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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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쟁이 두 차례나 지나갔고 서양의 침략에 맞서던 동양의 나라들은 그들이 전쟁을 치르느라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라고 해도 좋다.

결국 각국은 전쟁과 침략에서 벗어나 피폐해진 국민들의 삶의 질과 경제적인 부를 누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누가 먼저 상처를 딛고 일어났는가는 그 나라의 과학의 힘이 아니었을까 한다. 과학이 한편으로는 전쟁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문명을 이루어낸 것도 사실 아닌가?

 

독일이나 일본이 패전국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할 수 있는 이유는 전쟁의 재료인 과학의 발달과 그래도 한때 이긴 했지만 타국을 점령했다는 몹쓸 자만심이 있었기에 다른 나라보다 빨리 일어설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기를 반세기가 지나 과학은 눈부시게 경이적인 속도로 발전하여 보다 많은 것을 발견하였고

보다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보다 빠르게 편리하게 이동하는 사물을 만들었으며, 급기야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로 세상을 시공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개념으로 축소시켜 놓았다.

 

그런데도 아직 그러한 세계화에 소외되어 있는 것은 종교와 지역 문화가 아닐까 한다.

지역 문화는 그 자체로 삶이므로 섞일 수는 있으나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다양화라는 방패가 스스로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종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을 쫓자니 근본이 무너지는 듯하고 무시하자니 자꾸만 새로운 학설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증명해내고, 그러다 보니 기성종교는 약해지는 한편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는 상황을 막아내지도 못하는 것 같다.

 

과학과 종교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어느 쪽도 더 강해지지 못했다.

이 싸움은 그저 쌍방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을 뿐 대중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종교의 기반은 과학의 기반보다 훨씬 크다.)그렇다고 해서 이 문화적 전쟁이 지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중략 - 70억인류가 모두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과학을 진보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은 백신을 접종하고 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고 탄소세를 보전하는데 필요하지, 이런 일들에 역행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기성)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 종교가 진실을 제시하면서도 여기에 대한 의문제기는 차단한다는데 있다.. 심지어 응징하기까지 한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이런 독단을 가지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서문>Adam Bly

 

그렇게 존재의 불안을 느낀 근본주의자나 문자주의자들은 아이들의 공교육에도 관여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닐까? 결국은 과학을 접하게 될 것이고 과학의 근본은 진실이 아닌 것을 밝혀내는 것이므로 의문을 하게 될 테니 참으로 과학에 접근하는 자라면 어렸을 적에 들은 이야기들은 그대로 신화화 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다만 근본적인 신념에 빠져있다면 그 과정에서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겠는가?

 

 

Trivers - 그러니까 적어도 두 가지 맥락에서 자기기만을 말씀하시는군요. 하나는 지식층으로, 교육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속은 개체가 되어 소수의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설득과 기만을 전문으로 하는 대규모 산업으로, 이들도 대중을 무지 또는 자기기만으로 이끌어서 결국 조작 당하고 있을 뿐인데도 대중 스스로는 진실을 안다고 믿게 만드는 집단이지요. <전쟁과 기만> Noam ChomskyRobert Trivers의 대화 중 /Science is Culture. Editor Adam Bly 동아시아 출판2012.12

그러한 어렸을 적부터 가르쳐온, 배워온 세상사는 법은 양면성을 가진 사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 아닐까? 그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도나 규율에 의하여 자기기만이나 합리화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으므로 이런저런 학자들도 아무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과학은 수많은 난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 가면서 존재를 증명해가니 언젠가는 수천 년간의 궁금증을 해결해 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완전함이라는 것은 없을지라도 말이다.

 

Gazzaniga - 그러나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악이 저질러졌을 때 인간이 이를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려워 집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어쨌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죠, 이렇게 되면 사람은 악순환에 빠지고 응징이라는 반응의 본질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의문과 정면으로 마주 섭니다. “인간은 스스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가? (자유의지 Tom WolfeMichael Gazzaniga의 대화 중

 

그런 자유라는 말과 개념 때문에 사람은 인류로 분류된 이래 지금까지 수 많은 이념과 가치에 대한 대립으로 살아왔다고 보고 싶다. 그러나 이제 자유라는 것이 과학에 의하여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하게 되고 있음을 증명 받게 될 날이 다가올 것 같다.

인간이 순전히 자유의지로 움직이는지 데카르트처럼 다른 무엇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지 알 수 있거나 과학적 또는 수학, 문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고 보는 학문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뇌신경과학분야에서는 인간의 뇌는 워낙 복잡해서 이해는커녕 상상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이 분야의 연구에서 몇 킬로미터 전진한 것이 아니다. 몇 센티미터를 움직였을 뿐이다라고 했다는데 안다고 말하는 것은 모른다는 말은 여기도 해당되어서 알면 알수록 모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몸이 유령을 담고 있는 기계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골드스타인- 데카르트는 의식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분리해냈습니다. 여기까진 좋았죠.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론적 결론을 끌어내는 바람에 비웃음을 샀습니다. 의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걸림돌이 있음을 간파한 데카르트는 의식이 몸 속에 있지 않다는 추론을 내놓았습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경험의 주체는 몸과 동일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철학자 Gilbert Ryle이 명명한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개념이 도입됩니다. 의식의 문제 Steven Pinker Rebecca Goldstein의 대화

 

22편의 대화록에서는 깊은 의미를 나누기에 너무 짧은 구성이 아니었나 싶다.

