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혁명과 반역 - 풀빛 18
H.마르쿠제 / 풀빛 / 1984년 3월
평점 :
품절
2012년 1월 42번째 다보스포럼)에서도
첫날 주제로 ’자본주의 위기‘라는 토론 제목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포럼에 참석중인 미국의 사모펀드 칼라일그룹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회장은
자본주의 종말론까지 제기하였다.
그는 “서구 경제모델을 3, 4년 내에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게임에서 질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라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역사는 진실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117p
다음의 논의를 위해 고전적 발언을 명시해 두고자 한다.”자본주의의 압도적인 <富>가 자본주의의 붕괴를 야기시킬 것이다, (소비자 사회)는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이며, 그 무덤이다.” 76p
왜냐하면 다음의 혁명은 여러 세대에 걸친 관심사일 것이고,”자본주의 최후의 위기”는 거의 한 세기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184p
누가 이긴 것일까?
서구 중심의 세계경제 흐름은 이후로도 계속 지속될까?
경제에 대한 지식은 현실에서 家無擔石인 것처럼 빈약하기 그지없어 알 수 없지만 그런 문외한도 예상해볼 수 있는 ‘미래는 바뀔 것’이라는, 어쩌면 바램일지 모르는 생각은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기본적 욕구 이상의 ‘과잉’ 욕구의 발전과 확산 속에서 자본주의가 완숙하여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본의 위대한 역사적 역할은 잉여노동의 창출이다. 잉여노동이란 사용가치와 단순한 생존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분의 노동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생활필수품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노동 이상의 과잉노동이 개인적 욕구에 의해서 야기된 보편적 욕구가 될 정도로 욕구수준이 발전되는 순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엄격한 규율이 각 세대를 근면하게 가르쳐서 이러한 성질이 새로운 세대의 일반적인 속성으로 될 때, 자본의 역사적 역할은 완수된 것이다. 85p 반혁명하의 좌익(반혁명과 반역)
그저 오르면 내려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는 속담처럼 자본가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부의 요소가 바닥이 나는 그런 시기가 도래하거나, 그러기 전에 1968년의 봄이나 최근의 1%를 반대하는 99%의 모임처럼 인류 스스로의 자정적 흐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식의 빈약함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올 희망을 기다림으로 대신하는 것이랄까?
자유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관계는 다음의 문장으로 가장 간략하고도 분명하게 정식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두려워하지 않을 때의 유산계급이 보여주는 모습이며, 그들이 두려워할 때는 파시즘이 나타난다. 91p
자유주의를 빙자한 파시즘! 지금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과거의 파시즘 역사로 되돌아가길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끝없는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동만이 개인의 행복 목표라는 것을 세뇌시키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당근을 만들어 낼 궁리를 어디선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구 북반부의 부를 위하여 남쪽의 세계를 모조리 파헤친 다음에는 그들은 아마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낼지 모르겠다. 테러라는 이름으로? 빈곤 퇴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20세기 초반의 역사가 가난했을까? 빈부의 차이에 대하여 비교를 할 수 있는 우리 실정에 맞는 경제적 통계가 있었을까? 그 시기, 전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지금에 비하여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貧困國이라는 명칭은 서구의 일방적 시각 아니었을까? 그들이 던져준 초콜릿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을까? “즉, 미국은 형식적으로 제3세계의 정치적 독립을 묵인함으로써, 경제적인 침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신좌파의 상상력 188p>” 그렇게 반복하기 위하여 서구는 또 다시 혁명이라는 독을 풀지 않을까?
The Imagination of The New Left
"역사는 자신을 반복할지 모르지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264p
3. 프랑스의 신좌파
1968년 5월 “最後의 자본가가 최후의 관료의 창자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인류가 해방될 수 없다.< 이 구호는 <<국제 상황주의자>>의 것이다. 소련 공산당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내렸다>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최후의 관료의 목을 매달 때까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35p
섬뜩한 구호이지만 자극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는다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상호주의인가. 자본가와 관료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문장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본가는 최후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를 쥐어 짜고 있으며, 관료는 자신의 편의와 체면을 위하여 여러 가지 당근으로 시민을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5.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
이론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기초 작업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론적 분석이 제공해 준 통찰력을 역사적 실제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는”집단적 지식인”이 없다면, 이론은 실천에서 유리된 채로, 이성은 감성에서 분리된 채로, 그리고 에로스와 로고스의 통일은 깨어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이 존재할 때에야, 조직화의 문제가 생기 넘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429p
집단적 지식인!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제도에 편입하여 구조적 틀을 마련하고자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주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전혀 사적이거나 수직수평적인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집단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인간이므로 그것이 가능할까가 의문이다. 의견통합에 있어 타락과 부패에 가까울 수 있는 감성적 인간을 제외하고자 요즘 유행하는 SNS를 기반으로 하는 통합시스템을 만들어서 시행한다 하면 그것은 탈 인간화이므로 모순일까?
“싸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존재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 완전한 자유인이고 상황 속에서만 실존하기 때문에, 100% 순수한 학문도, 예술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침묵조차도 상황 속에서 무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참여의 형태를 띤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싸르트르적 지식인상과는 달리 푸코는 다소 소박한 ‘특정한 지식인’ 상을 제시한다. 후자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신의 특정한 분야에서 습득된 전문지식을 무기로 사회 비판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일반적인 지식’으로 무장하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을 두고 있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두 모델을 조합한 ‘집단적 지식인’상을 주장하는데,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지식인 ‘앙가쥬망’의 당위성은 인정하나 사회투쟁 현장에 함몰되어 지식인의 지적 활동이 운동의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며, 또한 지적 전문성은 인정하되 이에 따른 고립을 피하고 사회참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 뜻을 같이 하는 지식인들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길현 ; 부르디외와 프랑스지식인들>
6. 신좌파의 합리성
이른바 실제 세계는 진리가 있을 장소가 아니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그 자체의 이미지에 부합되게끔 진리를 쪼개는 것이다. 물리학은 이른바 객관성을 부여 받지만, 인간적 내용을 결여하게 된다. 인문학은 인간적 내용을 보전하지만, 진리를 희생시킨 이데올로기로서만 그 내용을 보전하게 된다. (호르크하이머) 503p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가 그리스어 ou-toppos 라는 말을 결합하여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했다지만 “없다”는 뜻으로서 존재를 희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 나의 시간과는 관계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