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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오래 전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 한잔 먹을 때면,
그 시절 여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던 Melanie Safka의 Saddest Thing이나
Moody Blues Band의 Melancholy man같은 음악을 들으며
여자들에게 서로가 더 그 노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며칠 굶은 모습으로 얼굴에는 게슴츠레하게 촛점 잃은 표정을 짓고,
염세적인 철학을 운운하면 뭔가 특별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도 “파리는 안개에 젖어” 이런 영화를 보기도 했고..
우울함, 고독함 이런 것이 젊음의 한 표현이기도 했던
그 시절에 앞부분만 대충 읽어보고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며 술과 같이 취해 가던
그 시절.. 그러나 그 때는 다 읽지 못했던 그 책.
그 책을 다시 보려니 세로 글이라 눈이 아른거려 새로 다시 사서 본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구성은 모두 네 개의 권(卷, Buch)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이 행해지는데, 여기에서는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표상의 세계 그리고 경험과학의 대상을 고찰하고 있다.
2권에서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의지가 구체적으로 표상의 세계에 드러나는 방식, 즉 의지의 객관화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고 있다.
3권에서는 다시 표상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을 전개하는데, 여기에서는 충분근거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들, 플라톤의 이데아 그리고 예술의 대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4권에서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해서 제2고찰을 전개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여기에서 의지의 참된 본질에 도달했을 때에, 즉 자기인식(Selbsterkenntnis)에 도달할 때에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칸트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상세하게 전개하고 있다.
앞서 읽다가 만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한 페이지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이 책은 한 페이지를 두세 번 읽어도 잘 넘어가며 다음페이지를 빨리 보고 싶어지고
글에 동의하는 부분도 많아서 표식이 많이 붙어버렸다.
그런데 이 책이 왜 염세주의, 허무주의의 책이라고 불리우게 된 걸까?
허무주의란 뜻이라는 nihilism의 어원은
[nil(무/없음"no"의 어원(=nul=nihil=>ne) ] 이라는데 그것이 왜 허무주의로 표현될까?
무주의 라고 하기에는 어조가 맞지 않기도 하고 ism이 없다는 표현과 같으니
그냥 붙인 것인가?
사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무라는 주장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가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 –(이 주장은 殫殘天下之聖法 而民始可與論議 <莊子 外篇 胠篋篇 >
이나 興一利不 若除一害 <야율초재>의 주장과 비슷한 듯.-)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 하면서 기원을 그리스의 철학자.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엠페도클레스의 제자로서 엘레아학파의 제논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고르기아스가 그의 저서
《비유(非有)에 관하여》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다 하여도 남에게 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글로 바뀌면서 어떻게 허무라는 단어를 택하게 되었을까?
허무(虛無)를 사전에서 보면
1. 아무것도 없이 텅 빔. 2 .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 3. <철학> 노자의 학설에서,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우주의 본체. 4. <철학> 유(有)에 대립하는 개념만 있고, 실재하지 아니하는 무의미한 무(無)의 의식.
이라고 하니 틀린 표현은 아니건만 왠지 1번이나 2번의 해석,
그 중에서도 2번의 해석이 더 많이 떠오르게 되기에 본래의 뜻과는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 시비를 걸어보는 것이다.
내 생각에 허무주의, 니힐리즘은
쓸쓸하고 삭막한 차가운 삭풍의 겨울바람과 같은 주의가 아니라
한 여름 태풍에 맞서는 산 상의 외로운 소나무의 느낌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로 불려지는 염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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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ssimism;염세주의(厭世主義) 또는 비관주의로 번역된다. ‘최악(最惡)’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m’에서 유래한 말로, 옵티미즘(optimism: 낙천주의)에 대응된다.
