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의 탄생 -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성격의 모든 것
대니얼 네틀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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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나누는 가정에는 9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이론이 있다고 하는데

개인의 성격이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아닌가를 나누기도 하고

본인이 생각한대로 실행되는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욕구에 의하여 실행되는가로 나누기도 하며

유전적 요인과 환경요인에 따라 나누기도 하는데 체질적 이론에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혈액, 흑담즙, 황담즙, 점액 이렇게 네 가지의 체액의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기도 하였단다.

 

이런 가정은 30년전의 가정이고 현대의 성격심리학자들은 5가지의 유형으로 나눈다고 한다.

 

이 개념을 ‘5대 성격특성혹은 ‘5대 성격요인 모델또는 빅 파이브 Big Five 라고 한다. 5대 성격특성모델은 지난 1~20년간의 연구를 통해 등장한 성격에 관한 이론으로, 인간 성격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중 포괄적이고 신뢰할만하며 유용한 분석들로 간주되고 있다. 이 모델의 기본 개념은 인간의 성격은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이라는 다섯 가지 특성으로 결정되며, 모든 사람은 이 다섯 가지로 성격점수를 매길 수 있고, 이 점수를 알면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격의 탄생: 데니얼 네틀 Daniel Nettle/와이즈북 23P>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행동의 이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성격이론가 역시 인간이며 우리와 같이 인간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성격심리학: Larry A. Hjelle, Daniel J. Ziegler. 法文社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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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 원시의 자유를 찾아 떠난 7년간의 기록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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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극의 땅 그린란드의 에스키모 마을, 호주의 뜨거운 모래사막, 그리고 아마존의 원시 부족들이 사는 밀림과 같은 민족끼리 살육을 멈추지 않는 웨스트파푸아의 땅을 돌아본 작가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의 책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를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여행에서의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얻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는 말했다. <404P 섬뜩한 공허>

맞는 말이다.

20대 시절의 나의 여행은 되도록 많이, 되도록 넓은 곳을 다니며 보는 것이 희망이었고

그 시절 내 나이또래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돌아다닌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 나이 때의 모든 청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서 감각적 자극이 우선시 되는 시기이기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관점을 키우기 이전에 자극의 량을 키우는 것만 생각하였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이만큼 흐른 지금은 그렇게 걷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보고 다녀봐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1차적 자극은 거기서 거기라는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차적 자극인 감성적 감상법에 무뎌지게 되어 양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자극에는 관심이 줄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비록 젊어서 노는 배짱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젊은 시절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봐야 경관을 보는 관점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나이 먹어서 여행을 다녀봐야 처음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은 경관을 보는 것에 우선할 것이기에 관점을 키우는 순서로는 젊을 때 경험하고 늙어서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 세월이 흐르는 순서에 따라 순응하는 삶의 이치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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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에게 묻고 싶은 인간과 삶에 관한 질문들
존 폴킹혼 외 지음, 강윤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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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 가설보다 유신론자들에게 더 큰 설득력을 가지는 설명은, 인간 중심의 이 풍부한 우주를 정교하게 조율된 환경과 함께 제공한 이가 바로 신이며, 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우주의 그 풍부한 역사(빅뱅 후 150억년, 100억년후에 인류 탄생)를 통해 자신의 창조적 목적(창조를 향한 신의 자비는 피조물에게 적절한 독립성이 있음을 함축한다.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 1819~ 1875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진화의 세계는 피조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도록 허락 받은 세계이다.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자동기계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훨씬 가치 있는 것처럼 이것은 주문 생산된 창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지만, 맹목적인 진화의 탐험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대가를 요구한다.)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28P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제공된 것이라면 굳이 이런저런 동식물들과 과학으로 증명된다는 그 근거들이 부수적인 요건으로 필요한가?

그렇다면 신은 인간에게 필요하지도 않는 부수적 요소와 여건을 만드는데 빅뱅 후 <빅뱅이 신의 창조행위 중 하나이지만 빅뱅이라는 방법을 인정한다면 시간과 공간이 신의 존재이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우주에 기원이 있다면, 창조주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실제로 완벽하게 독립적이며 경계나 가장자리도 없다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100억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그 후로도 40억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진화가 필요하도록 하였을까?