각자의 대화록 한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낼 수도 있었겠지만 기획자 아담 블라이가 자신이 창간한 잡지에서 대담 식으로 엮은 것이니 더 궁금한 것은 대담 자들의 책을 따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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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
안드레아스 바그너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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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면 주인공들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던 상황을 전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 장면들 중에는 미래의 지구에 대한 화려한 그래픽도 보여주지만 20세기를 표현하는 시대에서는 에너지문제를 다루는 주인공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석유만이 세상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것을 주장하는 석유기업이 당 시대의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역이용하여 원자력발전소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파헤치는 기자의 이야기가 삽입되어있다.

그들은 연기론과 윤회의 섭리에 의하여 몇 백 년 후에 음모를 파헤치던 기자는 문명이 파괴된 지구에서 꿈의 행성 Atlas로 안내하는 메로님으로 석유기업의 회장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부족인 코나 족의 우두머리로 윤회의 생을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는 karma를 통해 권선징악의 윤리적 세계관을 표현하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왜 전생과 이승이 연결되어야 할까이다.

윤회의 의미는 육도윤회(六道輪廻)라하여 여섯 가지의 생을 거듭하는 것이라지만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향상(向上)과 향하(向下)가 가능할 뿐이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이 강조된다고 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남의 일과 내일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 죽어서도 쌈질만 해댄다는 아수라도(阿修羅道)를 가던 지금의 통증 정도는 어림없다는 지옥도(地獄道)를 가던 밥만 먹으면 소파에 드러눕는 바람에 소가 되어 축생도(畜生道)를 가던 자기의 여하간의 선택에 달려있다라는 것일까? 그 여하간이란 살아서의 절절한 사연이 원인과 조건이고?

 

그런데 어느 도를 가던 영원이 없이 언제인가는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저승으로 옮겨가는 순간 이승으로 입장이 바뀌게 되므로 이승의 세상만을 살아가는 것이라 우겨도 되겠다. 즉 이세상의 문을 열고 나가 저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과정. 그것은 그저 전생과 현생,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는 것일 뿐, 보편적인 생과 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고 우겨도 되겠다.

 

어쨌든 그 영화 속의 Halle Berry가 맡은 역의 인생들과 Hugh Grant가 역할을 했던 인생들은 각자의 시공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가면서 살고 있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선과 악의 관점에서는 대립되는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기자로서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파헤쳐 진실을 알리고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과, 석유기업가로 회사 운영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그것이 틀리든 말든, -보통 기업인은 일반인과 달리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도덕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위해 헌신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말이다.

 

그러나 서로 치명적인 것들조차 궁극적으론 운명적으로 연계되어있다. 바로 이것이 자아와 타자의 역설의 핵심이다. <102p>

영화에서처럼 가상의 세계에서 그려진 은유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 주변에는 모두 모순으로 엮여있는 것 같다. 윤회라던가 심판이라던가 하는 종교적인 주장을 따르지 않아도 내가 하는 행위는 어디에서 누구에게로든 어떤 형태나 관념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회 속의 나일 것이다. 아니 사회 안에서의 형태가 아닌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는 혼자 있을 뿐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회성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는 제도를 규율을 요구하지만 인간 개인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유를 원하는 인간이라면 그는 자유 속에 있지 않은 것인데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국가등과 같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양식에 대한 구속과 이에 따른 기회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헌신과 구속은 기회를 낳고, 그 뒤에는 자유가 뒤따른다. 그런데 자유에는 구속이 필요하다.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는 벗어날 그 무엇(즉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한신과 구속을 창조한다. <203p>

 

이것은 본인이 그렇게 원하든 아니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의지와 관련 없이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것이 어쩌면 구속에 대립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의 자유라는 말이 아닐까?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형태가 아닌 능동적인 형태로의 의미로서 자연과 일체화되어 살아가는 개념이 자유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거의 알아채지 못하지만, 자유의 역설은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존재한다.

자유의 역설은 모든 사회의 초석, 요컨대 다른 사람, 회사, 혹은 정부에 대한 한 사람의 약속인 구속력 있는 계약 속에 담겨있다. 자유의 역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는 취소할 수 없는 모든 약속에 존재한다. 자원입대나 대출 같은 쉽게 취소할 수 없는 선택이 자유의 역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자신의 생명을 끝내는 선택이다. 따라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자살을 유일하게 심각한 철학적 문제라고 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337p>

 

그런데도 스스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살을 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과론에 익숙해 있어서, 즉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 같은 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

종교적인 관념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지금의 생에서의 자신과 사회의 접촉되는 수많은 모순 속의 난제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선과 악, ()과 부정(不正), 시시비비에 대한 것들.

