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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는 좀 길어지는 듯하다.
도통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만 표현하는 것은 반감을 불러온다.
처음에는 좀 즐겼던 부분도 있다고 해야 한다.
지금도 굳이 벗어날 필요는 없다 할 것이지만 다만 좀 심심할 뿐이다.
그래서 전의 감정과 이성이 섞여 놀던,
그 시간이 길었던 그 시기의 느낌이 그립다고 할까?
어쨌든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텅 빈 하늘에 구름이 생기듯이 조금씩 바람이 불어 그 푸르름을 채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있다.
언제,
어떤 이유로 또다시 구름이 흩어지는 나날이 시작될지 모르지만
다시 전과 같은 궁금증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새털구름이 가득한 하늘로 돌아갈는지……
이번에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궁금증이 없는 화면에서 어떤 재미를 찾을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까?
아니면 이번 얼마간의 시간이 나의 다른 망상과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까?
보이져호와 파이어니어호가 다 마멸되어 우주의 티끌이 되면,
결국 인류 존재의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기만을 기록한
음향과 영상을 담은 전파만이 우주에서 우리가 남긴 흔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도 찰나에 불과하지만, 아주 값진 순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든 그는 한 소식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러브 루시>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웃음소리는 들을 것이다.
<인간 없는 세상: 엘런 와이즈먼 Alan Weisman 지음. 2007.10>
미국의 우주항공국 NASA에서는 1972년과 73년에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를 우주를 향해 발사했다.
그 우주선에는 15 X 23㎝의 알루미늄 판을 싣고 있다고 한다.
그 판에는 Carl Sagan의 전처 Linda Salzman이 벌거벗은 남성과 여성을 묘사한 에칭 그림이 지구의 위치를 나타내는 태양계의 그림과
다른 메시지들이 담긴 기호들과 같이 실려있다고 한다.
1977년의 보이저 호에는 이 그림보다 조금 더 많은 량의 메시지를 담은 디스크가 실려서 우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우주선은 무엇에 의하여 언젠가, 어느 곳에서 발견되기를 바라면서 우주를 향하여 발사되었지만
그 비행선들이 발견될 때쯤에는 이미 지구의 인류는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류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 판을 싣고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선이
장래 어느 항성의 주위 30천문단위 이내를 통과하기까지 필요로 하는 평균적 시간은 우리 은하계의 현재 연령보다 길다고 예상되기도 하고, 앞으로 400만년동안은 아무 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400만년 동안……
그 사이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류에게 미래의 400만년이라는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지구의 역사는 과거에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지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지구의 역사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낸 우주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은 어느 곳에서나 같이 흐르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아직 인류가 발신지를 알 수 있을만한 어떤 기호나 상징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 어떤 상징이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974년.
코넬 대학의 천체물리학자 Frank Drake는 헤라클레스자리의 한 성단을 향해 3분짜리 신호Pulse를 쏘아 보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행위가 우리보다 우월하고 침략일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토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의 전파천문학자들은
최근에 캐나다의 학자들이 우주를 향해 레이저광선을 쏘아 보냈을 때까지 다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고 한다.
영화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서는 외계인과의 교섭 방법으로 음악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 낯선 물체와의 접촉 시 인간이 두려워하는 만큼 그들도(그들이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면……)두려워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혹시 외계인에게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파괴나 침략을 방조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의 결과였을까?
그런 생각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뭔가 다른 공포를 학습해 온 역사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피라미드 외의 나머지 여섯 개는 그보다 훨씬 빨리 사라질 것들이다.
상아와 금으로 도금한 거대한 목조 제우스 조상은 옮기는 과정에서 부서져버렸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빌로니아 궁전의 유적에 있던 공중정원은 흔적도 없다.
로도스의 거대한 청동상은 지진 떼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진 뒤로 조각들이 뿔뿔이 팔려버렸다.
나머지 셋은 대리석 건축물인데, 그리스 신전은 불에 타면서 무너졌고,
페르시아의 마우솔로스 능묘는 십자군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지진에 쓰러져버렸다.