그 이유가 인간 스스로 진화라는 방법을 통해 대가를 치러가며 신의 창조적 목적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인간에게 적절한 독립성을 부여하였다면 결과에 대하여도 주관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독립성이란 것이 신의 자비로 인류에게 부여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류에 속한 어느 한 인간이 주어진 독립성을 발휘하다가 본의 아니게 신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에게 특별한 소명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신의 의도에 포함된 전능의 일부였을까?

100억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준비기간이 길어야 하는 이유가 인간을 탄생토록 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면

그 과정으로 탄생한 인간의 독립성을 충분히 인정해줘야 했던 것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간들이 독립성을 실험하는 과정에 간혹 실수가 있었을 경우

그러한 실수도 대가를 치러가며 신의 목적을 알아가는 인류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 중 어느 하나 혹은 어느 한 무리가 실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적 관점으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창조자의 관점에서 개체는 세포와 같은 것일 뿐이므로 인류라는 커다란 전체에게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는 진화의 지속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킹슬리 입장에서의 가정일 뿐이며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편견일 가능성이 많다.

세상에는 자신이 전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전체를 이해할 능력을 부여 받은 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의 속 뜻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게 모든 것을 아는 듯 말하는 그들의 속을 내가 알 수는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그들이 동양의 사상에 대응하기 위하여 주관적 신념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이는 구약과 신약의 무오류성을 지적하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모순을 비유로 생각하는 것으로 대체하도록 문자주의적인 관점을 버리더라도

신이 인간의 독립성을 허용하는데 따르는 피치 못할 창조의 비용이 질병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류에게 청구한 것이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그에게 한 인간이라는 객체는 인류라는 전체에 비하여 그저 잘라내야 할 돌연변이 세포 같은 것이라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전능은 가학적인 자신의 특질을 감추려는 가면이며 신념이라는 액세서리로 본성을 감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신론자들에게서만 있다고 오해되는 도덕률이 실재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때,

그들의 신이 없었던 채로 수천 년을 이어온 이민족의 문화와 민속적 신은 그들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그들에게는 우주의 창조자인 신이고 이민족에게는 토테미즘이며 애니미즘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유신론자만이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동양의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이 인간이 근본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四端七情임을 말했다는데 이는 서양의 사유의 역사와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만약 동양의 사유가 창조적 목적을 알게 하려는 의미로 만들어진 전능의 일부라고 하여도 독립성의 일부여야 하므로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창조의 목적은 서방에 한정되어있었다는 것으로 편견의 시초이며 폐쇄성의 동기라 할 수 있고 역사상에 드러난 폭력의 근거라고 말하고 싶다.

 

유신론자들의 신(유대인, 기독교, 이슬람은 사실 동일한 대상을 신으로 말하는 것으로 안다.)은 구약과 신약의 그 신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 신의 본성이 킹슬리의 말대로 부활과 구원이라면 그 신을 믿는 자들은 구원의 형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놓은 것이 있을까?

부활이란 어느 모습의, 어느 시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죽음이라는 형식을 거치는 순간일 때의 그 모습인가? 아니면 태어날 때의 모습인가! 그것도 아니면 살아있을 때 가장 육체적으로 정상적일 때의 모습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 언젠가의 회합에서 투표로 동의하였듯이 의 모습인가? <언젠가 투표에 의하여 성령의 부활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육체란 의미 없는 부활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신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또 우리는 같은 시대의 역사를 통하여 신약을 구성하는 책들의 진정성이 그 당시에 배척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신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사람들의 투표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여부를 투표에 의하여 결정하는 일보다 더 이상야릇한 일은 없다.” <이성의 시대;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354P>

 

그래서 두 팔을 가지고 지옥을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천국을 가는 것이 낫다(마태 18:9, 마가 9:43)고 한 것인가?

복음서의 형사취수에 관한 비유에 나오는 그의 능력이라는 것이 인간관계에서의 개인을 위함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이라면(마가 12:24) 그것은 인가? 살아있을 때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 주고 받은 삶의 동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세포의 분열과 융합이었을 뿐이라고 해도 그에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 만약 모든 기억과 정신이 재배치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가?