그리고 요 근래의 경우처럼 선거에서 상대들이 서로에게 해대는 이념의 대립.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꿈꾸면서 선거도 하고 투표도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닐까? 찬성하는 자가 있었다면 반대하는 쪽도 있을 테니 완벽한 어느 한 쪽은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천년동안 서구 철학사를 지배했던, 그러나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모든 철학적 논쟁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토대가 갖고 있는 역설적 성격과 결부된 하나의 굳건한 확신, 즉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철학적 논쟁의 대척 점에 선 어느 쪽도 자신의 굳건한 입장이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타자에 대해 자아를, 부분에 대해 전체를, 정신에 대해 육체를, 의미에 대해 물질을 앞세우거나 그 반대 입장에 서면서 다른 쪽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게 맞더라도 이 두 입장 중 하나가 진리라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예측에 산다. 그리고 죽는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모든 유기체가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칙의 한 파생물이다. <259p>

 

처음의 이야기에서 이승과 저승이 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인가의 의문을 패러독스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그 동기와 결과를 가진 존재로서의 시작이라면 그 존재로서의 결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거나 선택하도록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형태나 개념으로의 서로 대립적인 존재가 세상을 존립하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폴 엘뤼아르의 시가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적합한 것 같다.

마지막 부분만 옮긴다.

나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

그게 누구든

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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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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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상하려 했던 내용은 사실 이렇다.

Necker cube

 

이 정육면체가 어떻게 보이는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머릿속에 있는 뇌가 시각신경에 의한 연결에 따라 결정해서 보내는 대로 결정할 뿐이다.

인간 주변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사람은 자기 관점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라는 말은 인정할 수 있어도 유일한 진리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은 보편적 인간으로의 역할을 요구할 뿐이지 개인적 인성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긴다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게 인간은 그런 모순 속의 세상에서 보편적 진리에 맞추어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개인적 인성을 고수하며 살 것인가로 늘 고민하며 지낸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던 그것은 개인의 일이고 개인의 능력이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성질이 어떻게 조합 되어있는가에 따른 문제이므로 어쩌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노력을 하건 그것은 어찌 보면 이미 정해져 있는 결정론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론을 따르던 예정설을 따르던 그것을 따르도록 한 것은 이미 타율에 의한 판단이라 생각될 수 있기에 무엇을 따르던 그 결과로 어떤 결과를 인식할 수 있는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는 말이다.

또 만약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미리 예상하거나 결정하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판단한 내가 실행하는 나를 의심하고 거역하였으므로 그것 또한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시 나는 책임이 없다.

 

과학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신비를 풀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결국은, 우리가 풀고자 하는 자연의 신비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막스 플랑크-“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런 과정과 끝나지 않을 모순을 상상하는 것을 끊음으로써 만나게 되는 거울 속의 존재가 나이다.

 

뭐 이런 어설픈 흉내나 내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상상력이란 수많은 시간 동안 인간의 세상을 물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풍부하게 만든 인간만의 능력이다.

그 능력 중에는 예술적인 것이 특별히 인간의 역사 속에 남아있는데 그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었다.

나는 요즘 흔히 말하는 정치적 좌파나 휴머니스트 내지는 환경론자도 아니고

반미를 외치는 반미주의자나 정운이 같은 애들에게 경례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그냥 어떻게 하면 멋진 건물을 하나 지을까 고민하는,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한 쥐뿔만한 돈도 없는, 한때 잘나갔던 적이 있었던, 자본주의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입었던, 촌놈일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미국을 비난하는 듯한 말을 한다거나 정치적으로 무슨 대단한 책략이라도 있는 듯한 주저리를 떤다거나 환경애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저 눈 앞에 보이는 상태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미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깡패 같은 잘난 척이 싫을 뿐이고,

분명히 잘, 행복운운하며 어울려 살 수 있을 텐데 어울리지 않으려는 북쪽의 3대가 한심스럽게 생각될 뿐이며, 먹고 산 일이 개발업이었지만 어느 비 온후 맑게 개인 날 황톳길에 파인 조그만 웅덩이에 비친 햇살을 보고 싶어 콘크리트로 모든 땅을 덮는 것은 아니다 싶은 정도의 환경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요즘 개발업이 정말 게 발인지라 도통 앞으로 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삐딱하게 좌우로 흔들거리는, 마치 술에 취해 앞으로 두 걸음 걷고, 뒤로 세 걸음 걸어 도통 앞으로 가지 못하는 주정뱅이의 모습이라서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던 터에 이런저런 책 속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나만의 도시개발을 하는 상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흐르고 만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나만의 도시개발의 꿈은 언제인가 했었던 서울의 재개발 상상을 조금 더 진전시켜보는 것이다.

그 때 생각했던 서울을 구분시켜 나누는 상상은 지금도 유효한 구상으로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도시와 도시의 중간 단계라 할 수 있는 벨트가 희미해졌으므로

도심과 도심의 연결로 커다란 원을 중첩시키는 구상을 해본다. 그 프로젝트 시안 만들 때 많이 그려지는 다이어그램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왔던 개발의 방법은 이제 앞으로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적인 개발이 아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개발이었기에 부작용이 너무 많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앞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서이다.

개발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설정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굳이 경제적, 산업적, 등의 커다란 agenda 를 세우지 않더라도 사회던 나 자신이던 이득이 있어야 하는데 나 자신이 개발을 통해 얻는 이익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방법을 택하는데 있어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타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의 개발도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 있어 각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합의를 하거나 협정을 맺거나 하는 것은, 가령 그것이 ESS라는 의미로 안정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개인이 전원 의식적으로 미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협정마저도 그 협정을 지키지 않으면 단기간에 있어서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우세하게 될 위험을 갖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가격 협정일 것이다.. <이기적유전자127p”> 

어울리는 인용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행위 동기 어디엔가는 분명 종족에게 이로운 행동을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서 붙여 보았다. 하지만 Necker cube처럼 관점에 따라서는 이렇게 보는 자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국은 자신 말고 누군 가에게도 이득은 줄 수 있다고 본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선의나 순진함을 이용하면서 그들이 기울인 노력에 무임승차하거나 아니면 혼자 독점해서 훨씬 큰 이익을 얻으려 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3차 산업혁명; 307p

 

어쨌든 시들해진 개발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어 세상의 흐름에 소외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개발의 방향을 상상해본다.

