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혁명과 반역 - 풀빛 18
H.마르쿠제 / 풀빛 / 1984년 3월
평점 :
품절


2012 1 42번째 다보스포럼)에서도

첫날 주제로 ’자본주의 위기‘라는 토론 제목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포럼에 참석중인 미국의 사모펀드 칼라일그룹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회장은

자본주의 종말론까지 제기하였다.

그는 “서구 경제모델을 3, 4년 내에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게임에서 질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라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역사는 진실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117p

다음의 논의를 위해 고전적 발언을 명시해 두고자 한다.”자본주의의 압도적인 <>가 자본주의의 붕괴를 야기시킬 것이다, (소비자 사회)는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이며, 그 무덤이다.”  76p

왜냐하면 다음의 혁명은 여러 세대에 걸친 관심사일 것이고,”자본주의 최후의 위기는 거의 한 세기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184p

 

누가 이긴 것일까?

서구 중심의 세계경제 흐름은 이후로도 계속 지속될까?

경제에 대한 지식은 현실에서 家無擔石인 것처럼 빈약하기 그지없어 알 수 없지만 그런 문외한도 예상해볼 수 있는 미래는 바뀔 것이라는, 어쩌면 바램일지 모르는 생각은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기본적 욕구 이상의 과잉욕구의 발전과 확산 속에서 자본주의가 완숙하여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본의 위대한 역사적 역할은 잉여노동의 창출이다. 잉여노동이란 사용가치와 단순한 생존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분의 노동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생활필수품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노동 이상의 과잉노동이 개인적 욕구에 의해서 야기된 보편적 욕구가 될 정도로 욕구수준이 발전되는 순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엄격한 규율이 각 세대를 근면하게 가르쳐서 이러한 성질이 새로운 세대의 일반적인 속성으로 될 때, 자본의 역사적 역할은 완수된 것이다. 85p 반혁명하의 좌익(반혁명과 반역)

 

그저 오르면 내려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는 속담처럼 자본가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부의 요소가 바닥이 나는 그런 시기가 도래하거나, 그러기 전에 1968년의 봄이나 최근의 1%를 반대하는 99%의 모임처럼 인류 스스로의 자정적 흐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지식의 빈약함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올 희망을 기다림으로 대신하는 것이랄까?

 

자유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관계는 다음의 문장으로 가장 간략하고도 분명하게 정식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두려워하지 않을 때의 유산계급이 보여주는 모습이며, 그들이 두려워할 때는 파시즘이 나타난다. 91p

 

자유주의를 빙자한 파시즘! 지금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과거의 파시즘 역사로 되돌아가길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끝없는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동만이 개인의 행복 목표라는 것을 세뇌시키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당근을 만들어 낼 궁리를 어디선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구 북반부의 부를 위하여 남쪽의 세계를 모조리 파헤친 다음에는 그들은 아마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낼지 모르겠다. 테러라는 이름으로? 빈곤 퇴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20세기 초반의 역사가 가난했을까? 빈부의 차이에 대하여 비교를 할 수 있는 우리 실정에 맞는 경제적 통계가 있었을까? 그 시기, 전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지금에 비하여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貧困國이라는 명칭은 서구의 일방적 시각 아니었을까? 그들이 던져준 초콜릿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을까? “, 미국은 형식적으로 제3세계의 정치적 독립을 묵인함으로써, 경제적인 침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신좌파의 상상력 188p>” 그렇게 반복하기 위하여 서구는 또 다시 혁명이라는 독을 풀지 않을까?

