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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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대다수 국민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우리는 기업이 저지른 모든 죄악과 불의, 환경 훼손 행위, 빈곤층 착취를 묵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 자본주의는 공언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 사회에 엉뚱한 비용을 떠 안겼다. 시장 자본주의는 불평등, 환경 오염, 실업을 낳았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용인되고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가치의 타락을 낳았다.
……
정치 시스템이 상위계층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정치 권력의 불균형 심화로 이어지고 정치와 경제의 사악한 결합을 낳는다. 정치 시스템과 경제 시스템은 사회적 요인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사회적 요인(사회적 관습과 제도)에 영향을 미치며, 이런 사회적 요인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서문
-서문쪽

상위계층에게 돈이 돌아간다고 해서 당연히 <고용 창출>과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상위 계층이 차지한 돈의 일부는 정치를 왜곡시키는 활동에 투입된다.
상위계층에 집중된 부는 대부분 지대 추구Rent- Seeking와 관련되어있다. 지대 추구는 대체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지대 추구 행위자들이 지대 추구를 통해서 차지하는 것보다 많은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간다. 이런 사정은 금융부문에서 지대 추구 행위자들이 야기했던 파괴적인 결과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보급판 서문
-서문쪽

그러나 금융시장은 세계화를 적극 추진해 오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효율성 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이 실제로 노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것, 이를테면 자신들이 노동자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하는 일련의 규칙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권리 및 임금과 관련해서 강력한 요구를 할 경우에는 자본이 철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한다. /3장 시장과 불평등-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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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 - 마음과 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데이비드 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최재천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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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생존이나 번식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활동을 왜 그렇게도 많이 할까?

사람들은 왜 미술과 문학, 음악, 스포츠 행사를 직접 하거나 소비하느라 몇 시간, 몇 달 혹은 몇 년을 쏟아 부을까?

 David Buss 진화문화심리학

 

어제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빅뱅이라고 불리는 그 순간의 수수께끼가 최초의 순간으로부터 137.5억년(2010 3월 천체물리학 저널에서 미국과 독일 과학자들이 허블 망원경으로 수집한 자료와 우주배경복사탐사 위성(WMAP) 자료를 종합해 우주 나이를 137 5천만년으로 확인, 발표했다.)이나 지난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일 같다. 하지만 과학은 단순한 믿음과 달라 증명이 가능했던 만큼 신뢰를 가져도 좋을듯하다. 다만 그 흔적이라는 것의 결과는 한참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니 만큼 지금 와서 달라질 것은 없을듯하다. 그저 우주라는 것이 누구에 의하여 6일만에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에 의하여 탄생한 카오스와 같은 것인지를 밝혀내는, 어찌 보면 서양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과학적 근간을 다진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던 간에 의문은 남는다. 시간과 공간. 그것의 처음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존재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 그 자체일까?

어느 나라의 신화이건 거의 대부분 우주의 처음은 혼돈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혼돈의 시작은 언제 어디서일까? 그리고 그 혼돈의 존재는 무엇에 의한 것이며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시간이 혼돈과 함께 창조된 것이라면 공간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기 위해 어딘가에 존재하였다면 그 어딘가는 무엇인가? 그렇게 어딘가가 있었다면 그 때로부터 시간의 존재는 흐르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문제가 어떤 존재를 가상하여 동시에 또는 일순간의 차이로 앞뒤를 정하는 것은 끝없는 존재의 의문을 만들어 낸다.