전에 생각한 것처럼 서울이라는 도시는 매력이 없다.

그저 세상에 널려있는 수백 개의 대도시중에 하나일 뿐 서울이라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600년이 넘는 古都인데도 고도의 흔적은 궁을 빼고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으니 휘황찬란한 불빛의 도시를 보고자 한다면 중국의 신흥도시가 더 어울릴듯하다.

 

3차 산업혁명 마스터플랜의 바탕은 주거 공간에 관한 혁신적 구상이다. 앞서 설명한 것을 다시 환기해 보자. 새로운 에너지 체제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와 만나면 공간에 대한 사고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독일 심리학자들은 이것을”Gestalt 변화라고 부른다. 1차 사업혁명은 밀도 높은 수직형 도시를 선호해서 마천루를 세워 하늘로 솟아 올라간 반면 2차 산업혁명은 지방을 분산해 교외 지역을 개발하고 선형으로 밖으로 뻗어나가는 수평형 공간을 이루었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은 이제 완전히 다른 지형을 가져온다. 우리 개발팀은 기존의 도심과 교외 공간을 하나의 생물권 안에 포함하는 마스터 플랜을 만들고 있다. 수천 개의 생물권 지역이 제각기 3차 산업혁명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교통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결국 대륙 전체를 잇는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중략 문제는 그 규모다. 우리는 인구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도시 환경을 개발할 방법이 무엇인지, 에너지와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오염을 줄이며 인간적 척도에 맞는 주거 설비를 육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119p ~ 123p>

 

얼마 되지 않을 시간 안에 분명 세상은 책에서 계획하는 S.F영화속의 도시처럼 될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 우리는 분단이라는 현실 때문에 섬처럼 고립되어서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어려운 것 아닌가 했는데

부분적이나마 우리나라도 저자가 주장한 미래형 에너지 사업에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내년부터 ESS 실증사업 착수…2017년까지 3035억원 투입”

이제 임기가 다 되가는 정부에서 녹색사업 운운하면서 강바닥 파기나 자전거길 만드는 것을 홍보하지 않고 저 계획을 홍보하고 더 많은 투자를 했더라면 그는 인왕산에 올라가 자책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부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투자를 계획하였다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업은 저자의 주장처럼 일자리가 가장 많이 창출되는 건설업의 변화일 것이다. 상황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우리의 현실이지만 20년의 세월이라면 그리 어두운 전망도 아니라고 본다.

다만 과거의 방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오는가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서울은 아주 획기적인 방식이 아니면 건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념이 경제보다 우선하는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만약 내 상상대로 할 수 있는 꿈의 차원이라면 나는 먼저 서울과 도심의 주요 부동산을 모두 매입할 것이다.

집산주의로 비추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에게는 어울리는 미래를 제공해줄 것으로 생각되어 토지 및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행한다.

그 후 서울이라는 도시를 순환개발의 방법으로 재구성한다.

 

 

 

붉은 색의 종로구를 먼저 모두 국유화하여 책 속의 로마의 경우와 같은 방식으로 600년고도의 모습을 되살린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의 변화도 생성한다. 아마 태양광이 좋을 듯하다.

다음으로 노란 색의 고층빌딩을 개조하여 풍력과 지열과 태양광을 이용하는 White Color를 주로 하는 금융산업 구역으로 재편하고, 강북의 3구역은 주거구역으로 하며 협동조합의 형태의 공공생산 시설을 구비하여 은퇴세대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공간을 각 한 곳씩 구성한다.

강남의 나머지 3구역도 마찬가지로 볼로냐의 coop과 같은 형태의 제조시설을 만들어 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재편한다.

붉은 공간의 재편방향은 고도로서의 회복을 모색하여 19세기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

숙박시설과 상업시설은 강북의 3곳은 숙박 중심으로 강남의 3곳은 상업시설을 주축으로 구성한다. 중심 원의 구역에서 이동은 탄소배출을 하지 않는 소형 전기 자동차를 이용하도록 한다. 소유주는 시로 하고 시내에서의 이동만 하도록 하는 rental 시스템을 도입한다.

 

서울의 외곽에거나 도심의 외곽에서 도심으로의 진입할 때는 탄소를 배출하는 차량의 진입은 할 수 없도록 하며 물류의 이동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차를 이용하여 중심의 종합물류기지로 이동시키고 거기서 다시 전기를 사용하는 이동장치로 이용한다.

배달의 왕국이니 가정으로의 배달은 그때가 되면 수소전지를 사용하는 이동장치가 대중화 된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강남의 노란 구역은 풍력에너지를 사용하는 구역으로 사용가능 하도록 건축물의 높이제한을 폐지하여 영화 “Judge Dredd(Dredd 2012)”에서 나온 Mega City와 같이 구성해도 좋을 것 같다.