<인류의 유산: 세계불가사의의 운명. 245P>
인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처음 구조물을 짓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건축물들과 도시가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공통된 의견은 아마 달은 차면 기운다라는 속담처럼 포화상태에 이른 번영은 몰락의 길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일 것 같다.
서구인이 침략과 파괴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고의로 자연적인 상황을 꾸며내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스터 섬의 경우처럼 풍부함을 절제하지 못한 탐욕이 스스로를 멸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은 맞는 말 같다.
문명이 사라지는 이유의 여러 가지 중에서도 흥미를 끄는 것은
풍족한 자원과 식량 등을 조절하지 못한 소유자 계층이 스스로 귀족화하여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자원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즉 노동자가 부족한 상황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고
나중에는 소유계층이 서로를 소유하려 한 결과로 투쟁에서 밀려난 계층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간 탓에
국가가 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세월에 관계없이 뭔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얼마 전 인공고기를 만들었다는 뉴스에서 보듯이
대체 식량자원을 만들어 낼 것이고,
화석에너지의 사용도 대체 에너지를 만들어 내 사용을 줄이게 될 것이며,
현재 온실효과로 인한 인위적인 요인도
빙하기의 순환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금의 간빙기가 적어도 5만 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하며,
인류를 파멸시킬만한 자연재해나 행성충돌 등의 이유로 인류의 99%가 사라진다고 해도
1%의 인간이 이전 빙하기 이후의 시대와 같이 살아 남아 또 다른 문명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구조물들은 모두 과거 7대불가사의의 경우와 다르지 않게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들이나 문명의 잔해들은 경우에 따라 지구가 소멸될 때까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런 글에서 나타나는 숫자들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로서는 만 년은커녕 천 년 정도의 시간에 대한 관념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감하던 이해 못하던 그냥 그대로 과학자들의 저 말을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길 어디쯤에 머물고 있으며
어느 시간쯤에 일어날 예측하지 못한 변화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인류가 무분별한 개발을 멈추고 자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중에 한가지로 인구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데,
“UN의 인구 변화 예측 시나리오를 근거로 현재의 가임 여성들이 앞으로 한 자녀만 낳았을 때,
2050년경에는 10억정도의 인구가 줄어들 것이며 2100년이면 16억정도로 줄어들어 19세기 수준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380P~381P)
이런 시나리오를 두고 100년 후의 인간은 발달된 과학의 힘에 의하여 남아있는 지구의 자원을 나름 풍요롭게 사용하며
어느 S.F영화에서처럼 로봇을 하인처럼 사용하는 생활을 하거나 “서로게이트”, “매트릭스”와 같이 인간은 정신적으로만 존재하고 육체는 기계에 의하여 영원히 사는 수준으로 변화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와 같은 상상은 인간이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은연중에 과학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며,
비약한다면 그렇게 기계에 의하여 사는 생활은
인간의 정신마저 기계에 속박당하여 벌레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신성을 저버린 것에 대한 징벌이고,
인간은 어떤 경우가 되어도 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한편의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싸움을 다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로 쏘아 보낸 라디오의 전파를 받고 문어발을 가진 외계인들이 발신자를 찾아 레이저 빔이 발사되는 무기를 들고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 같이 성급해 보인다.
나는 약 4년전에 중급 정도 성능을 갖춘 수준의 컴퓨터를 구입하여 지금까지 잘 사용해오고 있었지만
최근 1달을 전후하여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다.
기계는 자주 사용하여야 고장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스마트 폰, 태블릿PC를 사용하면서 사용량이 줄어들어서인지
제멋대로 멈추기도 하고 꺼지지도 않고 짜증나게 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 위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발명의 결과물들, 그리고 무형의 지식들.
그리고 그것들의 중심에 있는 컴퓨터와 관련 부속물들.
그런데 어느 날 터미네이터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19세기와 20세기의 중간 시기인 “Belle Époque”,
그 시대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풍요가 만들어 낸 그런 것들이 미래를 파괴하게 된다는 점을 알린 덕분에
기계와 지식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게 된다면 그 문명의 이기들은 어떻게 될까?