그가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마태 13:34)”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마태 13:13)”이라면 그 비유의 참 뜻을 알게 되는 과정으로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가? 말을 통하여 전달이 되는 것이었다면 그가 굳이 비유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이라고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어느 부분은 비유이고 어느 부분은 직설인지 누가 말로 구분을 할 수 있는가!

맹신논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의문은 참 쉽게 해결된다. 그저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류도 역시 그의 몫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의 노력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의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이 최고 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신 안에서 위안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 본질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그의 평화도 역시 나의 평화와는 다른 것이며, 나에게는 평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포이에르 바하 Ludwig Feuerbach

 ; 기독교의 본질)

 

저자는 자신의 유신론이 어느 분파의 논리에 속한 것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또 많은 유신론자들은 분파라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는 어긋나는 것이며 개인적인 신념만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임의 필요성은 있는 것일까?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6:6>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이 유신론자이면서도 과학의 한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 점이 개인 스스로가 본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일 수는 있으나 모두에게 자랑할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을 기쁘게 하고 천국의 보상을 얻기 위해 도덕적으로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행위의 중요성에 따라 도덕적 체계를 갖춘다. < 우주에는 신이 없다: 데이비드 밀스 David Mills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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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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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길어지는 듯하다.

도통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만 표현하는 것은 반감을 불러온다.

처음에는 좀 즐겼던 부분도 있다고 해야 한다.

지금도 굳이 벗어날 필요는 없다 할 것이지만 다만 좀 심심할 뿐이다.

그래서 전의 감정과 이성이 섞여 놀던,

그 시간이 길었던 그 시기의 느낌이 그립다고 할까?

어쨌든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텅 빈 하늘에 구름이 생기듯이 조금씩 바람이 불어 그 푸르름을 채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있다.

언제,

어떤 이유로 또다시 구름이 흩어지는 나날이 시작될지 모르지만

다시 전과 같은 궁금증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새털구름이 가득한 하늘로 돌아갈는지……

이번에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궁금증이 없는 화면에서 어떤 재미를 찾을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까?

아니면 이번 얼마간의 시간이 나의 다른 망상과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까?

 

보이져호와 파이어니어호가 다 마멸되어 우주의 티끌이 되면,

결국 인류 존재의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기만을 기록한

음향과 영상을 담은 전파만이 우주에서 우리가 남긴 흔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도 찰나에 불과하지만, 아주 값진 순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든 그는 한 소식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러브 루시>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웃음소리는 들을 것이다.

<인간 없는 세상: 엘런 와이즈먼 Alan Weisman 지음. 2007.10>

미국의 우주항공국 NASA에서는 1972년과 73년에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를 우주를 향해 발사했다.

그 우주선에는 15 X 23㎝의 알루미늄 판을 싣고 있다고 한다.

그 판에는 Carl Sagan의 전처 Linda Salzman이 벌거벗은 남성과 여성을 묘사한 에칭 그림이 지구의 위치를 나타내는 태양계의 그림과

다른 메시지들이 담긴 기호들과 같이 실려있다고 한다.

1977년의 보이저 호에는 이 그림보다 조금 더 많은 량의 메시지를 담은 디스크가 실려서 우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우주선은 무엇에 의하여 언젠가, 어느 곳에서 발견되기를 바라면서 우주를 향하여 발사되었지만

그 비행선들이 발견될 때쯤에는 이미 지구의 인류는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류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 판을 싣고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선이

장래 어느 항성의 주위 30천문단위 이내를 통과하기까지 필요로 하는 평균적 시간은 우리 은하계의 현재 연령보다 길다고 예상되기도 하고, 앞으로 400만년동안은 아무 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400만년 동안……

그 사이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류에게 미래의 400만년이라는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지구의 역사는 과거에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지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지구의 역사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낸 우주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은 어느 곳에서나 같이 흐르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아직 인류가 발신지를 알 수 있을만한 어떤 기호나 상징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 어떤 상징이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974.