 

The Imagination of The New Left

 

"역사는 자신을 반복할지 모르지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264p

 

3. 프랑스의 신좌파

1968 5最後의 자본가가 최후의 관료의 창자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인류가 해방될 수 없다.< 이 구호는 <<국제 상황주의자>>의 것이다. 소련 공산당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내렸다>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최후의 관료의 목을 매달 때까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35p

섬뜩한 구호이지만 자극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는다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상호주의인가. 자본가와 관료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문장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본가는 최후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를 쥐어 짜고 있으며, 관료는 자신의 편의와 체면을 위하여 여러 가지 당근으로 시민을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5.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

이론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기초 작업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론적 분석이 제공해 준 통찰력을 역사적 실제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는집단적 지식인이 없다면, 이론은 실천에서 유리된 채로, 이성은 감성에서 분리된 채로, 그리고 에로스와 로고스의 통일은 깨어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이 존재할 때에야, 조직화의 문제가 생기 넘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429p  

집단적 지식인!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제도에 편입하여 구조적 틀을 마련하고자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주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전혀 사적이거나 수직수평적인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집단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인간이므로 그것이 가능할까가 의문이다. 의견통합에 있어 타락과 부패에 가까울 수 있는 감성적 인간을 제외하고자 요즘 유행하는 SNS를 기반으로 하는 통합시스템을 만들어서 시행한다 하면 그것은 탈 인간화이므로 모순일까?

 

 싸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존재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 완전한 자유인이고 상황 속에서만 실존하기 때문에, 100% 순수한 학문도, 예술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침묵조차도 상황 속에서 무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참여의 형태를 띤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싸르트르적 지식인상과는 달리 푸코는 다소 소박한 ‘특정한 지식인’ 상을 제시한다. 후자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신의 특정한 분야에서 습득된 전문지식을 무기로 사회 비판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일반적인 지식’으로 무장하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을 두고 있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두 모델을 조합한 ‘집단적 지식인’상을 주장하는데,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지식인 ‘앙가쥬망’의 당위성은 인정하나 사회투쟁 현장에 함몰되어 지식인의 지적 활동이 운동의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며, 또한 지적 전문성은 인정하되 이에 따른 고립을 피하고 사회참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 뜻을 같이 하는 지식인들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길현 ; 부르디외와 프랑스지식인들>

 

6. 신좌파의 합리성

이른바 실제 세계는 진리가 있을 장소가 아니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그 자체의 이미지에 부합되게끔 진리를 쪼개는 것이다. 물리학은 이른바 객관성을 부여 받지만, 인간적 내용을 결여하게 된다. 인문학은 인간적 내용을 보전하지만, 진리를 희생시킨 이데올로기로서만 그 내용을 보전하게 된다. (호르크하이머) 503p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가 그리스어 ou-toppos 라는 말을 결합하여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했다지만 없다는 뜻으로서 존재를 희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나의 시간과는 관계 없을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잔 먹을 때면,

시절 여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던 Melanie Safka Saddest Thing이나

Moody Blues Band Melancholy man같은 음악을 들으며

여자들에게 서로가 노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며칠 굶은 모습으로 얼굴에는 게슴츠레하게 촛점 잃은 표정을 짓고,

염세적인 철학을 운운하면 뭔가 특별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도 “파리는 안개에 젖어” 이런 영화를 보기도 했고..

우울함, 고독함 이런 것이 젊음의 표현이기도 했던

시절에 앞부분만 대충 읽어보고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며 술과 같이 취해 가던

시절.. 그러나 때는 읽지 못했던 .

책을 다시 보려니 세로 글이라 눈이 아른거려 새로 다시 사서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구성은 모두 네 개의 권(, Buch)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이 행해지는데, 여기에서는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표상의 세계 그리고 경험과학의 대상을 고찰하고 있다.

2권에서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의지가 구체적으로 표상의 세계에 드러나는 방식, 즉 의지의 객관화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고 있다.

3권에서는 다시 표상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을 전개하는데, 여기에서는 충분근거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들, 플라톤의 이데아 그리고 예술의 대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4권에서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해서 제2고찰을 전개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여기에서 의지의 참된 본질에 도달했을 때에, 즉 자기인식(Selbsterkenntnis)에 도달할 때에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칸트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상세하게 전개하고 있다. 