이런 질문은 끝이 없는 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일부의 의견으로 그냥 존재했던 것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의미로서 창조에 관한 그런 가정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존재의 개념을 위한 것일 뿐임에 다름없다고 보여진다. 그에 반해 빅뱅이라는 의견은 빅뱅이전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므로(구스 Alan Harvey Guth에 따르면 대폭발 이전의 우주는 에너지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거품 같은 형태의 에너지가 대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구스의 이론은 현재의 불 균일한 우주의 모습을 잘 설명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보다 더 시공(時空)에 대한 설명을 도와준다고 보게 된다. 어쨌든 그 어느 곳에서 137.5억년전에 어떤 존재가 스스로의 열정으로 폭발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지금의 우리와 주변의 모습이지만 아직 끝은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과거와 미래를 나누고 현재라는 구분을 하여 하루하루를 쪼개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매 시간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으려 해도 결국에는 아마 빅뱅 이전의 존재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과 모든 존재의 순환에 대한 본말시종(本末始終)이 아닐까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나는 스물이 채 되기 전에서부터 그 순환과정에 있는 나라는 것의 가치와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왔다. 그러다 최근에 생각의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나름대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저런 모든 의문과 결론을 내리게 하는 마음이 삶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주원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왜 생겨나며 그것을 따라야 하거나 결과를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조차도 마음이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과연 오롯이 나의 것인가? 여기서부터 끝없는 화두가 뒤를 이어나간다. 마치 에셔 Escher의 그림처럼 말이다.

세월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나이에 걸맞게 스스로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생각을 정리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기에 더 화두를 이어가야만 한다. 다만 세상을 살면서 처음 고민했을 때 가졌던 죽음의 그 순간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싶다는 의지는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 이유는 그 때는 그런 의지가 남아있어야 죽음을, 타나토스의 경계를 넘는 순간에 무엇을 맞이할까라는 의문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마저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나무를 많이 생각한다. 마치 죽은 듯 말라비틀어져 지표면에 흔적도 남기지 않았던 나리꽃이 계절이 바뀌면서 어느새 연 초록의 잎이 딱딱한 흙을 뚫고 나오고 있다. 들이나 산에 피는 나리는 아직 두어 달이나 지나야 볼 수 있건만 베란다의 나리꽃 화분에서는 벌써 잎을 틔우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들도 세상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137억년이라는 시간을 견디어 온 것 아닐까 한다.

 

얼마 전의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지구의 순환주기가 1만년 전쯤을 시작으로 해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공안의 지구의 순화주기를 고려해보면 지금쯤 지구는 빙하기에 접어들어야 하지만 인간들이 한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지구의 환경을 바꾸었고 그 바람에 빙하기의 시기가 늦추어졌다고 본다고 한다. 인간들이 먹고 살기 위해 농업을 하면서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열로 인하여 발생한 가스 등이 지구를 데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1만년. 137억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시간일 텐데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사나 고고학에서 밝히는 사건과는 별개로 인간의 마음은 그 동안 어떻게 변해왔을까?

글을 만들고 복잡하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결과 오늘날 우주의 기원을 밝혔다고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 인간의 본성을 다룬 많은 현자들. 철학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 그들 모두가 공통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공통으로 말했다고 여겨지는 무엇은 있다고 보여지지만 역시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글로 남겼기 때문에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일이다. 모두 자신만의 관점으로, 자신만의 환경과 자극에서 얻어지는 마음, 그 뜻을 이해하고 순환의 고리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같이 모여 사는 수가 적었기에 사용하는 언어나 뜻도 적었을 것이지만 인구가 늘고 사회가 형성되고 서로 교류하는 시간과 접촉이 많아지면서 인간들만의 제도가 생겨났을 것이고, 그 제도는 또 다른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수양버들과도 같이 많은 가치들이 생겨났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제도와 가치 속에서 살면서도 사람들은 모두가 동시에 같은 뭔가에 매달려있지는 않는다. 돌을 쪼개는 사람이 있으면 그 돌을 다듬는 사람이 있고 다듬어진 돌을 주워다 다른 것과 바꾸는 사람이 있듯이 누군가는 그런 일들에 흥미가 없고 그렇게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뭔가를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현재에 하는 일들을 사람들은 문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 것은 지난 만년의 세월 속에서도 불과 몇 백 년이라는 시간 안에 다듬어지고 연마되었으며 물리적 기술과 융합되어 현실과도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들여다 보면 만년 이전의 인간들의 속성인 생식과 번식을 위한 투쟁이 그대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인 듯 하다.