영화에서처럼 초 대형 건축물을 도심의 중심 원 구역을 제외한 지역에 한 곳씩 건축하여 구역 내 주민의 모든 노동과 주거생활 유흥활동 등을 가능하도록 구성한다. 그 건물은 지열에너지까지 모든 에너지를 직접 생산 가능하도록 해도 될 만큼 크고 깊게 건설한다.

 

Jeremy는 내 생각과는 달리 도심 재개발의 수준으로 이미 많은 성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 도시들 중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도시는 모나코였다. 영화아이언 맨2”의 자동차 경주를 하는 그 도로에서 청정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들이 경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라고 한다. 또한 책에서는 미국이 유럽에 비하여 화석에너지에 집착하는 이유가 석유상의 압력과 로비에 <아마도 그들은 탄소배출 감축의 효과나 기후변화에 자기들은 선택 받은 나라라고 굳게 믿고 있는 탓인 것 같다.> (227~229p)미국에서보다는 유럽에서 많은 성과를 이룬 것으로 되어있다. 그 책은 마치 긴 사업계획서를 읽는 듯 하였다. 아주 확신에 찬…….

 

어쨌거나 그의 의견대로 서울에서의 구성을 그대로 그의 표현대로 Grid 화하여 경기도의 신도시로 연결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오히려 서울보다는 LH공사가 소유한 경기도의 택지가 사업을 하기에 더욱 끌리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미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 남쪽의 경우보다는 아직 손도 대지 못한 경기 북부의 신도시 예정지에 그와 같은 도시를 건설한다면 좋을 것 같다.

가령 서울과 가까운 양주시의 경우 2~3군데의 예정지가 비어 있는데 그 곳은 청정 에너지를 사용하는 주거공간을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사계절 내내 태양광을 받기 아주 좋은 지형이며 서울에서 나오는 부산물 에너지를 변화시켜 바이오 메스 에너지로 사용하기에도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춘 것 같다.

 

과거의 개발방식대로라면 무조건 용적률이나 건폐율, 그리고 분양 우선성을 따져 공장에서 찍어낸 콘크리트 월을 사용하여 똑 같은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겠지만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조건을 갖춘 그 지역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하고 싶다.

그래서 북쪽과 동쪽으로 산이 둘러 쌓여 남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그 지역은 늘 생각하고 있는 영국의 전원도시 Letchworth , Hertfordshire, England,와 같은 형태로 계획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양주 시는 지리적 위치가 경기 북부지역이라서 주거지역으로서는 기피하려는 의식이 있지만 그러하기에 기타지역과 동일한 방법으로 계획을 하지 않는 것이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재료를 갖게 된다고 하겠다.

원가의 30%를 차지하는 것이 적당한 토지 매입비용의 문제를 생각해도 경제적이라고 본다.

거기에 에너지 자급도시로 일정기간이 지나면 에너지를 인근 지역으로 팔 수도 있다니 커다란 이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이니 저 토지 전체를 매입하기도 어렵고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양주시나 LH공사를 접촉한다 해도 누가 귀 기울여줄까마는 몇 군데 남지 않은 주 도심지역과의 기반시설 조건을 생각할 때 경기도의 남쪽에 병풍처럼 서있는 그런 건물들로 채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있다.

 

높게, 많이, 꽉 차는 도시개발이 그 동안의 추세였다면 이제 앞으로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와 같은 여유로움을 갖춘 Healing City를 건설한다면 침묵의 공포와 불안이 덮고 있는 요즘의 주택시장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을까?

 

책의 저자인 Jeremy Rifkin이 동양의 사상을 좀 더 많이 알았다면 그가 생각하는 경제와 3차산업혁명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대치될만한 글이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GDP를 재고하고 경제적 번영의 측정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생산성에 대한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엔트로피 부채를 인식하고 자연의 흐름에 맞도록 생산과 소비 균형을 맞추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 소유관계에 대한 개념을 재점검하는 것, 금융자본 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것, 시장 대 네트워크의 경제적 가치를 재 측정 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것, 지구 생물권의 작동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경제이론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325p

興一利不(흥일리불) 若除一害(약제일해)

이익을 주는 일 한 가지를 더 하는 것이 해를 주는 일 하나를 제거하는 것보다 낫다. 한 가지 일을 더 만들어내는 것이 나쁜 일 한 가지를 줄이는 것보다 낫다. 야율초재(耶律楚材)

 

책에서는 화석연료 사용의 정점이 이미 지났으며 이제 조만간 대체연료의 개발을 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과거 45천만년동안 5번의 멸종에 1번을 추가하게 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설명을 들어 암울한 전망을 말하다가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있는 희망을 구출하는 방법으로서 수소에너지의 활용, 그리고 자연이 주는 무한대의 에너지인 바람과 물, , 열을 이용한 청정도시의 건설을 구시대의 건물과 대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산업이 진화해나간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인류의 발전이나 청정연료의 사용으로 자연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하던 어떻게 하던 살아있는 지구는 이제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난제는 만약 지능형 기술과 로봇, 자동화의 적용으로 생산성이 증가하여 계속해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이 일자리에서 밀려나 한계 고용이나 실업상태가 된다면, 구매력이 감소해서 더 이상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스마트 기술이 계속해서 노동자를 대체하면 수입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생산된 제품이나 서비스는 누가 산단 말인가? 376p

이게 자본주의의 종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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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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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개념이 없을 때, 귀나 다른 감각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도 뭔가 뇌리에 스쳐가는 것이 감각을 깨울 때, 자신만의 정신적인 이미지와 감각과 개념을 형성하는 의지의 표현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상상력이니까 그야말로 상상으로의 여러 가지 다른 정의를 내리는 것도 각자의 느낌대로 재미있겠다.

