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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1. 가깝고도 낯선 땅 대만, 그곳에서 만난 우리의 야만
1970년대 대만의 시골 마을 '용징'. 그곳은 주류가 될 수 없었던 변두리 사람들의 거대한 무덤이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가족이 겪는 주변인으로서의 삶과 그들이 받는 대접이 우리나라의 그 시절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경악했다. 대만의 근현대사가 한국의 역사와 이토록 겹친다는 사실을 나는 왜 이제껏 무지했을까.
주인공 집안의 다섯 딸은 이름도 비슷하고 중국식 발음도 낯설어 초반에는 인물 관계도를 메모해가며 읽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아픈 사정이 이해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책장을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톈홍은 왜 베를린에서 T를 죽여야만 했는가. 다른 딸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리고 평생을 가부장제의 폭력 속에서 한 많게 살아간 어머니 '아찬'은 왜 귀신으로도, 화자로도 등장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추가되는 수수께끼들은 나를 용징의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갔다.
2. 용징의 귀신과 무진의 안개, 그리고 소외된 자들
처음에는 이 소설을 한국 문학의 고전 《무진기행》 속 '무진'처럼 음산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묘사가 거듭될수록 용징은 전혀 음산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저 덜 계몽되고, 느리게 발전하는 평범한 농촌일 뿐이다. 대만의 경제 성장과 발맞추어 누군가는 성장의 단물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대적인 성장 속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소외되고 배격당한다. 그렇게 약하고 서러운 자들은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문득 나의 유년 시절에 유독 처녀귀신 이야기나 학교괴담이 많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그런 괴담들이 사그라진 이유가, 이제는 억울하고 한 맺힌 처녀와 학생들이 그 시절보다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3. 주류의 오만함과 문학의 경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농촌 공동체에서 '여자' 혹은 '성소수자'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이 부조리다. 그 억압 속에서 인물들의 인격은 서서히 정상 궤도를 이탈해 파멸로 치달아간다. 그들을 그렇게 몰아세운 주류들의 폭력과 오만함은 역겨울 정도다. 셋째의 남편이 보여주는 뻔뻔함, 샤오왕의 거만함은 약자를 소모품처럼 다루는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결혼한 며느리는 아직 형성 중이던 인격이 시어머니의 폭력 속에서 일그러져 간다. 이 모든 장면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공동체가 만들어낸 폭력의 결과다.
어릴 적의 나는 문학을 읽으며 ‘모든 주류들이 저렇게 못된 건 아니잖아. 왜 문학은 가진 자들을 이토록 악마화할까?’*라며 의문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 곳곳의 전장에서 승리자의 지위를 차지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악행을 어떻게 영웅화하는지 목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아무리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이 소수라고 하여도 인간성에 대해 너무 큰 실망을 주는 사건이었다. 문학이 그려내는 권력의 야만성과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어르신들이 넋두리하시듯이 현실은 때로 문학보다 더 잔인하다.
4. 나가며: 울타리는 언제든 나를 배제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귀신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다. ‘아산’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반전은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울타리가 언제 나를 배제하고 둘러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항상 안전하게 울타리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자 어리석음이다. 누구도 가여운 존재로 만들지 말아야겠다. 나 또한 언제든 울타리 밖의 '귀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만의 천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팔자가 나에게 준 메시지였다. 그리고 산 귀신들과 죽은 귀신 모두 말한다. "울지 말라"고, 누구도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말자. 그리고 울타리 밖에 있더라도 울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