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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유발자, 마음 - 수술로도 못 고친 통증을 해결하는 심신의학
존 사노 지음, 승영조.최우석 옮김 / 승산 / 2011년 5월
평점 :
통증은 도대체 왜 끊이지 않고 지속되며 그 원인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부분의 통증은 Placebo Effect라고 알려진 ‘위약효과’만으로도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통증은 심인성이라고 구분하며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은 구조적 요인으로 원인에 대한 치료가 필요한 통증이라고 한다.
나는 근 10여년을 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통증의 근원이
정말 장애를 동반한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통증인지 아니면 꾀병을 빙자하는 마음에서 유발되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통증을 가진 채 살아가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술 후 처음 몇 년간은 ‘병원 찾아 삼만 리’를 해봤지만 아무데서도 뚜렷한 이유와 치료법을
들은 바 없다.
단지 계속 검사만을 요구하거나 진통효과를 주는 주사요법등과 물리치료를 통한 완화요법만을 진통제가 들어있는
약과 함께 처방 받아왔다.
알약이나 물리치료는 근원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척추의
국소부위에 주사를 이용한 약물치료도 효과가 조금 길뿐이지 그 역시 치료는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완화요법이나
위약효과는 이 책에서 말하는 의사들에게는 잘못된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수술이나 물리치료 또는 주사요법 등 모두가 위약효과 이상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핵심을 비켜간 방법으로 치료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에서 주제로 삼는 통증은 감각적 통증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통증. 즉, 가슴 시림, 허함, 아련함 먹먹함 등의 통증은 체성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통증의 유발점은 정말로 마음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통증은 위약효과도 소용없다. 굳이 약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슬프고 내 삶의 이유와도 같은 기쁨의 존재가
사라지는 가슴 시린 통증이 나타났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픔은 사라지고 만다.
물론 가끔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그 때의 그 통증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통증은 제외한다.
감각에 의하여 신체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이면서도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은 원인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위약효과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 외과적인 원인이
제거되었다고 판단됨에도 후유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통증의 일부분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감춰진 원인의 대부분은 프로이트 식의 원인,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자리한 억압과 분노를 이유를 든다. 그것은 유년기 또는 성장기의 발달과정에서 받은 억압의 전이형태로 통증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즉 풀지 못한, 통제하지 못한 마음, 억압되어 화가 가득한 분노를 풀지 못한 마음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언젠가
다쳤던 흔적이 남은 신체 부위가 아픈 편이 낫다고 여기도록 뇌가 마음을 조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뇌의
전략은 통증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통증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통증에 주목하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전이다. 불안하거나, 걱정되거나 화가 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통증은 격노의 지수를 숨긴다. 격노의
저수지가 존재하며, 거기 격노가 고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통증은 필요가 없어진다. 더 이상 주의를 딴 데로 돌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400P
-통증 유발자 마음/가정의의
심신의학 임상경험 마크 소퍼 박사.
그래서 억압된 무의식을 노출시켜 화를 해결하면, 분노를
해결하면 통증은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아 있는 것은 있다.
마음! 앙금으로 남은 마음. 세월이 남기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찌꺼기. 억압받았던 마음을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마음.
억압의 동기, 이런 것들의 원인을 찾는 것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통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어쩌면 지금은 수면위로 떠오른
빙산의 일각과 수면아래 잠겨있는 빙산의 나머지의 그 가치가 전도된 듯한 학문적 위치를 가진 프로이트의 심리학, 그
중심이라고 하는 억압된 성(性)으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방식의 주장은 뇌의 기능과 신체의 기능이 각각의 존재에 의하여 별도로 통제되고 있다는 데카르트
식의 변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