, 내 생각에 시공간에 대한 인식에 동서양이 같다고 여겨지지 않기에 과정과 표현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이 주장은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접근 방법을 택했다. 첫 번째 접근방법은 과시 가설이라 부를 수 있다. 이 가설에 다르면, 문화는 서로 다른 짝짓기 경쟁에서 서로 다른 짝짓기 전략을 추구하는 수많은 개인들 사이의 성 경쟁에서 나타나는 창발 현상(Miller, 1998. P. 118)”이다. 남자는 특히 다양한 여자들에게 구애 과시 행동을 널리 알리는 전략으로 미술과 음악을 만들고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

문화를 설명하는 두 번째 접근방법에서 핑커는 비록 추측에 치우친 것이긴 하지만 이 수수께끼들에 일반적인 답을 제시한다. 핑커는 그 답은 미술과 음악과 문학을 위한 특정 적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형태와 색과 소리와 농담과 이야기와 신화 에서 즐거움을 얻게 하는 다른 목적을 위해 진화한 마음기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잘 익은 과일을 쉽게 찾도록 설계된 컬러 시각 기제는 그러한 패턴을 모방한 그림을 만듦으로써 즐겁게 작동시킬 수 있다. 그림, 사진, 영화, 인터넷 사이트는 생식력이 높은 여자를 알리는 단서에 대한 심리적 선호를 이용하기 위해 그러한 기제가 원래 주의를 집중하고 추구하도록 설계된 패턴을 모방할 수 있다. 우리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도록 인공적으로 약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진화한 심리기제를 자극하기 위해 미술과 음악과 문학작품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그 기제들이 원래 반응하도록 설계된 자극을 모방한 문화적 산물을 발명함으로써 기존의 기제를 인위적으로 작동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활동은 적응이 아니라 비적응적 부산물이다.

핑커는 음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 나는 음악이 우리의 정신 능력 중 최소한 여섯 가지의 민감한 부분을 간질이기 위해 만든 정교한 과자인 치즈케이크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한 정신능력에는 언어, 청각적 장면 분석, 감정적 외침, 서식지 선택, 운동제어, 가 포함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즐겁게 느끼는 음악의 패턴들은 우리의 진화한 기제들이 처리하도록 설계된 자연의 자극을 인위적으로 모방한 것들이다.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희극과 비극을 묘사하는 단어, 줄거리, 이야기는 다양한 진화한 기제들을 촉발함으로써 즐거운 감각을 활성화 시틸 수 있다. "

13장 통합 진화 심리학을 향해   진화문화심리학 미술, 소설, 영화, 음악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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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유발자, 마음 - 수술로도 못 고친 통증을 해결하는 심신의학
존 사노 지음, 승영조.최우석 옮김 / 승산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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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도대체 왜 끊이지 않고 지속되며 그 원인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부분의 통증은 Placebo Effect라고 알려진 위약효과만으로도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통증은 심인성이라고 구분하며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은 구조적 요인으로 원인에 대한 치료가 필요한 통증이라고 한다.

나는 근 10여년을 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통증의 근원이 정말 장애를 동반한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통증인지 아니면 꾀병을 빙자하는 마음에서 유발되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통증을 가진 채 살아가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술 후 처음 몇 년간은 병원 찾아 삼만 리를 해봤지만 아무데서도 뚜렷한 이유와 치료법을 들은 바 없다.

단지 계속 검사만을 요구하거나 진통효과를 주는 주사요법등과 물리치료를 통한 완화요법만을 진통제가 들어있는 약과 함께 처방 받아왔다.

