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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올해는 유난히 삶의 종결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책들에 손이 간다. 사순 시기에 이어 내게 찾아온 책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다.
1. 내 안의 아녜스와 로라: 더하기와 빼기의 싸움
죽어 없어질 인간들이 마치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탐욕을 부리고,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불멸을 꿈꾸는 모습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그 어리석음이 민망할 지경이지만, 내 안에도 아녜스, 로라, 폴, 그리고 아베나리우스의 모습이 들어앉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성당에서, 집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히며 '더하기로 자아를 부풀리는' 로라가 된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론 타인의 모든 평가를 거부하고 조용히 소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카카오톡에 생일 알림이 떴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비공개로 돌리고, 차를 고를 때면 무조건 검정이나 회색을 골라야 안심하는 나는 철저히 '뺄셈으로 자아를 지워가는' 아녜스이기도 하다. 이들이 벌이는 난리 속에서 마치 대속하는 어린양을 보듯, 내 안의 불멸을 향한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2. 거장의 '명대사 차력쇼'와 인권의 역설
민음사 TV에서 이 책은 기억할 만한 문장이 많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스스로 거장임을 아는 대가가 우매한 민중에게 깨달음을 하사하려는 강한 열망이 느껴진다. 좋게 말하면 인간성에 대해 뼈아픈 고찰을 하게 만들고, 비뚤게 보자면 "이 노인네, 왜 이렇게 잘난 척이야?"라는 불만이 나올 법도 하다.
"인권을 위한 투쟁은 대중화될수록 점점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한 채,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통된 태도가 되었고, 모든 욕구를 권리로 바꿔놓는 일종의 에너지가 되어 버렸다."
불법 주차 단속을 피하려고 ‘도심에 차를 끌고 나올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브리지트의 모습에서 이 구절은 나온다. 줄거리의 핵심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 장면이 가장 오래 남았다.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가치라고 믿어온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손쉽게 휘청이는지, 그 현실을 요즘 계속 목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이라는 불멸의 가치가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공허한 수사로 변질된 모습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폴의 그 '가벼운 진지함'은 민망해진 내 속내를 사정없이 헤집어 놓는다. 사십 대에 접어든 나 역시, 브리지트 같은 젊은이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나의 소멸을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 비겁한 욕심을 들킨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3. 메아리 없는 소멸을 꿈꾸며
"자기 뒤에 메아리를 끌며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 의해 해석되고 이미지화된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왜곡과 오해는 필연적이다. 100% 순도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메아리처럼, 귀신처럼 남느니 차라리 완전히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정작 550페이지가 넘는 소설에서 문장 차력쇼를 펼치신 쿤데라 님은 이 수많은 메아리를 남기고 얼마나 불쾌해지려 하신 걸까?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자유로워지고 싶어 완전히 잊히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완전한 소멸이 두려운 이 모순.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 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문득 내 수호성인인 페르마의 성녀 소피아를 생각한다. 동정녀이자 순교자라는 성스러운 타이틀을 가졌지만, 그 외의 기록은 전무하다. 생몰년도, 어록, 행적조차 남지 않았다. 와, 정말 딱 좋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남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 또한 결국 나의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