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에게 묻고 싶은 인간과 삶에 관한 질문들
존 폴킹혼 외 지음, 강윤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이런 두 가설보다 유신론자들에게 더 큰 설득력을 가지는 설명은, 인간 중심의 이 풍부한 우주를 정교하게 조율된 환경과 함께 제공한 이가 바로 신이며, 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우주의 그 풍부한 역사(빅뱅 후 150억년, 100억년후에 인류 탄생)를 통해 자신의 창조적 목적(창조를 향한 신의 자비는 피조물에게 적절한 독립성이 있음을 함축한다.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 1819~ 1875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진화의 세계는 피조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도록 허락 받은 세계이다.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자동기계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훨씬 가치 있는 것처럼 이것은 주문 생산된 창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지만, 맹목적인 진화의 탐험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대가를 요구한다.)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28P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제공된 것이라면 굳이 이런저런 동식물들과 과학으로 증명된다는 그 근거들이 부수적인 요건으로 필요한가?

그렇다면 신은 인간에게 필요하지도 않는 부수적 요소와 여건을 만드는데 빅뱅 후 <빅뱅이 신의 창조행위 중 하나이지만 빅뱅이라는 방법을 인정한다면 시간과 공간이 신의 존재이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우주에 기원이 있다면, 창조주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실제로 완벽하게 독립적이며 경계나 가장자리도 없다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100억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그 후로도 40억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진화가 필요하도록 하였을까?

그 이유가 인간 스스로 진화라는 방법을 통해 대가를 치러가며 신의 창조적 목적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인간에게 적절한 독립성을 부여하였다면 결과에 대하여도 주관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독립성이란 것이 신의 자비로 인류에게 부여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류에 속한 어느 한 인간이 주어진 독립성을 발휘하다가 본의 아니게 신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에게 특별한 소명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신의 의도에 포함된 전능의 일부였을까?

100억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준비기간이 길어야 하는 이유가 인간을 탄생토록 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면

그 과정으로 탄생한 인간의 독립성을 충분히 인정해줘야 했던 것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간들이 독립성을 실험하는 과정에 간혹 실수가 있었을 경우

그러한 실수도 대가를 치러가며 신의 목적을 알아가는 인류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 중 어느 하나 혹은 어느 한 무리가 실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적 관점으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창조자의 관점에서 개체는 세포와 같은 것일 뿐이므로 인류라는 커다란 전체에게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는 진화의 지속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킹슬리 입장에서의 가정일 뿐이며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편견일 가능성이 많다.

세상에는 자신이 전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전체를 이해할 능력을 부여 받은 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의 속 뜻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게 모든 것을 아는 듯 말하는 그들의 속을 내가 알 수는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그들이 동양의 사상에 대응하기 위하여 주관적 신념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이는 구약과 신약의 무오류성을 지적하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모순을 비유로 생각하는 것으로 대체하도록 문자주의적인 관점을 버리더라도

신이 인간의 독립성을 허용하는데 따르는 피치 못할 창조의 비용이 질병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류에게 청구한 것이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그에게 한 인간이라는 객체는 인류라는 전체에 비하여 그저 잘라내야 할 돌연변이 세포 같은 것이라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전능은 가학적인 자신의 특질을 감추려는 가면이며 신념이라는 액세서리로 본성을 감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신론자들에게서만 있다고 오해되는 도덕률이 실재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때,

그들의 신이 없었던 채로 수천 년을 이어온 이민족의 문화와 민속적 신은 그들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그들에게는 우주의 창조자인 신이고 이민족에게는 토테미즘이며 애니미즘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유신론자만이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동양의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이 인간이 근본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四端七情임을 말했다는데 이는 서양의 사유의 역사와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만약 동양의 사유가 창조적 목적을 알게 하려는 의미로 만들어진 전능의 일부라고 하여도 독립성의 일부여야 하므로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창조의 목적은 서방에 한정되어있었다는 것으로 편견의 시초이며 폐쇄성의 동기라 할 수 있고 역사상에 드러난 폭력의 근거라고 말하고 싶다.

 

유신론자들의 신(유대인, 기독교, 이슬람은 사실 동일한 대상을 신으로 말하는 것으로 안다.)은 구약과 신약의 그 신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 신의 본성이 킹슬리의 말대로 부활과 구원이라면 그 신을 믿는 자들은 구원의 형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놓은 것이 있을까?

부활이란 어느 모습의, 어느 시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죽음이라는 형식을 거치는 순간일 때의 그 모습인가? 아니면 태어날 때의 모습인가! 그것도 아니면 살아있을 때 가장 육체적으로 정상적일 때의 모습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 언젠가의 회합에서 투표로 동의하였듯이 의 모습인가? <언젠가 투표에 의하여 성령의 부활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육체란 의미 없는 부활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신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또 우리는 같은 시대의 역사를 통하여 신약을 구성하는 책들의 진정성이 그 당시에 배척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신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사람들의 투표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여부를 투표에 의하여 결정하는 일보다 더 이상야릇한 일은 없다.” <이성의 시대;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354P>

 

그래서 두 팔을 가지고 지옥을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천국을 가는 것이 낫다(마태 18:9, 마가 9:43)고 한 것인가?

복음서의 형사취수에 관한 비유에 나오는 그의 능력이라는 것이 인간관계에서의 개인을 위함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이라면(마가 12:24) 그것은 인가? 살아있을 때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 주고 받은 삶의 동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세포의 분열과 융합이었을 뿐이라고 해도 그에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 만약 모든 기억과 정신이 재배치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가?

그가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마태 13:34)”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마태 13:13)”이라면 그 비유의 참 뜻을 알게 되는 과정으로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가? 말을 통하여 전달이 되는 것이었다면 그가 굳이 비유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이라고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어느 부분은 비유이고 어느 부분은 직설인지 누가 말로 구분을 할 수 있는가!

맹신논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의문은 참 쉽게 해결된다. 그저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류도 역시 그의 몫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의 노력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의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이 최고 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신 안에서 위안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 본질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그의 평화도 역시 나의 평화와는 다른 것이며, 나에게는 평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포이에르 바하 Ludwig Feuerbach

 ; 기독교의 본질)

 

저자는 자신의 유신론이 어느 분파의 논리에 속한 것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또 많은 유신론자들은 분파라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는 어긋나는 것이며 개인적인 신념만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임의 필요성은 있는 것일까?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6:6>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이 유신론자이면서도 과학의 한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 점이 개인 스스로가 본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일 수는 있으나 모두에게 자랑할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을 기쁘게 하고 천국의 보상을 얻기 위해 도덕적으로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행위의 중요성에 따라 도덕적 체계를 갖춘다. < 우주에는 신이 없다: 데이비드 밀스 David Mills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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