알약이나 물리치료는 근원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척추의 국소부위에 주사를 이용한 약물치료도 효과가 조금 길뿐이지 그 역시 치료는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완화요법이나 위약효과는 이 책에서 말하는 의사들에게는 잘못된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수술이나 물리치료 또는 주사요법 등 모두가 위약효과 이상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핵심을 비켜간 방법으로 치료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에서 주제로 삼는 통증은 감각적 통증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통증. , 가슴 시림, 허함, 아련함 먹먹함 등의 통증은 체성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통증의 유발점은 정말로 마음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통증은 위약효과도 소용없다. 굳이 약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슬프고 내 삶의 이유와도 같은 기쁨의 존재가 사라지는 가슴 시린 통증이 나타났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픔은 사라지고 만다. 물론 가끔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그 때의 그 통증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통증은 제외한다.

 

감각에 의하여 신체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이면서도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은 원인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 외과적인 원인이 제거되었다고 판단됨에도 후유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통증의 일부분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감춰진 원인의 대부분은 프로이트 식의 원인,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자리한 억압과 분노를 이유를 든다. 그것은 유년기 또는 성장기의 발달과정에서 받은 억압의 전이형태로 통증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즉 풀지 못한, 통제하지 못한 마음, 억압되어 화가 가득한 분노를 풀지 못한 마음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언젠가 다쳤던 흔적이 남은 신체 부위가 아픈 편이 낫다고 여기도록 뇌가 마음을 조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의 전략은 통증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통증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통증에 주목하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전이다. 불안하거나, 걱정되거나 화가 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통증은 격노의 지수를 숨긴다. 격노의 저수지가 존재하며, 거기 격노가 고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통증은 필요가 없어진다. 더 이상 주의를 딴 데로 돌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400P

-통증 유발자 마음/가정의의 심신의학 임상경험 마크 소퍼 박사.

 

그래서 억압된 무의식을 노출시켜 화를 해결하면, 분노를 해결하면 통증은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아 있는 것은 있다.

마음! 앙금으로 남은 마음. 세월이 남기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찌꺼기. 억압받았던 마음을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마음.

억압의 동기, 이런 것들의 원인을 찾는 것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통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어쩌면 지금은 수면위로 떠오른 빙산의 일각과 수면아래 잠겨있는 빙산의 나머지의 그 가치가 전도된 듯한 학문적 위치를 가진 프로이트의 심리학, 그 중심이라고 하는 억압된 성()으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방식의 주장은 뇌의 기능과 신체의 기능이 각각의 존재에 의하여 별도로 통제되고 있다는 데카르트 식의 변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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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에게 세상을 묻다 -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일기 외 옮김 / TENDEDERO(뗀데데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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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 그 모두를 만들어내는 아주 찝찝하고 끈적거리는, 마치 달콤한 냄새를 맡은 벌들이 빨대를 꼽으려고 달려드는 송진과 같다.

그 부동산을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d Shaw)는 이렇게 말했다.

 

“‘봉토작고 좋은 자산으로, ‘책임을 지닌 공직자무책임한 무위도식자로 바뀐 것은 농업과 기사도를 기반으로 한 봉건시대가 가고 상업과 경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로지 지주들만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갖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국가의 여윳돈을 전부 차지한다. 이러한 여윳돈을 자본이라고 한다. “땅을 소유한 덕에 먹고 사는지주들은 이제 자본가가 되어 사업가들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듯 이자를 받는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토지에 대한 계급 독점이 이루어지고 나면 반드시 자본에 대한 계급 독점이 뒤따른다.” …….   / 문제는 토지다!

 

 

이런 과정은 인간의 욕망을 한없이 부채질한다. 욕망은 과잉 생산을 낳고 잉여생산물은 부도덕한 욕심꾸러기를 만들어 내고, 투기와 절도 등의 범죄를 발생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제한적인 토지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위치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며 현재가 누릴만한 세상이라고 여기는 자들과 자신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지상지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서로 맞대하고 살아가도록 사회를 양분한다.