 

앞서 읽다가 만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한 페이지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이 책은 한 페이지를 두세 번 읽어도 잘 넘어가며 다음페이지를 빨리 보고 싶어지고

글에 동의하는 부분도 많아서 표식이 많이 붙어버렸다.

 

그런데 이 책이 왜 염세주의, 허무주의의 책이라고 불리우게 된 걸까?

                                                                      

허무주의란 뜻이라는 nihilism의 어원은

 [nil(/없음"no"의 어원(=nul=nihil=>ne) ] 이라는데 그것이 왜 허무주의로 표현될까?

무주의 라고 하기에는 어조가 맞지 않기도 하고 ism이 없다는 표현과 같으니

그냥 붙인 것인가?

사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무라는 주장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가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 –(이 주장은 殫殘天下之聖法 而民始可與論議 <莊子 外篇 胠篋 >

이나 興一利不 若除一害 <야율초재>의 주장과 비슷한 듯.-)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기원을 그리스의 철학자.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엠페도클레스의 제자로서 엘레아학파의 제논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고르기아스가 그의 저서

《비유(非有)에 관하여》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다 하여도 남에게 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글로 바뀌면서 어떻게 허무라는 단어를 택하게 되었을까?

 

허무(虛無)를 사전에서 보면

1.     아무것도 없이 텅 빔. 2 .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 3. <철학> 노자의 학설에서,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우주의 본체.  4. <철학> ()에 대립하는 개념만 있고, 실재하지 아니하는 무의미한 무()의 의식.

이라고 하니 틀린 표현은 아니건만 왠지 1번이나 2번의 해석,

그 중에서도 2번의 해석이 더 많이 떠오르게 되기에 본래의 뜻과는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 시비를 걸어보는 것이다.

내 생각에 허무주의, 니힐리즘은

쓸쓸하고 삭막한 차가운 삭풍의 겨울바람과 같은 주의가 아니라

한 여름 태풍에 맞서는 산 상의 외로운 소나무의 느낌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로 불려지는 염세주의

 

Pessimism;염세주의(厭世主義) 또는 비관주의로 번역된다. ‘최악(最惡)’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m’에서 유래한 말로, 옵티미즘(optimism: 낙천주의)에 대응된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이 사는 동안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이며, 흔히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신()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實在)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된다. 지상(地上)에서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럽혀진 것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생식(生殖)과 죽음의 법칙에 얽매여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의해서만 목숨의 죄가 보상되고 일자(一者) 안에서, 광명에 싸인 통일 속에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염세사상은 영육분리적(靈肉分離的)인 오르피즘(신화상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의종교로,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됨으로써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함)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페시미즘의 철학을 역설한 사람은 A.쇼펜하우어로,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쾌락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무욕(無欲)의 상태 즉, 완전한 의지부정(意志否定)에 의해 현상세계(現象世界)가 무()로 돌아가는 열반(涅槃)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고 한다

 

Pessimism의 어원은

라틴어의 malus(악한)의 최상급인 pessi- mus(최악이란 뜻)에서 유래한 말이라는데

 최악이라는 뜻이 비관인가?

그런 접근방식으로 보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라는 표현은 그 사용자가 일방적인 표현을 하는 것 아닐까 한다.

그 사용자란 정복자의 논리로 인간의 사유에 대해서도

그 때까지 서양에 만연한 철학적 방법인 스콜라철학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다수의 의견(인격적인 한 존재자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 보상받을 인생은 행복으로 충만한)에 인생은 고뇌이며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라는

찬물을 끼얹은 의미로 최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를 사용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 세상의 구분에 의한 선입견 없이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선가 읽은 듯 생각나는 것이 자주 있는데 그 것은 반야심경 속의 구절이다.