코넬 대학의 천체물리학자 Frank Drake는 헤라클레스자리의 한 성단을 향해 3분짜리 신호Pulse를 쏘아 보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행위가 우리보다 우월하고 침략일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토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의 전파천문학자들은

최근에 캐나다의 학자들이 우주를 향해 레이저광선을 쏘아 보냈을 때까지 다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고 한다.

영화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서는 외계인과의 교섭 방법으로 음악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 낯선 물체와의 접촉 시 인간이 두려워하는 만큼 그들도(그들이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면……)두려워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혹시 외계인에게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파괴나 침략을 방조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의 결과였을까?

그런 생각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뭔가 다른 공포를 학습해 온 역사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피라미드 외의 나머지 여섯 개는 그보다 훨씬 빨리 사라질 것들이다.

상아와 금으로 도금한 거대한 목조 제우스 조상은 옮기는 과정에서 부서져버렸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빌로니아 궁전의 유적에 있던 공중정원은 흔적도 없다.

로도스의 거대한 청동상은 지진 떼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진 뒤로 조각들이 뿔뿔이 팔려버렸다.

나머지 셋은 대리석 건축물인데, 그리스 신전은 불에 타면서 무너졌고,

페르시아의 마우솔로스 능묘는 십자군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지진에 쓰러져버렸다.

<인류의 유산: 세계불가사의의 운명. 245P>

 

인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처음 구조물을 짓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건축물들과 도시가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공통된 의견은 아마 달은 차면 기운다라는 속담처럼 포화상태에 이른 번영은 몰락의 길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일 것 같다.

서구인이 침략과 파괴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고의로 자연적인 상황을 꾸며내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스터 섬의 경우처럼 풍부함을 절제하지 못한 탐욕이 스스로를 멸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은 맞는 말 같다.

문명이 사라지는 이유의 여러 가지 중에서도 흥미를 끄는 것은

풍족한 자원과 식량 등을 조절하지 못한 소유자 계층이 스스로 귀족화하여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자원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즉 노동자가 부족한 상황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고

나중에는 소유계층이 서로를 소유하려 한 결과로 투쟁에서 밀려난 계층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간 탓에

국가가 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세월에 관계없이 뭔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얼마 전 인공고기를 만들었다는 뉴스에서 보듯이

대체 식량자원을 만들어 낼 것이고,

화석에너지의 사용도 대체 에너지를 만들어 내 사용을 줄이게 될 것이며,

현재 온실효과로 인한 인위적인 요인도

빙하기의 순환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금의 간빙기가 적어도 5만 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하며,

인류를 파멸시킬만한 자연재해나 행성충돌 등의 이유로 인류의 99%가 사라진다고 해도

1%의 인간이 이전 빙하기 이후의 시대와 같이 살아 남아 또 다른 문명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구조물들은 모두 과거 7대불가사의의 경우와 다르지 않게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들이나 문명의 잔해들은 경우에 따라 지구가 소멸될 때까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런 글에서 나타나는 숫자들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로서는 만 년은커녕 천 년 정도의 시간에 대한 관념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감하던 이해 못하던 그냥 그대로 과학자들의 저 말을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길 어디쯤에 머물고 있으며

어느 시간쯤에 일어날 예측하지 못한 변화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인류가 무분별한 개발을 멈추고 자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중에 한가지로 인구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데,

“UN의 인구 변화 예측 시나리오를 근거로 현재의 가임 여성들이 앞으로 한 자녀만 낳았을 때,

2050년경에는 10억정도의 인구가 줄어들 것이며 2100년이면 16억정도로 줄어들어 19세기 수준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380P~381P)

이런 시나리오를 두고 100년 후의 인간은 발달된 과학의 힘에 의하여 남아있는 지구의 자원을 나름 풍요롭게 사용하며

어느 S.F영화에서처럼 로봇을 하인처럼 사용하는 생활을 하거나 서로게이트”, “매트릭스와 같이 인간은 정신적으로만 존재하고 육체는 기계에 의하여 영원히 사는 수준으로 변화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와 같은 상상은 인간이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은연중에 과학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며,

비약한다면 그렇게 기계에 의하여 사는 생활은

인간의 정신마저 기계에 속박당하여 벌레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신성을 저버린 것에 대한 징벌이고,

인간은 어떤 경우가 되어도 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한편의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싸움을 다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로 쏘아 보낸 라디오의 전파를 받고 문어발을 가진 외계인들이 발신자를 찾아 레이저 빔이 발사되는 무기를 들고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 같이 성급해 보인다.