성경의 창세기 2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라고 했는데 아담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이 상상력이었다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원죄란 상상력이 나태해진 대가로 잉태한 악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창조자의 세상에 갇혀있던 그는 무료함과 나태함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므로 자신을 창조한 신의 세상에 대한 무료함의 결과로 다른 세상으로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에 창조주의 세상에서 쫓겨났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인간이란 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만의 세상을 들켜버린 한정된 관점에 가두려는 틀 속의 창조물이었을 뿐이므로 신이 그를 버린 것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3: 22)때문이 아닐까? 그 후 인간이 원죄라는 틀에 갇힌 것은 인간이 신의 비겁함에 자신을 공포감으로부터 보호하려는 Facade로 악()을 이용했을 뿐, 인간의 온 정신과 마음에 선()을 담아 오로지 창조물로서의 인간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액(苦厄)이란 것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의 보상이 아니라 차안(此岸)에 대한 선한 상상력으로 인하여 피안(彼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상상력이란 인간의 무료함과 나태함에서 비롯된 산물이 아닐까 한다.

악은 현실적이고 선은 몽상적이다. 악은 눈앞의 절벽이고 선은 구름에 싸인 산봉우리이다.

비록 인간의 시점이 한쪽으로 향한 인간의 특성으로 그랬을는지는 몰라도 상상력은 인간을 고액과 원죄라는 칼을 벗겨낼 수 있는 Flaming Sword이다.

 

간밤 꿈에는 낯 모르는 사람과 구름 위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산 아래로 올라가는 Escher의 길도 만들고 나 자신을 내려다 보기도 하며 아니다 싶으면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하는(호접지몽(胡蝶之夢)) 선어(禪語)는 그야말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머리 속 뇌의 시냅스가 스스로 연결해 놓는 암호일 뿐이다. 자신이 연결해 놓는 뉴런의 암호를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는 꿈은 Blind에게 어떤 모양일까? Deaf에게 Led ZeppelinStairway to Heaven?

헬렌 켈러는 자사전에서 나는 관찰한다. 나는 상상한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상과 경험, 개념을 결합한다. 이 가공의 재료를 가지고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내가 표면과 떨림과 맛과 냄새들의 특질에서 이끌어낸 유사성은 보고 듣고 만져서 찾아낸 유사성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견디게 했고 눈과 손 사이에 놓인 간극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차단된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는 것은 유추적인 상상력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다.” “우리를 구속하거나 자유롭게 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유추를 통해 미지의 것들을 조명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임을 알게 된다. 학습은 유추에 의존한다.”(생각의 탄생; 에코의서재 p196~p197)

 

결국 어느 경우에도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개념으로 이미지화한다는 것 같다.

자신만의 상상.

굳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탓으로 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모두가 현자이거나 성자가 아니니 중용(中庸)君子(군자)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부도)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군자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경계하고 신중하며,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는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그렇게 자신만의 상상을 바탕으로 세상을 접하려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전자가 진화의 방법을 도킨스의 주장대로 원시 스프에서 자기복제를 통하여 결합을 하는 과정을 거치지(사회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문명은 이룰 수 있었을까?

좋은 자기 복제자가 되기 위한 더욱 세련된 방법이 서서히 발견되어 간다. 자기 복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세계에 대하여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 덕분에 살아 남는다. 이 결과는 매우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그 결과가 그저 얼마나 비비꼬이고 간접적이든 간에 피드백하여, 최종적으로 자기 복제자가 자기를 복제할 때의 성공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414p

 

동물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안다라는 주장처럼 그렇게 혼자이지 않은 것이 좋다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기에 인간 이하 모든 종의 화합이 지구의 표면을 덮고 아담은 그의 몫을 멋지게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만의 상상으로 세상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유추하고 감정 이입하여 통합 할 수 있는 자기 복제의 모방의 결합이거나,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인가 또는 이기적인 것이 결국 이타적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도 인간본연의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상상으로 세상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애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은 사회적이라는 보호막일지 감옥일지 모르는 틀 안으로 자신을 가두었다.

하지만 상상. 세상과 무한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그 상상력은 그 어느 것으로도 가둘 수 없다.

 

그러한 상상력.

상상력이 만들어 온 지금의 세상.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상상력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날카롭지만 현명한 고집스런 칼날을 넘겨준 신학자들에게 상상력은?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에게 감추어진 이미지를 증명하려는 과학자들에게 상상력은?

그런 여러 상상력 중에서도 어느 것이 가장 인간에게 발전적인 결과를 준 것이라고 선별할 수 있을까? 서열을 따지는 생활 속에 익숙해서 여럿이 모이면 줄서기부터 시키는 이 몹쓸 습관.

