면 분수탑의 상륜부에 있는 수반에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만 물의 공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탑의 기단부에 있는 수반에는 물이 마른 채로 있는, 그런 셈인가?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그런 불균형을 안타까워하기에 자신들의 범법행위를 숨겨가면서까지 입법의 장에서 날마다 ‘서민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로 자랑하는 경제성장이 상륜부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렇게 대놓고 자랑할 수 없는 수익일 텐데 왜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뉴스!
비판의식과 감시기능이 사라진 뉴스!
그것은 뉴스라기 보다는 그저 얼굴에 희극적 분장을 한 웃기는 개그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 수준이다.
살기 힘든 세상에 서로 싸우는 모습 보여주는 것이 뭐 좋은 일이고 그런 뉴스보다는 밝고 희망찬 미래 어쩌고 하는 소식을 보여주는 것이 정서상 좋지 않겠는가 라고 한다면 뉴스대신에 잘 먹고 잘 노는 모습만 보여주는 ‘먹방‘이나 홈쇼핑, 여행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것만 보여주려는 지상 파 방송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상 파 방송이나 케이블 반송의 뉴스나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뉴스에 대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동일한 결과를 보여주는 여론조사의 결과도 있었다.
“공영방송 뉴스, ‘신뢰도·공정성’ 기둥 와르르”
뉴스의 역할이나 지향성 같은 학술적 정의 같은 것은 배운 적 없어 아는 바 없지만 시청자나 구독자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뉴스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던, 과거의 망령을 보던 그것은 청자의 입장에서 정리할 나름이라고 생각하며, 뉴스 공급자의 입장에서 사회의 변혁과 정의의 구현, 뭐 이런 윤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회의 제도나 구성을 계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끔 왜 우리나라의 방송화면에서 미국의 뒷골목에서 일어나 총기사고나 교통사고 뉴스를 봐야 하는지 그런 소식이 언론의 사명감과 관련이 있는지 이해 안 될 때가 있는 정도이다. 교민이 많이 사는 곳이니 그들의 가족에 대한 배려라면 같은 가치를 지닌 소식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국내에도 많을 텐데 하는 의구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스포츠에서 누군가가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하였다던지 우리의 제품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던 지 하는 뉴스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빠르게, 그리고 널리 알려 자랑스러운 마음, 자긍심을 갖도록 하려는 것은 그들의 임무일 것이라는 생각 정도?!
그런 면에서 ‘사상최고’라는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긍지’를 갖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그 것을 왜 지금?
자긍심.
사람들에게는 간혹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세상에 의하여 속지 않고 살아가며 내일이면 꺾여버릴 희망이라도 지니고 있게 하는 것이 자긍심일지도 모르겠다.
‘사상최고’라는 단어가 국제적인 경기침체상황-사실 이 말도 무엇에 비하여, 어느 때와 비교하여 침체라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잘 살고 있다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행정부와 언론사의 취지였다라고 하더라도 과연 무엇에 비교하여 자긍심을 높여주려는 의도일까?
긍지.
그것은 만족감을 느끼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지만 대상, 또는 타자와의 비교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의 균형을 잃은 긍지는 허영심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최고’라는 단어가 분수 탑의 모두에게 적용된다면 ‘긍지’라고 하겠지만 상층부의 수반에게만 해당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허영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허영심은 자만이고 오만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므로 그런 뉴스는 안 하고 안 듣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주요 뉴스시간에 했을까? 그냥 사실을 전한 것뿐이라면 ‘사실’이라는 단어를 적용할만한 뉴스가 그것뿐이었을까? 사실이라고는 ‘교통사고’와 ‘화재소식’뿐이라고 해도 될 만큼 뉴스는 매번 느끼지만 볼 때와는 달리 볼 게 없다고 생각된다. 정치 관련 뉴스는 저 인간들 좀 사라졌으면 하는 짜증만 나게 하고, 경제는 아무리 잘 된다고 하여도 나와는 상관 없는 남의 일 같고 요즘의 국제정세는 50년전으로 돌아간 새로운 냉전시기의 그것처럼 군비경쟁이나 해대는 통에 불안을 부추기고…… 이런 뉴스란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것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저녁 뉴스를 재방송한 것에 지나지 않은 않았음에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아마 그들이 노린 술수가 아니었을까? 뉴스에 둔감하게 되고 사실을 왜곡해서 듣고 사회적, 국제적 현실에 공포감을 느끼게 하여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려는 모종의 계획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들이 벌이는 게임!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평등하고 동일한 수많은 군중의 생활 속에서 싫증이 나도록 겪게 되는 사소한 쾌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각자는 서로 분리되어 생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의 자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는 전체 인류에 해당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보호자격의 거대한 권력이 군림하게 되는데, 이 권력은 이들을 만족스럽게 해주고 또 이들의 운명을 감시해 주려고 나선다. 이 권력은 사람들을 계속 어린아이의 상태에 묶어두려고 한다…….
이와 같이 사회의 각 구성원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하고서는 그들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 후, 그 다음으로 최고의 통치권력은 그 세력을 전체 사회로 확장하게 된다. …… 이런 권력은 생존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방해한다. 그것은 폭정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국민을 억압하고 생기를 잃게 하며, 우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 개개 시민은 한 때의 겁 많고 근면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며 정부는 그 목자가 되는 것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 미국의 민주주의 2권 663
전제정치에 편안함을 느끼는 토크빌 식 민주주의자, 절대주의를 선택하는 홉스 식 자유 합리주의자. 이 둘은 선택적 친화성을 지닌다. 토크빌은 시민들이 참여 정치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탓에 비로서 가능하게 되는 전제 체제를 상상한다. 그는 이것을 미국인의 정치적 삶의 실상을 보여주는 가장 특정적이고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꼽는다. 자신들의 사사로운 목표에 매몰되어 공동체의 문제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그들은, 마치 홉스Hobbs가 말한 계약에 서명한 이들처럼, 시민으로서의 삶보다는 정치에 냉담한 피지배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4장 테러의 신세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