 

나는 약 4년전에 중급 정도 성능을 갖춘 수준의 컴퓨터를 구입하여 지금까지 잘 사용해오고 있었지만

최근 1달을 전후하여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다.

기계는 자주 사용하여야 고장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스마트 폰, 태블릿PC를 사용하면서 사용량이 줄어들어서인지

제멋대로 멈추기도 하고 꺼지지도 않고 짜증나게 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 위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발명의 결과물들, 그리고 무형의 지식들.

그리고 그것들의 중심에 있는 컴퓨터와 관련 부속물들.

그런데 어느 날 터미네이터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19세기와 20세기의 중간 시기인 Belle Époque”,

그 시대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풍요가 만들어 낸 그런 것들이 미래를 파괴하게 된다는 점을 알린 덕분에

기계와 지식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게 된다면 그 문명의 이기들은 어떻게 될까?

스마트 폰이나 새로운 패드에 흥미를 뺏겨 사용빈도가 줄어든 내 PC의 처지처럼,

먼지가 쌓이게 되고 먼지 쌓인 기계는 습기의 침략에 불꽃과 함께 고철로 되어버릴 텐데,

결국 기계란 인간의 관리와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버린 슈퍼컴퓨터의 수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기계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란 전제를 놓고 본다면,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서구인들의 유물론적 사고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물질에도 기를 부여하는 동양적 사고에 의하면

물질이나 자원이란 인간이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가정하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인간의 힘이라는 생각으로 주위의 자원을 끝을 볼 때까지 파헤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전쟁이 없던 평화롭던 시절이란 belle Époque는 자원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예고한 것으로

그런 분쟁으로 인해 결국 세계대전으로 이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인류가 대륙간의 이동을 하루 안에 하게 된 만능의 시대에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나 온난화를 일으키는 자원의 낭비를 예측하고

숲의 파괴가 가져올 결과라든가 동식물의 생존에 개입하는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라고 예측하는 것들

모두 과학적 지식의 산물 아닐까?

그런데 과학이나 기술의 발달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정신마저 기계에 의하여 속박될 것이라는 상상은 어찌 생각해보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리면 그와 같이 벌레처럼 살게 될 것이라는 은유metaphor가 가득 담긴 협박같이 들린다.

지금 과학이 신의 존재와 대립하고 있는 것은 현시적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은유를 가득 담은 문화와 수사적 표현으로 무장한 채 과학을 협박하는 사람들의 집단도 결국은 과학의 결과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모순이 아닐까?

 

미래란 또는 인간의 삶이란 영화설국열차의 주제처럼 예정설에 기인하여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많은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점을 부인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인다면,

또는 모든 과학의 결과물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다가올 어느 날에 과거 속의 도시들처럼 풍요 속에 종말을 맞이함을 반복한다고 해서 인간의 탐욕이니 투쟁이니 신성파괴니 하며 비난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도 이미 예정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일이고 그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분쟁과 화해가 있어왔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관계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간이 노출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도 동 시간대에 컴퓨터를 통하여 과거를 배우고 그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그간의 경험 축적을 통한 통계를 이용하여 또 다른 “Golden Era”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지금까지와 같이 지구의 자원을 걷어내기만 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지난 100년동안의 파괴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한 세기도 안돼서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계절은 바뀌어 간다.

들판에 옥수수는 빨간 수염이 누렇게 변해 가고 코스모스는 하천 변의 갈대 숲을 비집고 자라기 시작한다.

푸른 벼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산은 또다시 붉게 물들 것이고 철새는 제 갈 길을 잊지 않고 하늘을 날기 시작할 것이다.

