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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
안드레아스 바그너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면 주인공들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던 상황을 전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 장면들 중에는 미래의 지구에 대한 화려한 그래픽도 보여주지만 20세기를 표현하는 시대에서는 에너지문제를 다루는 주인공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석유만이 세상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것을 주장하는 석유기업이 당 시대의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역이용하여 원자력발전소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파헤치는 기자의 이야기가 삽입되어있다.
그들은 연기론과 윤회의 섭리에 의하여 몇 백 년 후에 음모를 파헤치던 기자는 문명이 파괴된 지구에서 꿈의 행성 Atlas로 안내하는 메로님으로 석유기업의 회장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부족인 코나 족의 우두머리로 윤회의 생을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는 karma를 통해 권선징악의 윤리적 세계관을 표현하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왜 전생과 이승이 연결되어야 할까이다.
윤회의 의미는 육도윤회(六道輪廻)라하여 여섯 가지의 생을 거듭하는 것이라지만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향상(向上)과 향하(向下)가 가능할 뿐이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이 강조된다고 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남의 일과 내일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 죽어서도 쌈질만 해댄다는 아수라도(阿修羅道)를 가던 지금의 통증 정도는 어림없다는 지옥도(地獄道)를 가던 밥만 먹으면 소파에 드러눕는 바람에 소가 되어 축생도(畜生道)를 가던 자기의 여하간의 선택에 달려있다라는 것일까? 그 여하간이란 살아서의 절절한 사연이 원인과 조건이고?
그런데 어느 도를 가던 영원이 없이 언제인가는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저승으로 옮겨가는 순간 이승으로 입장이 바뀌게 되므로 이승의 세상만을 살아가는 것이라 우겨도 되겠다. 즉 이세상의 문을 열고 나가 저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과정. 그것은 그저 전생과 현생,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는 것일 뿐, 보편적인 생과 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고 우겨도 되겠다.
어쨌든 그 영화 속의 Halle Berry가 맡은 역의 인생들과 Hugh Grant가 역할을 했던 인생들은 각자의 시공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가면서 살고 있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선과 악의 관점에서는 대립되는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기자로서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파헤쳐 진실을 알리고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과, 석유기업가로 회사 운영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그것이 틀리든 말든, -보통 기업인은 일반인과 달리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도덕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위해 헌신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말이다.
그러나 서로 치명적인 것들조차 궁극적으론 운명적으로 연계되어있다. 바로 이것이 자아와 타자의 역설의 핵심이다. <102p>
영화에서처럼 가상의 세계에서 그려진 은유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 주변에는 모두 모순으로 엮여있는 것 같다. 윤회라던가 심판이라던가 하는 종교적인 주장을 따르지 않아도 내가 하는 행위는 어디에서 누구에게로든 어떤 형태나 관념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회 속의 나일 것이다. 아니 사회 안에서의 형태가 아닌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는 혼자 있을 뿐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회성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는 제도를 규율을 요구하지만 인간 개인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유를 원하는 인간이라면 그는 자유 속에 있지 않은 것인데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국가등과 같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양식에 대한 구속과 이에 따른 기회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헌신과 구속은 기회를 낳고, 그 뒤에는 자유가 뒤따른다. 그런데 자유에는 구속이 필요하다.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는 벗어날 그 무엇(즉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한신과 구속을 창조한다. <203p>
이것은 본인이 그렇게 원하든 아니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의지와 관련 없이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것이 어쩌면 구속에 대립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의 자유라는 말이 아닐까?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형태가 아닌 능동적인 형태로의 의미로서 자연과 일체화되어 살아가는 개념이 자유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거의 알아채지 못하지만, 자유의 역설은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존재한다.
자유의 역설은 모든 사회의 초석, 요컨대 다른 사람, 회사, 혹은 정부에 대한 한 사람의 약속인 구속력 있는 계약 속에 담겨있다. 자유의 역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는 취소할 수 없는 모든 약속에 존재한다. 자원입대나 대출 같은 쉽게 취소할 수 없는 선택이 자유의 역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자신의 생명을 끝내는 선택이다. 따라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자살’을 유일하게 심각한 철학적 문제라고 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337p>
그런데도 스스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살’을 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과론에 익숙해 있어서, 즉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 같은 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
종교적인 관념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지금의 생에서의 자신과 사회의 접촉되는 수많은 모순 속의 난제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선과 악, 정(正)과 부정(不正), 시시비비에 대한 것들.
그리고 요 근래의 경우처럼 선거에서 상대들이 서로에게 해대는 이념의 대립.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꿈꾸면서 선거도 하고 투표도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닐까? 찬성하는 자가 있었다면 반대하는 쪽도 있을 테니 완벽한 어느 한 쪽은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천년동안 서구 철학사를 지배했던, 그러나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모든 철학적 논쟁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토대가 갖고 있는 역설적 성격과 결부된 하나의 굳건한 확신, 즉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철학적 논쟁의 대척 점에 선 어느 쪽도 자신의 굳건한 입장이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타자에 대해 자아를, 부분에 대해 전체를, 정신에 대해 육체를, 의미에 대해 물질을 앞세우거나 그 반대 입장에 서면서 다른 쪽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게 맞더라도 이 두 입장 중 하나가 진리라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예측에 산다. 그리고 죽는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모든 유기체가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칙의 한 파생물이다. <259p>
처음의 이야기에서 이승과 저승이 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인가의 의문을 패러독스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그 동기와 결과를 가진 존재로서의 시작이라면 그 존재로서의 결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거나 선택하도록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형태나 개념으로의 서로 대립적인 존재가 세상을 존립하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폴 엘뤼아르의 시가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적합한 것 같다.
마지막 부분만 옮긴다.
나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
그게 누구든
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