그래서 그 구절에 이 책의 개념을 빗대보면

마치 쇼펜하우어가 반야심경을 해설한 것 같은 느낌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는

존재에 대한 진리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데 세계의 존재는

 

주관과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객관에 불과하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71가지의 주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세계를 표상으로 인식하는 개인이

 

 불치의 고통과 끝없는 비참함을 의지의 현상인 이 세계에서 고유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 폐기되는 의지와 녹아 없어지는 세계를 보고 , 눈 앞에 단지 공허한 만을 지킨다면"

 

욕망의 의지는 소멸될 것이며

 

 그렇게도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모든 태양과 은하수와 더불어 (이것이 불교도의 반야 바라밀이며, ’모든 인식의 피안’, 즉 이미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경지이다)인 것이다

 

로 인생의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경의 한 구절로 밝힌 반야심경에는 空中無色부터 是無等等呪까지

無가 21번이나 나온다.

그러한 는 모든 것이 없다라는 것이라면서

어째서 그 없다는 것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을까?

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수천 년 동안이나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에 대하여 어찌 문자로 풀어 볼 수 있을까마는

문자적 정의라도 내려진 에 관한 백과사전식의 풀이를 보면

 ()와 대립하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또는 부정으로서의 가 아니라

유무의 대립을 넘어 근원적 ·절대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것이란다.

 

 

중국철학,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는 도()의 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實在)이며 세계(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행위의 규범적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깨달은 성인은 (無爲) ·(無知) ·자연의 덕을 지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양적 사고는 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절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스콜라 철학의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는

명제의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소극적 개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신은 모든 생명과 진리와 선의 유일원인(唯一原因)으로 파악되므로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면서도 정면으로 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신에게는 긍정적 술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중세의 이른바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도 신을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없었다.

그러나 옛 가치관이 뒤집힌 현대에서는 서양철학에서도 는 중요한 근본개념(특히 하이데거를 비롯 한 사르트르 등 실존철학에 있어서)이다

 

 

이런 개념의 차이를 만들어 낸 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점이

어느 날부터(아마도 5~6년 전부터.)의 의문이었다.

개인이 세상을 보며 사유하는 방법의 차이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객관에서 출발한 여러 학설은 언제나 직관의 세계와 그 질서를 문제로

삼아왔다.

실재세계에서 출발한 이오니아학파 철학자와 프랑스 유물론자들,

추상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스피노자와 고대 엘레아학파의 철학자,

시간, 수에서 출발한 피타고라스 학파와 중국 철학,

인식에 의해 발달된 의지 활동에서 출발한 이들은 세계의 바깥에 있는

인격적인 한 존재자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 세계가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스콜라학파사람들이다.” 66p

 

여기서 나는 철학의 계보나 서양철학에서 스콜라학파가 영향을 끼친 부분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저 추측하기로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불안에 대한 호기심에 읽었던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이

이미 정해진 진리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하며, 개념의 분석, 연속적인 논증을 위주로 하였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미래를 정해 놓은 과거는 그대로 현재에도 적용되어

이성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아닐까?

이성적으로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함이었을 텐데

그것을 누군가가 어리석은 질문을 끌어 낸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마저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불안의 개념).”라며 차단하였으니 그로 인한 불만이 없었을까?

그래서 여러 학자들의 표현방법이 본인들은 서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개념과 단어까지 만들어내면서 그렇게 각각이었나?

 

동서양의 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이렇게 상반되다시피 다른 결과를 가져온

사유하는 방법의 차이는 각 지역의 어떤 요건이 달라서였을까?

서양철학의 그리스적 기원과 인도나 중국의 경우가 다른 것은

그들 문명 속에 오래된 신화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런 동서양의 차이를 이 책은

칸트의 Ding an sich(物自體)를 의지로 보고 <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 고찰 29 .216p> 그 의지는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를<니체 ; 도덕의 계보학 >

의욕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의미로 합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이렇게 합일화 시키려는 의미로 볼 때

<인생의 기본 특징인 고뇌> -(4 57.)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개체의 손으로 과거가 되며, 미래는 불확실하고 또 언제나 짧다. 그래서 개체의 현존은 형식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현재가 죽어버린 과거 속으로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 즉 끊임없이 죽는 것이다. 373p”