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이 사는 동안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이며, 흔히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無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신(神)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實在)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된다. 지상(地上)에서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럽혀진 것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생식(生殖)과 죽음의 법칙에 얽매여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의해서만 목숨의 죄가 보상되고 일자(一者) 안에서, 광명에 싸인 통일 속에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염세사상은 영육분리적(靈肉分離的)인 오르피즘(신화상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의종교로,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됨으로써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함)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페시미즘의 철학을 역설한 사람은 A.쇼펜하우어로,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쾌락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무욕(無欲)의 상태 즉, 완전한 의지부정(意志否定)에 의해 현상세계(現象世界)가 무(無)로 돌아가는 열반(涅槃)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고 한다. |
Pessimism의 어원은
라틴어의 malus(악한)의 최상급인 pessi- mus(최악이란 뜻)에서 유래한 말이라는데
최악이라는 뜻이 비관인가?
그런 접근방식으로 보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라는 표현은 그 사용자가 일방적인 표현을 하는 것 아닐까 한다.
그 사용자란 정복자의 논리로 인간의 사유에 대해서도
그 때까지 서양에 만연한 철학적 방법인 스콜라철학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다수의 의견(인격적인 한 존재자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 보상받을 인생은 행복으로 충만한)에 인생은 고뇌이며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라는
찬물을 끼얹은 의미로 최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를 사용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 세상의 구분에 의한 선입견 없이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선가 읽은 듯 생각나는 것이 자주 있는데 그 것은 반야심경 속의 구절이다.
그래서 그 구절에 이 책의 개념을 빗대보면
마치 쇼펜하우어가 반야심경을 해설한 것 같은 느낌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는
존재에 대한 진리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데 세계의 존재는
“주관과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객관에 불과하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71가지의 주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세계를 표상으로 인식하는 개인이
“불치의 고통과 끝없는 비참함을 의지의 현상인 이 세계에서 고유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 폐기되는 의지와 녹아 없어지는 세계를 보고 , 눈 앞에 단지 공허한 無만을 지킨다면"
욕망의 의지는 소멸될 것이며
“그렇게도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모든 태양과 은하수와 더불어 無(이것이 불교도의 ‘반야 바라밀’이며, ’모든 인식의 피안’, 즉 이미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경지이다)인 것이다”
로 인생의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경의 한 구절로 밝힌 반야심경에는 空中無色부터 是無等等呪까지
無가 21번이나 나온다.
그러한 無는 모든 것이 없다라는 것이라면서
어째서 그 없다는 것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을까?
無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수천 년 동안이나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그 無에 대하여 어찌 문자로 풀어 볼 수 있을까마는
문자적 정의라도 내려진 無에 관한 백과사전식의 풀이를 보면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無 또는 부정으로서의 無가 아니라
유무의 대립을 넘어 근원적 ·절대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것”이란다.
중국철학,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는 도(道)의 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實在)이며 세계(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행위의 규범적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깨달은 성인은 無위(無爲) ·無지(無知) ·자연의 덕을 지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양적 사고는 無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절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스콜라 철학의 ‘無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는
명제의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소극적 개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신은 모든 생명과 진리와 선의 유일원인(唯一原因)으로 파악되므로 ‘無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면서도 정면으로 無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신에게는 긍정적 술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중세의 이른바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도 신을 無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없었다.
그러나 옛 가치관이 뒤집힌 현대에서는 서양철학에서도 無는 중요한 근본개념(특히 하이데거를 비롯 한 사르트르 등 실존철학에 있어서)이다.
이런 개념의 차이를 만들어 낸 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점이
어느 날부터(아마도 5~6년 전부터.)의 의문이었다.
개인이 세상을 보며 사유하는 방법의 차이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객관에서 출발한 여러 학설은 언제나 직관의 세계와 그 질서를 문제로
삼아왔다.
실재세계에서 출발한 이오니아학파 철학자와 프랑스 유물론자들,
추상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스피노자와 고대 엘레아학파의 철학자,
시간, 수에서 출발한 피타고라스 학파와 중국 철학,
인식에 의해 발달된 의지 활동에서 출발한 이들은 세계의 바깥에 있는
인격적인 한 존재자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 세계가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스콜라학파사람들이다.” 66p
여기서 나는 철학의 계보나 서양철학에서 스콜라학파가 영향을 끼친 부분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저 추측하기로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불안에 대한 호기심에 읽었던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이
“이미 정해진 진리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하며, 개념의 분석, 연속적인 논증을 위주로 하였”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미래를 정해 놓은 과거는 그대로 현재에도 적용되어
이성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아닐까?