 

그래서 늪에 빠진다. 영화 속의 시장, 하원의원, 상원의원, 마피아, 카지노 재벌 등은 늪지에 머무는 악어와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한다. 사기꾼은 그들에게 토기를 몰아다 주는 여우들이고……

 

부동산의 근본인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책략을 가진 정치가가 사태를 안정시키고자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쇼와 마찬가지로 헨리 조지도 그의 책에서 비슷한 논조로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은 더욱 더 지금의 시대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랬다가는 당장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고 본다. 자본을 잔뜩 토지에 묻어둔 사람이거나 그들에게서 낙숫물이라도 받아 먹을 수 있다고 희망하는 사람. 그런데 그런 부류의 존재도 아니면서 빨갱이 운운하는 사람은 그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유흥비를 마련하고자 하는 하루살이랑 다를 바 없다. 버나드 쇼나 헨리 조지 두 사람 모두 100년에 가까운 과거에 그런 소리를 했고 지금의 상황과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이 예견한 내용은 지금 상황에서 전혀 틀렸다라고 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이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요인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중략- 물질적인 진보는 인간의 토지에 대한 의존관계를 없애지 않으면 오히려 토지로부터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극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고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소유자의 힘을 강하게 해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며 권력의 원천이다.” (14장 부의 증대 속에 존재하는 빈곤)

 

 

DTI, LTV를 완화해서 청년층이 3억이 넘는 집을 대출을 받아서라도 사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주거환경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지, 그들의 이자지출을 무시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그게 아니면 누구나 다 그 정도의 돈은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증여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돈이 그만큼 없으면 전세주택, 임대주택, 행복주택에 입주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알량한 입주물량을 모르고, 그 임대주택에 산다고 하더라도 가뜩이나 허덕이는 살림에 소득의 25%이상을 월세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아닐까? 수도권의 전세 값이 평당 천만 원을 오르내리는 세상에 바늘귀 같은 직장에 취직해서 10여년을 이자에 허덕이며 살면서 주인 눈치를 보고, 그나마 월세로 얼마를 더 내라는 압박에 더 멀리 더 멀리 이사해야 하는 세상을 모는 것일까? 국민소득 4만불의 초석(달성이라는 말은 안 했다?)을 제시하면 그들이 저절로 그렇게 부자들이 흘리는 낙숫물을 받아먹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을 모르는 것인가?

 

또 그것이다. “적당한 경제 적당한 공포!”

 

버나드 쇼나 헨리 조지나 모두 부동산에 대하여는 한 목소리로 말한다. 토지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성서에도 그랬단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라고 레위기 25 23에서……)생산과 관련된 경제적 사안이기도 하며, 사생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본에 의한 영구세습은 사회적 해악일 뿐이며, 국가를 병들게 하는 것으로 국유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혁명적으로 실시하지 못한다면 점차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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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의 신체지도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 매슈 블레이크슬리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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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데넷 노튼이라는 과학자가 뇌 속에 칩을 심어 넣음으로써 그의 감정과 이성을 통제하여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로보캅은 중앙통제센터의 데이터처리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라는 것 때문에라도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처럼 기능하는 기계의 발명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간과 기계의 조합은 발명되지 못할 것 같다. 윤리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 상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만약 누군가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유기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재의 과학적 수준이 발전한다면 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 2009에서 보여 준 Wired Head라고 불리는 인간상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인간일까? 어쩌면 그런 생각, 즉 인간의 모습이 뇌를 빼고는 모두 인공물인 사이보그로 바뀐다고 해서 자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근원은 그들의 종교에 의한 세계관 때문이 아닐까?  그런 세계관이 만약 계속 이어진다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들의 종교관에 내재한 개념으로 신체적 형상이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과학이 주는 환상을 구체화 시켜 형태로써 나타내야 하는 것으로 실체화한다고 생각할 때, 영혼이 들어있다는 데카르트의 송과선만 남아있다면 모두 인간으로 보아도 무관하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 이런 영화 속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적 상상의 실체를 들여다 봤을 때 인간에게 뇌만 살아있다고 한다고 하여도, 또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심장과 폐가 기능을 하는 일부 인간이라고 하여도, 그가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뇌에 심어 놓은 컴퓨터 칩의 통제를 벗어나는 의지를 실행했을 경우 그에게는 경험에서 얻은 자극을 감정으로 전이시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데넷 노튼 박사가 아닌 현실의 데니얼 데넷이나 라마찬드란V.S. Ramachandran,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와 같은 뇌 신경과학자들의 의견을 보면 우리 인간의 행동의 동기는 어떤 하나의 명령에 의한 결정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떤 호문쿨루스도 사령탑역할을 하지 않는다. 사령탑이 없기 때문이다. 자아 구현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신체지도도 없다. 과학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적어도 그런 요체 같은 건 없다. 뇌는 고도로 상호작용적이다. 각각의 부위, 곧 각 지도는 마음의 정신작용에 독특한 인장을 새겨 넣을 뿐이다.” 뇌 속의 신체지도 2장 뇌 속의 작은 인간 37P 샌드라Sandra & 매슈 Matthew 블레이크슬리 Blakeslee() 이다미디어 간() 2011