 

雲門禪師日日是好日과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나는 미래의 완성은 현재에 있으며 과거란 현재의 그림자라고 생각하는데

순간으로 지나가 버린 과거는 오늘 죽음으로서 마침표를 찍고,

의지에 의해서 연속되는 의욕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다가오는 현재에 완성하게 되는 것이므로 매일매일이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고뇌는 인생에 있어 고유한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에게 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고뇌의 샘을 모두들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하는, 쓰디쓴 약과 같은 인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381p”

 

있지 말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390p <4 59 개개인의 역사는 고뇌의 역사>”

 

고 인정하며 의지로 인한 욕망의 표상은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고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표상에 따른 맹목적임이 의지라고 하는 해석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구속하는 것 역시 자신에게 있고

그 것이 를 지향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참 자아이므로

구속이라던가 맹목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그 뿌리인 의지 표상에 반하는 의지가 아닌 를 바깥에서 구하는가 아니면

인간행위의 규범으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보는 뿌리인 의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Neti Nety Atma. Tat Tvam Asi이다”.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래서 이는 쓸쓸한 낙엽이 아니라 바람을 머금은 소나무 잎인 것이다

이 것을 회의적이고 허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의지라는 것은 없다고 보여지므로

인생이 고뇌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나 표상에 의한 의지의 구속을 해제하는데

초인이 필요하다던가, 종교의 힘으로 이기적 자아를 벗어나야 한다던가,

예술로 인하여 의지를 다스리라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본다.

쇼펜하우어의 비유대로

 

괴테의 <감상주의의 승리>에 나오는 왕자가 현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외면하고는 자연을 모방한 무대 장치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114p”

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본인이 해석한 ( 원주인지는 모르겠지만 ..)

 에 대하여 '반야바라밀'이나 '인식의 피안'을 운운하였는데

그 반야심경의 도일체고액 度一切苦厄. 苦厄이라고 할까가 의문이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이 고뇌이며 소망이 이루어짐은 순간이고

또 다른 소망이 생김으로 고뇌를 지속해야 하는 의지의 욕망이 고뇌라고 표현된다면

그 것은 그냥 色을 말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감정을 다 같은 질량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의 성취가 기쁜 것은 그 것이 항상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므로

고뇌 역시 항상 같이 한다면 그 것은 그냥 본질이다.

때문에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마 욕망의 성취 시간이 짧다는 것을 고통이 아닐까?

 

또한 照見五蘊皆空을 하기 위하여의 조건인 반야바라밀을 行心하는 것이 고뇌라면

고뇌이겠다.

산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정상의 위치가 달라 보인다고 해서

정상의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바라보는 관자재. 그래서 그것이 고액이건 무엇이건 그저 그것이라면

의지는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천국에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이 쇼펜하우어의 다른 책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내일은 다시 동양으로 가서 장자를 들여다 볼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원시인의 정신세계
뤼시앙 레비브륄 지음, 김종우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38,000원 → 38,000원(0%할인) / 마일리지 1,140원(3% 적립)
2012년 07월 13일에 저장
품절
현대과학이 보는 우주- 현대과학으로 풀어내는 우주의 역사
김강수 지음 / 아카데미서적 / 2012년 2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1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06월 19일에 저장

리바이어던, 자유와 맞바꾼 절대 권력의 유혹
토마스 홉스 지음, 하승우 옮김 / 풀빛 / 2007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2년 04월 13일에 저장

진화의 탄생- 피투성이 이빨과 발톱의 과학혁명
마이클 루스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2년 04월 07일에 저장
절판



3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을 망친 10권의 책 - 그리고 세상에 도움 되지 않는 5권의 책
벤저민 와이커 지음, 김근용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요즘에 일이 없는 통에 책방을 들러 책을 "구경", 순전히 구경만 하는 시간이 가끔 있는데 책 값이라고 안 올랐겠나?!
그래서 인터넷을 통한 헌책을 사서 읽는데
그렇다 보니 가끔 제목에 낚여서 (..검증을 하지 않은 게으름의 시간 때문이기도... )
그럴 듯 한 , 무겁지 않은 주제에 넓은 범위를 다룬 책인 듯 하여 고르면 ,
아 역시.. 하고 후회하는 적이 10%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이 책도 그 중에 하나인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가 짜증나서 던져버린...