세월이 내가 셀 수 없을 만큼 지나간다 해도

지구는 여전히 은하계의 한쪽 팔에 매달려 운행할 것이고

그 전에 지구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낙서해댄 인간들은 언제가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구 위의 진정한 주인일지 모르는 미생물만 남아있게 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녹색의 땅과 푸르스름한 대기로 감싸인 이 땅이

황량한 사막으로 변할지, 인간이 사라진 땅에 태고의 모습이 되살아나 밀림으로 뒤덮일지,

대지의 용트림으로 바닷물이 온통 출렁거릴지 모르는 시간이 온다 해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 흔적이 있다면

그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발견하게 될 흔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대리자가 필요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만들고 부수며 가꾸려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은 인간이 없어진다는 상상으로 자연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만들고 부수어 댄 과정이 없었다면 자연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유전자에 개입한다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존하며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지구환경의 시계가, 핵으로 인한 Doomsday Clock이 자정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지만

시간은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을 앞세워 구원을 유혹하며 시간이 멈출 것이라고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시계를 멈추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순환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시간이 스스로 멈추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무엇인가 예정이 되어있는 것이라면 그 점이 아닐까? 시간은 계속되게 될 것이라는 예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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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부동산 경기가 일부의 바람대로 과거 어느 시기처럼,

아파트 분양을 위한 모델하우스에 "떳다 방"이 횡행하고,

아파트의 계약서 한 장을 놓고 서너 번의 거래가 이루어지며,

계약하고 돌아서면 아파트 분양가만큼이나 불어난 프리미엄이 붙어 다니는 시절로 되 돌아갔다 쳤을 때,

그로 인한 수익을 불로소득, 투기이익이라고 한다면 최종 소비자는 이익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호구(虎口)"에 들어간 것일 뿐일까?

 

지금까지 겪은 그 동안의 정부나 정보를 알리는 언론, Analyst라는 집단의 의견 등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모두 아니면 거의 그때,

부동산 업자들이 호시절이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그 북적이던 거래현상이 되 살아나 많은 사람들이 비록 투기이익일지언정 불로소득을 얻기를 바라는 것 같다.

만약 정부가 불로소득으로 인한 세수를 확충하기 위한 너그러운 배려이거나,

Journalist 또는 Analyst 들이 정부의 정책 등에 편승하여 뭔가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면,

상품의 가격이야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이 자연적일지도 모르는 거래 현상을 두고

그들은 왜 내리는 것에만 초점을 두는 것일까?

지금의 그 가격은 10년전에는 최고의 가격이었고 그 시절보다 소비자의 평균 수익률이 늘어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다른 관점으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몇 년 전, 가격이 급 상승할 때 당시의 정부나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시장과열을 우려하던 양상에 비하면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왜 가격하락이나 거래의 일시적 소강상태를 거품붕괴니 거래절벽이니 하면서 소위 대책이라는 것들을 수시로 발표하는 것일까?

 

주택거래가 활성화 된다는 것이 국가경제에 활력을 주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지난 시기에 그랬듯이 전국민의 70% 가까운 노동인력이 부동산관련 사업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그야 말로 소는 누가 키우나?

돈이 많아져 외국에서 사다가 먹으면 될 것 아니냐 라고 한다면

그 상황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계속하여 집을 짓고 허물고를 반복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와중에 호구는 늘어만 가고 나중에는 누가 더 부자인가를 놓고 저들끼리도 한바탕 호구 잡기를 하겠지만,

그런 것은 허물에 불과한 것이고

크게 생각할 때 그래야 선진국에 들어서며, 그래야 아시아의 맹주가 되며, 그래야 경제적 우위로 통일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적게 생각하면 그래야 모든 건설관련업종이 활성화되고,

온 국토는 개발의 먼지바람으로, 복부인의 치마바람으로 신바람이 나서 돌아 간다고 치면,

과연 호구는 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런 일련의 프로파간다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들이 정권을 얻기 위한 대상이었던 서민은 그들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호구라는 뜻인가?

과거의 경험을 기억에서 되살려보면 모델하우스의 도떼기시장 판에서 마지막으로 덤터기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하여 실 입주자라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만 남기고 돌아서고는 했는데

지금이야 그렇게 까지는 안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시장의 거래를 살려야 하느니 거래를 늘려야 한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아닐까?