자신만이 최고라는 자존 감을 넘어선 자만심이 문제가 안 된다면 인간을 해부학적으로 연구하여 모델 없이 그림을 그려낸 예술가들. 그 인간이 행하는 육체적 능력을 벗어나려고 연구하는 과학자들, 과학이 인본적인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될 때 스스로 제약하고 나서는 종교적인 상상력. 그런 종교적인 상상력을 편협한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에 제동을 거는 인문학. 그런 것들이 세상을 만들어오고 있다.

그렇게 상상력은 세상을 이념으로 갈라 놓기도 하였고, 상상력을 통하여 가상의 공간을 넘어 현실에서 하나가 되기도 한다.

상상력은 때로 서로에게 칼이 되기도 하고 꿈을 실어 나르는 양탄자가 되기도 한다.

상상력은 기를 흔들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며 그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도 하고 상상력을 깨우고 끊기 위하여 애꿎은 고양이를 죽이기도 한다. 

그런 상상력이 거추장스러워서 푸른 호수의 상현달(水月音觀)은 수면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가부좌를 틀고 상상력을 끊어버린 것일까?

나 또한 어디론가 숨고 싶다.

상상력으로 넘쳐나는 세상은 자신만의 상상력이 세상을 위하는 유일한 능력이라고 우겨대는 통에 원형(圓形)을 유지하기 힘들다. 인간을 사회적이라고 묶은 것은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고 인간의 상상력에게는 있으나마나 한 경계의 선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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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평범한 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형편뿐 아니라 세상사 전반에 대해서도 숙고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특정한 지위를 갖고 태어나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일 뿐, 

당면한 현실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거의 들짐승만큼이나 본능적으로 순간순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선견지명도,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면 삶의 조건이 통째로 바뀔 수 있으리라는 통찰력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환경을 지키려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테고 

사회는 오히려 본인이 환경을 보존하려는 계층에 속한다고 믿고 싶은 사람의 수가 더 많을 것 같다. 

Robert Trivers는 자기기만 이론에서, 우리 정신은 자신의 능력을 이중으로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부터 속여 남들에게 더욱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무의식에서는 진짜 능력을 인지하고 스스로 그 현실에서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환경이 보존, 발전되어야 한다고 믿고자 하는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어쩌면 사회를 은밀하게 움직인다는보이지 않는 손이 범위를 정해 놓았을 것 같은 분류에 속하여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이 적용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중산층으로 보이고 싶어하면서 내심으로는 중산층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계층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구분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러셀이 말하는 선견지명이나 통찰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현실적 압박에 가로 막혀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많을 뿐이지…… 

그렇게 현실이 이상을 억누르는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누구에게나 비로서 세상의 고민이 보이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 시기란禮記(예기)≫ 曲禮篇(곡례편)에 구분한 것처럼 사람이 나서 10년을 말하여 ()라 하고 이때부터 글을 배운다. 

스물을 말하여 ()이라 하여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갓을 쓴다. 서른을 말하여 ()이라 하여 가정을 이룬다.

마흔을 말하여 ()이라 하고 사회나 국가를 위하여 관직에 나서는 벼슬을 한다.

쉰을 말하여 ()라 하고 비로서 정치에 나서 官政(관정)을 맡는다며 삶의 흐름을 정의하였고, 

《위정편(爲政篇)》에서 마흔까지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여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가 되면서 지천명(知天命)이라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聖人)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때가 그 시기로 세상의 고민과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만의 해결책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 전에는 보이고 들리지 않던 세상의 이러저러한 계층도 보이고보이지 않는검은- 도 보인다고 느끼곤 하며, 

귀로 듣는 미디어의 뉴스나 광고가 절반을 차지하는 신문들을 보면서도

“거대 신문사를 경영하려면 큰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요 매체의 소유주는 자본가 계급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들이 자기 계급과 다른 견해 및 전망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어떤 뉴스를 일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 뉴스를 왜곡할 수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뉴스 자체를 주의 깊게 선별하여 독자의 감정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극하거나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부조리를 알면서도 뭔가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그간의 세월 동안 세상에 복종하는 제도 속을 살아온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참하고 치사한 기간이지……

 

그런 강압적, 위선적, 특권층을 위한 제도나 프로파간다로 도배된 미디어를 지배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이들은 두꺼운 벽과 수많은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군중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군중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지나는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시민은 목소리를 높여 다양한 경로로 그들에게 변하기를 호소하였지만 무심했던 입법자들을 뽑게 되는 시기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행복하다고 떠들던 시기를 권력의 교체시기인 그때가 되면  그때서야 자신들에게 호소하던 시민이 보이는지 더 이상 불행한 시기를 살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거공약을 남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선거운동 당시의 열정과 공약은 다만 희미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표자들은 일부 집단이 품은 불만보다는 

이른바전체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것을 정치적 수완의 본질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란 실로 모호하기 때문에 사리사욕과 겹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국민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는 것도 이미 머릿속에, 행동 속에 주입되어 습관화 되었으므로 

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뭔지를 모르게 되고, 

그런 무력함은 

“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하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 받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도 

둔감해하며, 오히려 이중적인 정신으로 인하여 그러한 악행이 머지않아 자신들을 위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게 되는 것 같고, 그로 인해 교과서에서 주입된 교육이 현실과 많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보적일 수 밖에 없는 

젊은 인생들과 명석한 사리판단으로 이미 그러한 부조리를 알고 있던 개혁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구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다. 