책을 쓰는 것이야 제 맘이니 읽은 나를 탓 할 일이지만
어찌 알았겠어??
저자의 사상이 나와 같지 않음을..
그런데 짜증이 난 것은 그 때문이 아니고, 책 속의 표현 방법 때문이었을걸?!


책의 제목이 “세상을 망친” 이라고 했는데 원제도 “10 Books that Screwed up the World”네?
Screwed up!.이란다.
윤리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돌기에 노이로제 걸린 듯 한 반응을 보였을까?
그 10가지 책과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은 5권의 책이란
1.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
2.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3.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4. 장 쟈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5.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6.죤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7. 찰스 다윈의 인류의 유래
8.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피안
9. 레닌의 국가와 혁명
10. 마거릿 생어의 문명의 축
11.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12.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환영의 미래
13.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의 성년
14. 킨제이 연구소의 남성의 성적 행위
15.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


이렇게 1장마다 비판을 늘어 놓는데 비판이야 뭐라겠어? 자기 맘인데..
그런데 그 비판의 모양새는 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전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거지…
자신의 종교적 성향이 그렇기에 반대의 입장을 논하는 것은 “만들어진 신”을 저술한 ‘리차드 도킨스’와 다를 바 없지만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력은 여~~엉..!
더불어 반박의 근거로 내세우는 의도도 성서와 반하는 의견을 내세운다고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공격뿐인 듯 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비판하지만 마케아벨리의 의견대로 때로는 사악하게 한 마을 사람을 모두 죽여버리는 구약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말이 없네?
데카르트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그의 짐승 같은 논리…..<제2장: 방법서설 중. .p45>라 했는데 짐승이라면 다른 표현도 가능할 텐데 “짐승 같은”이라고 해야 했을까?
자신들의 교리가 아니면 모조리 사악한 이단으로 모는 어느 종교집단 같은 자신의 논리는 “짐승 같은”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 인간의 책을 계속 읽으면 아마 이런 결론이 그럴 듯 하다고 본다.
국가는 인간이 만든 세속적 단체에 불과하므로 지상에서의 논리로 보는 것은 여호와를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한 생명이 아니고 여호와가 준 규범을 살다가 그가 지정해준 대로 천당이던 지옥이던 가야하며 고통을 받던 행복에 살던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며,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자격은 없고 이미 정해진 삶인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비정상인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대로 살아야지 그 부를 나누려 해서도 안되고 장애를 또는 유전적 질병을 없애려고 피임 등의 행위를 해서도 안되며 여성 스스로의 인권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뭐 대체로 이런 주장이지 않을까?
이거 가만 보면 십계명이라는 그거 보다 더하네??
이 인간의 사고가 요즘 우리나라의 보수층이라고 스스로 떠벌리는 기득권층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아니면 미국의 보수층의 대변인 같기도 하고.
이인간이 아마 책이니까 그나마 점잖게 그런 표현을 했는지도 몰라..