그게 아니라 정말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애국의 마음이라면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경제를 왜곡시키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중시키며, 하우스 푸어를 양산하게 되므로,

국가 정책의 도움을 받지 않고 보편적 소득 기준에 맞추어 적정한 가격에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묵혀두는 돈을 생산적인 경제활동에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왜 10년만에 가격이 두 배 이상 상승한 것을 두고 정상인 것처럼,

마치 그 가격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온 시장의 평균가격인 것처럼 기정사실화하고,

늘어난 고무줄이 정상으로 되돌아가려는 복원력을 붕괴 등의 표현으로 분석하려 하는 것일까?

 

아무도 본인이 호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주머니를 노리는 행위를 방치하지 말고

그런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사회의 이타적 임무이며, 예방적 상황으로 이끄는 구조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대중적인 언론이나 분석가 집단이라는 조직이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편승하여,

-불빛만 쫓는 불나방을 현혹시키는 불빛에 조명을 더해 자신의 날개가 어느 불에 타 죽는지 모르도록 방임한다던가,

정작 민원 당사자는 누군지도 모르는 민원을 해결한답시고,

사람도 잘 안 다니는 오붓한 황토 길을 열기를 뿜어내는 아스팔트로 뒤덮고,

정감 넘치며 그 정도로 충분한 돌다리를 바닥에 파묻고 다리를 만든다고 둑을 만들어 개울도 가기 어렵게 만들고,

누가 회의하는지 알 수 없는 컨벤션 센터,

옆 동네가 지으니 나는 저들보다 더 커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진 지자체장의 욕심에 따라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짓고 보는 복합 물류센터. 기타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이름으로 지어지는 용도를 모르는 대형 건물들.

그런 것들의 관리를 위하여 소비되는 관리비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등한시한 채

진행 과정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만 챙기기를 원하는 인간들을 방치하는 사회단체라는 조직들의 비리나 불법.

-제도의 사적 적용 등을 방임하거나 묵인하지 않고,

제대로 감시하여 올바르게 작용하게 하며,

서민을 위한다는 자들이 서민을 위한 복지예산을 줄여 정권 홍보용으로, (내 생각에 그들은 홍보차원도 아니고 가장 떡고물이 많이 생기는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도 가능하면 자신들의 임기 내에……)

그나마 나중의 관리비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대형사업만 벌리게 하지 못하게 하여도

온 국민이 집 장사에 목을 매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한다.

 

취득세…… 집 값의 2% 그것도 국민주택이라는 규모는 거기에서 50% 감면.

그것이 뭐 그리 시끄러운 쟁점일 수 있을까?

1억에 2백만원은 큰 부담일 수 있다. 그런데 9억에 1%~2%가 큰 부담일까?

금액적인 가치만 생각한다면 부담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나

10억에 가까운 집을 사는 사람에게 천만 원이라는 가치가 집을 사고 말고를 고민 할 정도의 부담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쟁점화하나?

다른 숨겨진 의도가 없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 쟁점화의 당사자에는 누가 포함될까? 그들은 부화뇌동의 대가로 무엇을 얻을까?

뭐 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시키니까 그냥 생각 없이 여기저기서 들은 말은 짜깁기해서 인터뷰했을 수도 있고,

그날 그는 돈이 없어서 아무 말이나 해댔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는 그냥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사는 호구들에게는 쓰레기인줄 모르는 정보로 넘어가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책을 만들어내며 먹이사슬의 쳇바퀴의 손잡이를 쥔 정권이 쓰레기 정보에 현혹되어 All-in하는 호구들의 정신 나간 짓을 방치하거나 그들의 피 묻은 돈을 갈취하는 조직 또는 세력을 못 본 채 한다거나 그런 자들을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는 짓은 호구들의 붕괴를 방조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글로만 선도하지 말고 미래에 바람직한 보편적 행복을 끌어내고자 함이 있다면

시장에 끌려가는 행위를 하지 말고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들은 과감히 잊도록 주문하거나

그들의 대리손들이라도 동원하여 계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저들의 경조부박(輕佻浮薄)함과는 상관없이

시민은 이미 충분히 교육받았고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있음 인데도

저들만 당장의 호구지책에 매달려 추우강남(追友江南), 아부영합(阿附迎合)하는 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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