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로 이르는 길은 미래에로 이를 수 있는 한 가지 경로일 뿐이다. 또 다른 경로는 조국에 대한 사랑, 즉 아모르 빠뜨리에(Amor Patriae)의 재탄생이다. 이것은 민족주의나 인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에른스트 칸트로비츠(Ernst Kantrowicz)는,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생각의 역사에 대한 훌륭한 글인『조국을 위하여 목숨을(Pro Patria Mori)』에서, 이 근대 유럽의 개념이 실제로는 흔히 생각하듯 전투를 벌이는 영웅들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의 찬미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개념은 오히려 중세와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당시에는 나라에 대한 사랑이 사실상 어떤 나라의 제도나 심지어는 국가적 동일성에도 묶여 있지 않았다. 칸트로비츠가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념의 표면아래를 파헤칠 때 그가 발견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공화주의적 카리타스(Caritas)또는 공감적인 동료애이다. 이것은 모든 국가들을 초월하는 아모르, 휴머니타티스(Amor Humanitatis), 즉 인류애로 변형된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그리고 – 훨씬 더하게는 –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의 찬미는 이 애국적 정조(情操)의 전통-조직화: 좌쪽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나 인류는 권위와 명령을 거부해왔고, 특이성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표현해왔으며, 무수한 반란들과 혁명들에서 자유를 추구해왔다. 이 자유는 물론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유는 장애들과 한계들을 부단히 극복함으로써만 출현한다. ……… 자유를 향하는 능력 그리고 권위를 거부하는 성향은 가장 건강하고 고귀한 인간의 본능들, 즉 영원의 실재적 기호들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을 말하기보다, 이 다중이 항상 현재 속에서, 영속적인 현재 속에서 활동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첫 번째 다중은 존재론적이며, 우리는 이 다중 없이는 우리의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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