스마트 폰이나 새로운 패드에 흥미를 뺏겨 사용빈도가 줄어든 내 PC의 처지처럼,
먼지가 쌓이게 되고 먼지 쌓인 기계는 습기의 침략에 불꽃과 함께 고철로 되어버릴 텐데,
결국 기계란 인간의 관리와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버린 슈퍼컴퓨터의 수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기계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란 전제를 놓고 본다면,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서구인들의 유물론적 사고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물질에도 기를 부여하는 동양적 사고에 의하면
물질이나 자원이란 인간이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가정하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인간의 힘이라는 생각으로 주위의 자원을 끝을 볼 때까지 파헤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전쟁이 없던 평화롭던 시절이란 belle Époque는 자원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예고한 것으로
그런 분쟁으로 인해 결국 세계대전으로 이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인류가 대륙간의 이동을 하루 안에 하게 된 만능의 시대에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나 온난화를 일으키는 자원의 낭비를 예측하고
숲의 파괴가 가져올 결과라든가 동식물의 생존에 개입하는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라고 예측하는 것들
모두 과학적 지식의 산물 아닐까?
그런데 과학이나 기술의 발달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정신마저 기계에 의하여 속박될 것이라는 상상은 어찌 생각해보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리면 그와 같이 벌레처럼 살게 될 것이라는 은유metaphor가 가득 담긴 협박같이 들린다.
지금 과학이 신의 존재와 대립하고 있는 것은 현시적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은유를 가득 담은 문화와 수사적 표현으로 무장한 채 과학을 협박하는 사람들의 집단도 결국은 과학의 결과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모순이 아닐까?
미래란 또는 인간의 삶이란 영화”설국열차”의 주제처럼 예정설에 기인하여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많은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점을 부인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인다면,
또는 모든 과학의 결과물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다가올 어느 날에 과거 속의 도시들처럼 풍요 속에 종말을 맞이함을 반복한다고 해서 인간의 탐욕이니 투쟁이니 신성파괴니 하며 비난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도 이미 예정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일이고 그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분쟁과 화해가 있어왔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관계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간이 노출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도 동 시간대에 컴퓨터를 통하여 과거를 배우고 그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그간의 경험 축적을 통한 통계를 이용하여 또 다른 “Golden Era”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지금까지와 같이 지구의 자원을 걷어내기만 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지난 100년동안의 파괴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한 세기도 안돼서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계절은 바뀌어 간다.
들판에 옥수수는 빨간 수염이 누렇게 변해 가고 코스모스는 하천 변의 갈대 숲을 비집고 자라기 시작한다.
푸른 벼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산은 또다시 붉게 물들 것이고 철새는 제 갈 길을 잊지 않고 하늘을 날기 시작할 것이다.
세월이 내가 셀 수 없을 만큼 지나간다 해도
지구는 여전히 은하계의 한쪽 팔에 매달려 운행할 것이고
그 전에 지구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낙서해댄 인간들은 언제가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구 위의 진정한 주인일지 모르는 미생물만 남아있게 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녹색의 땅과 푸르스름한 대기로 감싸인 이 땅이
황량한 사막으로 변할지, 인간이 사라진 땅에 태고의 모습이 되살아나 밀림으로 뒤덮일지,
대지의 용트림으로 바닷물이 온통 출렁거릴지 모르는 시간이 온다 해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 흔적이 있다면
그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발견하게 될 흔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대리자가 필요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만들고 부수며 가꾸려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은 인간이 없어진다는 상상으로 자연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만들고 부수어 댄 과정이 없었다면 자연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유전자에 개입한다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존하며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지구환경의 시계가, 핵으로 인한 Doomsday Clock이 자정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지만
시간은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을 앞세워 구원을 유혹하며 시간이 멈출 것이라고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시계를 멈추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순환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시간이 스스로 멈추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무엇인가 예정이 되어있는 것이라면 그 점이 아닐까? 시간은 계속되게 될 것이라는 예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