본인은 애국적보수라고 믿고 있겠지만……

세상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그 고민의 덩치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입법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그 동안 몰랐던 것을 갑자기 다 알아버리는 것 같은 그 고민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미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되어 버려 육신을 갉아먹고 있는 암세포처럼 퍼져버린 자유의 압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생각하는 자유란 신체의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물론 신체의 자유마저도 우리에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세상의 아무 곳이나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의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있는가? 국가라는 경계선에 막혀 갈 수 없는 곳이 지구상의 국가에 얼마나 많은가!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마저도 허락을 받아 기간을 정해 놓고 가야만 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다른 시로 이사를 가고자 하여도 제도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제도가 나쁘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자유라는 것이 알게 모르게 그런 제도아래 묶여 있다는 것이다. 제도는 인간의 사회를 마찰 없이 움직이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약속이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오로지 홀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거기에 검은 손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을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맞다 나의 몸은 이념의 벽에 막혀서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 프롬 (Erich Fromm) 은 사람들은 많은 속박에서 해방되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얻게 되면 불안에 휩싸여 자유를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느끼게 되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권위자에게로의 복종을 필요로 하는 노예의식이 파시즘과 같은 정치체제를 원한다고 한다. 따라서 소극적인 자유에서의 도피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율이나 자치로서의 적극적 자유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로의 제도가 권력자에게는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아닐까?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빌붙어 자신의 자산을 늘리려는 자의 탐욕이 합쳐지면 갖은 방법으로 군중이 누리고 있는 통제적 자유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러셀이 말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자들의 세상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 생각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지쳐있는 무력한 삶을 사는, 또 자신의 무력함을 현실에서 소외 당하지 않으려 자기기만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불혹을 넘어 지천명도 넘어서면서 집단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자 비로서 자신을 보게 된 지금. 혼자서라도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세상으로부터 병에 걸린 컴퓨터를 치료해주는 바이러스로 인정 받던 어느 학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그 동안의 길에서 노선을 변경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바라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국가가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도가 자유를 통제하거나 자본이 자유를 속박하는 세상은 아니다.

정부와 법률은 본질 자체가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유는 정치적 미덕 가운데 으뜸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모든 미덕 가운데 최고라는 말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창조적 예술, 사랑, 사색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정치적 조건에도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유는 그 자체로서도 그리고 앞서 말한 다른 미덕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정치 및 경제가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덕이다.’

(5장 국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방법)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나 또는 폭압적인 전제주의 군주이거나 모두 입에 달고 있는 희망은 모든 국민이 잘 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순서에 있어서 어느 길을 따라가는가에 따라 이념이라는 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어느 이념이든 간에 단체가 구성되고 규모가 커지게 되면 모순에 닥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념이나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이 문제라는 것 아닐까?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가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 도구. 제작물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문화의 세계이며, 어떤 수준의 문명이라도 문화는 자연과 엄정하게 대립된다. 모든 인간은 말하며, 도구를 사용하며, 규칙을 지키면서 행동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제도를 먼저 생각하고 자유를 그에 복속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이전에 인간 스스로의 사회성에서 비롯된 문화가 있으며 규칙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사회성과 각 종족의 문화를 침해 당하지 않으려는 자율에 의한 것 아닐까?

자연과 대립적인 구조로 보는 것도 서양의 인식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연과 동화하는 것이 아닌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도 제도아래, 관습아래에 두고 통제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이며 살아오지 않았을 텐데 지금과 같이 되어버린 이유는 인간이 가진 외로움, 그 외로움에 대한 불안을 벗어나려는 정신의 박약함 때문에 스스로 포기한 것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거나 수천 년을 사람들은 자유라는 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정의하고 모든 인간이 동시에 같은 무게로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유를 누르고 있는 제도나 정부라는 완장을 찬 일부 탐욕적인 인간에 의하여 전체가 속고 있는 채로 또 5년을 외면하고 사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에는 그런 완장을 찬 사람들의 숫자가 백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틀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반 군중에게 자유와 노동과 자본을 가져가는 세력이 늘어남을 말하는 것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0 10 13일자 영국 에 실린 글과 Thomas Paine이 표현한 것이 그 시절, 그가 무엇을 꿈꾸었던 간에 그때나 지금 그 글속에 지칭한 세력이 달라졌는가?

 

사회와 정부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사회는 우리의 욕구에 의해 산출되며,

정부는 우리의 사악함에 의해 산출된다.

사회는 우리의 정서를 통합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긍정적으로 증진시키며,

정부는 우리의 악덕을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부정적으로 증진시킨다.

사회는 상호작용을 고무하며, 정부는 구별을 창출한다.

사회는 후원자이며, 정부는 처벌 자이다. 모든 상태의 사회는 축복이며,

정부는 그것이 설사 최상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필요악에 불과하다. (토마스 페인 상식 1776)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인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국가가 없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자리만 차지할 뿐 쓸데없이 건방진 정치인은 기껏해야 값비싼 사치재에 지나지 않는다.

(3장 국가 아닌 사회)

 

이번 선거에서는 본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북, 종북, 좌파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이념으로 몰아가는 세력이 사라지고 전통과 무절제한 개혁을 조절하고자 하는 사회의 힘을 보수라고 몰아가는 세력 또한 사라졌으면 한다.

 

처음으로 그는 浮世 고민이 자기 자신의 확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The Glass Bead Game (1942)   - Hermann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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