그렇게 뇌는 수 십만 년 동안 인간의 몸 위에 자리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그 존재가 인간의 핵심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밝혀지고 있는 것 같다. 과학자들이 인간의 뇌가 지닌 비밀을 알아낸 것은 아직까지도 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기계의 발전으로 불과 몇 년 전에 이르러서야 밝혀진 부분도 있다고 하며, 언어중추를 지배한다는 브로카 영역 Broca Area이나 문자를 이해한다는 베르니케 영역 Wernicke Area에 대한 이해도 발견된 시기에 비하여 최근에야 뇌 촬영장비들을 이용하여 인간의 뇌 속에 자리한 뉴런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라마찬드란과 그 외 학자들에 따르면 거울 뉴런이야말로 인류의 진화가 10~20만년 전에 대약진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끝내주게 지적인 존재로 변모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답하는 셈이다. 공통 기어(基語, protolanguage, 소리가 지도화 되어 입술과 혀를 움직이는), 공감, 마음이론(theory of mind, 생각과 동기가 남한테서 기인한다고 보는), 남의 관점을 채택하는 재능은 인간의 독특한 능력이다. 이들 능력은 거의 틀림없이 그 즈음에 생겨났을 것이다. 거울뉴런으로 인해 문화가 전파되는 최초의 여명기가 시작되었다. 과학 저술가 맷 리들리(Matt Ridley)의 말마따나 본성(nature)은 양육(nurture)으로 생기는 것이다.” 9장 거울아, 거울아 250P

언제, 어느 때 인간의 기술이 태양계를 넘어가는 여행을 할 정도의 수준이 되던가, 귀찮게 몸을 움직이느니 대리 기계를 만들어 자신의 행위를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쉬는 행동이 가능해지는 날이 온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경험과 환경의 자극을 통해 얻은 감정이 있으며 그것을 적절한 사회적 판단을 통해 반응을 해야만 하는 자아라는 개념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내가 지금 10년간을 통증 속에 산다고 해서 통증을 없애고자 머리를 열어 뇌를 꺼내 통증을 느끼는 부위를 잘라낸다고 했을 때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타난다고 해도 자아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자아란 윤리나 도덕성을 갖춘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환경에 반응하는 감정의 덩어리쯤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하여는 자아와 달리 여러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우선은 그렇다.

로보캅은 뇌 속에서 발견한 또 다른 길. 다른 신체지도를 이용하여 감정을 되살렸으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인간성을 다시 찾은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가 환각이고 오해라 해서 우리 같은 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유의지가 환각이라는 진술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아와 자유의지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환각이고 오해일 터이다. 자유의지가 뇌에서 고등의 신체지도와 감정 및 기억 장치와 맺는 유연한 되먹임 고리가 아니라, 무한한 능력을 갖는다는 게 자유의지에 대한 환각이다. 자아가 분산되어 있는 창발적 인격이 아니라 무슨 고갱이쯤 된다는 생각이 자아에 대한 환각이다.  마무리하는 글 3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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