아 ~! 쓰 ..
난 그저 이 책이 서양사의 가십거리를 다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종류의 책이면 좋았을 걸..
다른 책 살걸..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신의 모습을 토대로 만들어진 형상과 신이 전해준 윤리 규범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가기보단 스스로 무한한 힘을 지닌 창조자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룬 저서들의 대부분은 무신론자에 대한 비평이다.
“악의로 가득 찬 책들을 하나하나 읽고 그 전후를 속속들이 알아내어 그 속에 감춰진 사악한 진실을 밖으로 끄집어내 세상에 까발리는 것이다”

이래서 자기가 책을 썼단다.
이것이 윤리학을 다루는 학자의 의견은 아니겠지??
책이나 타인의 의견을 순수하게 객체의 의견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의 틀에 맞추어 맞으면 옳고 안 맞으면 사악하고 악의로 가득 찬 진실인 것일까?
진실이 사악한 것 선한 것 .. 이렇게 여러 가지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야 뭐.. 무신론자이며 비기독교자의 책은 악한 내용으로 가득한데 그나마도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므로 자신과 같은 성경의 문자대로 행하고 사고하는 자들이 골라 정리해 준 내용이 책이 뜻하는 내용이다는 뜻으로 알아라 ..바로 이것이 진실이다..이것이겠지?!


이 인간이 동양의 사상을 다룬 책들은 안 읽어 봤겠지?
노자의 “絶學이면 無憂니라. 唯之與阿가 相去幾何며 善之與惡이 相去何若이리오 人之所畏를 不可不畏니 荒兮하여 其未央哉로다” 이 글은 안 읽었겠지?
성서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1-2)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6:37)

이 글은 자신만의 사전으로 읽었을까?

그런데 궁금한 것 하나.
인간의 영혼이 있어서 (생존의 행위에 대하여 보상을 받고 안받고는 생각지 않고.. 그것은 둘째로 보고..) 육체의 존재 여부에 따라 그 한 존재가 생멸한다면
육체는 1회용 컵라면 같은 물리적 존재이고 영혼은 라면이라는 개념으로서 영구용이라는 것일까?
그러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것이 인간인데 그리고 코를 통해 숨을 불어 넣은 것이 영혼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도 계속해서 어디에선가 숨을 불어 넣고 있다는 것인가?
윤회라는 개념대로 인구의 증가에 따라 영혼의 수도 증가한다면 인간 영혼의 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이겠지?
아니 인간 영혼의 수가 아니라 생명의 수이겠지? 때에 따라 금수가 되기도 한다니까 말이지.
기독교 개념대로라면 육체를 잃어버린 영혼의 수는 얼마나 될까?
신곡에 나오는 대로 지구의 속에 쌓여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천당이 있어서 또는 지옥에 있어서 그 아무 곳이나 간다면
그 곳에 갈 때 육체로서 갖은 경험이나 의식을 그대로 기억하는 채로 가는 것일까?
누군가의 말대로 성령으로서의 부활이라면 그게 그 육체가 가진 경험적 또는 이성적 개념을 갖은 영혼일까?
이성이 있다면 선택적 이성을 갖은 부분적 경험을 기억하는 개체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영혼일까?
그렇게 영원히 행복한 천국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천국이라면 악이 사라진 개념일 텐데 그렇다면 그 속에서 상대적 개념을 잃어버린 존재가 행복이라는 개념을 느낄까?

왜 일체고액인가 이 말이지.
왜 원죄를 그것도 예수가 뒤집어썼다는 그 원죄를 다시 꺼내어서 목을 메는가 이 말이지.
이브가 사과를 권하지 않았고 아담이 뱀을 발로 밟았다면
인간은 눈이 어두운 채로 계속 그곳에 있었을까?
아이를 낳는 수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면 아이의 탄생이 고통만 있는 것일까?
인간의 지속은 어디 슈퍼에서 물건 사오듯이 배급을 받아서 지속되었을까??

이 책을 쓴 인간은 이렇게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을 받음이 원죄와 관련 없음!이라고 할까?
그렇게 남을 ‘짐승의 논리”라고 하는 분노가 결국 자신 스스로 쌓는 욕망의 고액임을 모르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의 본질
포이에르 바하 / 종로서적성서출판사 / 199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The Essence of Christianity 
  

(Ludwig Andreas Feuerbach)

 

19세기 남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뉴렌베르그 출신의 철학자로서 1804년 출생하여 1872년 사망함.
그의 철학은 기독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으며,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 the essence of christianity(영어판)》(1841) 가 있는데 이 비판서로 인하여 강단에서 추방되었다.《장래 철학의 근본문제 Grundsä tze der Phi1osophie der Zukunft》(1843) 《종교의 본질 Das Wesen der Religion》(1845) 등이 있다.  