이성적으로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함이었을 텐데
그것을 “누군가가 어리석은 질문을 끌어 낸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마저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불안의 개념).”라며 차단하였으니 그로 인한 불만이 없었을까?
그래서 여러 학자들의 표현방법이 본인들은 서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개념과 단어까지 만들어내면서 그렇게 각각이었나?
동서양의 無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이렇게 상반되다시피 다른 결과를 가져온
사유하는 방법의 차이는 각 지역의 어떤 요건이 달라서였을까?
서양철학의 그리스적 기원과 인도나 중국의 경우가 다른 것은
그들 문명 속에 오래된 신화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런 동서양의 차이를 이 책은
칸트의 Ding an sich(物自體)를 의지로 보고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 고찰 29 .216p> 그 의지는”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無를<니체 ; 도덕의 계보학 >”
의욕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의미로 합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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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합일화 시키려는 의미로 볼 때
<인생의 기본 특징인 고뇌> -(제4권 57.)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개체의 손으로 과거가 되며, 미래는 불확실하고 또 언제나 짧다. 그래서 개체의 현존은 형식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현재가 죽어버린 과거 속으로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 즉 끊임없이 죽는 것이다. 373p”
는 雲門禪師의 日日是好日과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나는 미래의 완성은 현재에 있으며 과거란 현재의 그림자라고 생각하는데
순간으로 지나가 버린 과거는 오늘 죽음으로서 마침표를 찍고,
의지에 의해서 연속되는 의욕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다가오는 현재에 완성하게 되는 것이므로 매일매일이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 고뇌는 인생에 있어 고유한 것이고, 외부에서 우리에게 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고뇌의 샘을 모두들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하는, 쓰디쓴 약과 같은 인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381p”
있지 말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390p <제4권 59 개개인의 역사는 고뇌의 역사>”
고 인정하며 의지로 인한 욕망의 표상은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고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표상에 따른 맹목적임이 의지라고 하는 해석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구속하는 것 역시 자신에게 있고
그 것이 無를 지향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참 자아이므로
구속이라던가 맹목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그 뿌리인 의지 – 표상에 반하는 의지가 아닌 –를 바깥에서 구하는가 아니면
인간행위의 규범으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보는 뿌리인 의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Neti Nety Atma. Tat Tvam Asi이다”.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래서 이는 쓸쓸한 낙엽이 아니라 바람을 머금은 소나무 잎인 것이다
이 것을 회의적이고 허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의지라는 것은 없다고 보여지므로
인생이 고뇌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나 표상에 의한 의지의 구속을 해제하는데
초인이 필요하다던가, 종교의 힘으로 이기적 자아를 벗어나야 한다던가,
예술로 인하여 의지를 다스리라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본다.
쇼펜하우어의 비유대로
“괴테의 <감상주의의 승리>에 나오는 왕자가 현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외면하고는 자연을 모방한 무대 장치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114p”
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본인이 해석한 ( 원주인지는 모르겠지만 ..)
無에 대하여 '반야바라밀'이나 '인식의 피안'을 운운하였는데
그 반야심경의 도일체고액 度一切苦厄. 왜 苦厄이라고 할까가 의문이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이 고뇌이며 소망이 이루어짐은 순간이고
또 다른 소망이 생김으로 고뇌를 지속해야 하는 의지의 욕망이 고뇌라고 표현된다면
그 것은 그냥 色을 말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감정을 다 같은 질량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의 성취가 기쁜 것은 그 것이 항상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므로
고뇌 역시 항상 같이 한다면 그 것은 그냥 본질이다.
때문에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마 욕망의 성취 시간이 짧다는 것을 고통이 아닐까?
또한 照見五蘊皆空을 하기 위하여의 조건인 반야바라밀을 行心하는 것이 고뇌라면
고뇌이겠다.
산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정상의 위치가 달라 보인다고 해서
정상의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바라보는 관자재. 그래서 그것이 고액이건 무엇이건 그저 그것이라면
의지는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천국에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이 쇼펜하우어의 다른 책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내일은 다시 동양으로 가서 장자를 들여다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