차례 

•제2판 의 서문
•1. 일반적 인간의 본질
•2. 일반적 종교의 본질
•3.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4.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의 신
•5.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6. 고난 받는 신의 비밀
•7.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8.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9.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10.신앙과 사랑의 모순
•결론  

  본문 중에서..  

   
 

사변 철학은 그 자체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로 하여금 종교 자체를 말하게 한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을 종교의 경청자 혹은 통역인으로 만들 뿐이고,
종교의 후견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며 올바르게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노력이었다. 비록 종교 혹은 신학이 이것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신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을 인간이 되게 하고, 다음에 인간적으로 형성되어 인간적으로 느끼고,인간적으로 사념하는 신을 종교의 열애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기독교의 비밀을 누설하였을 뿐이며, 나는 단지 신학의 모순이 가득찬 망상을 제거 하였을 뿐이다. 

 p.17 /제2판 서문

 
   
   
 

이와 같이 종교적인 인간은 인간 행위의 무의미성을 철회한다. 즉 , 인간이 자기의 성향과 행위를 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표로 삼으며 - 정신의 대상은 행위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 신의 행위를 인간 구원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간 행위를 의미있게 본다는 것이다, 신이 행위하는 것은 인간이 선하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외관적으로는 가장 낮게 천시당하는 반면 실은 가장 높게 올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하여서 오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이 신 안에 자기의 행위의 목표를 두는 것은 사실이다. 

p.65 /제2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이 최고 善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신 안에서 위안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 본질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그의 평화도 역시 나의 평화와는 다른 것이며, 나에게는 평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中略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켜야 하며 또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인간은 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p.85/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네이버  SCRAP
 

  포이에르바하(Feuerbach) 저작. 포이에르바하는 이 책에서 신을 인간화하여, 신학을 인간학으로 해소한다. 

우선 '서론'에서 인간을 대상적 인간으로 포착한다.
“인간은 대상이 없으면 무이다.”
인간의 본질은 대상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이 자아를 관련시키는 대상은 인간 자신의 본질이지만 이것은 바로 대상화된 본질이다. “따라서 인간은 대상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아의식이다.” 이런 뜻에서 대상 속에서 인간의 본질은 드러나는 것이다. “대상은……그것이 인간에 대상인 한 인간 본질의 현시이다.”
종교의 본질도 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신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의식이며, 신을 인식하는 것도 인간의 자아인식이다……인간과 인간의 신은 하나이다.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ㆍ인간의 혼이며, 인간의 정신ㆍ인간의 혼ㆍ인간의 심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며 인간의 자아가 말로 표현된 것이다.
” 기독교도 인간이 자아의 본질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이것이 포이에르바하가 신을 인간화하고, 신학을 인간학으로 해소한 근본 사상이다.
 '본론'은 2부로 나뉘어 제1부는 '종교의 인간학적 본질'을,
제2부는 '종교의 신학적 본질'을 논하였다. 신이 인간학적으로 포착되고,
종교가 인간적ㆍ자연적인 한 이것은 “종교의 진실한 본질이다.
그러나 신이 신학적으로 포착되고, 종교가 비인간적ㆍ비자연적인 이상
이것은 종교의 진실하지 않은 본질”이다.

 


 헌책을 사서 읽는 재미에 .

새 책만 사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통한 헌책의 이용 방법..

그래서 잔뜩 골라 저장해 놨심.. 알라딘의 램프 속에..

 

위 책에 대한 것은

한참 동안 고민 끝에 드디어 읽어 보았으나.

사족일 것 같아

예전 것으로 대신함.

 
              ☜   요기.. 요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