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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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출간 이후 세계적인 고전이 되어버린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은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지만 그 해 문학상은 알베르 카뮈에게 수여됐다. 사후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그를 칭송했다. 실존주의자 카뮈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는 것은 카잔차키스의 글쓰기는 실존의 글쓰기였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와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를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면 실존에 대한 그의 개성 있는 주인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니체의 사상을 만나것은 중요한 성장점이었다.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는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나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다”고 쓰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볼 수 있었다. 조르바는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를 반복하는 디오니소스이며 선악의 저편에 있는 짜라투스트라다.

매력적인 이 소설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했다. 1917년 작가 카잔차키스는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갈탄 사업을 벌였고, 당시 실제로 만나 함께 일했던 요르고스 조르바(1869~1941)가 바로 그 조르바다.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인 셈이다. 소설 속 ‘나’, 조르바가 두목으로 부르는 젊은 청년이 카잔차키스다. 소설 속 나이마저 35세로 작가가 실제 조르바를 만난 때와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그의 고향인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고, 열정적이고 테스토스테론이 물씬 풍기는 두 남자 주인공의 우정, 사랑, 여행의 여정을 보았다.

자유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중략)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중략)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P427)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쇠사슬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의 가치, 질서, 자본 등이 속한다. 조르바는 “두목은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줄을 자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머리가 힘이 센 두목은 항상 그 머리가 먼저 작동해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다. 앞에서 말한 쇠사슬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쇠사슬은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진 길이다. 머리로 사고하면 쇠사슬에 익숙해 진다. 두목, 아니 현대의 인간은 머리가 힘이 세다. 쇠사슬, 줄을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길려면 머리의 힘이 약해야 한다. 조르바는 쇠사슬을 끊어낸 자유인이다. 그는 과거, 미래 따위에 머리가 먼저 가지 않는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p389) 조르바는 이 순간에 충실하다. ‘내일은 달라지겠지, 내일은 조금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을 살고 있지 않다. 머리가 중심이 되어 현재 아닌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매번 건너띤다. 내일이 되어도 현재는 없다. 오늘이 없다. 내일은 다시 모래를 본다.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모순이 만나는 곳에 바로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우리의 삶은 현재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삶을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시 살 수 있을 것인가?”현재를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본다. 지금의 대답은 ‘No’ 그럼, 다시 태어나서 지금의 삶을 다시 살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의 상황을 긍정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 내 삶은 변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을 살아싶을 것이다.

또 다른 자유, 인문정신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조르바는 본인 그대로 날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향기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과 다르듯이 어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 조르바는 현재를 살며 자신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안 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열정이 있다. 자신의 삶은 하나 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인식하고 자본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자유정신인 것이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매순간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보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니예요.”(p387) 두려움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상관인가. 그는 국가, 종교, 윤리 등에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렸다면 여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타인이 관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자유는 조르바 그 자신의 고유명사인 인문정신이다.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갈탄광 사업의 핵심인 목재를 나르는 케이블이 실패한 후 조르바와 ‘나’는 해변에서 잘 익은 양고기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P413) 조르바는 본인의 삶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하는 자이다. ‘나’는 ‘조르바’가 춤을 추는 모습만 보다가 갈탄광 사업의 실패 후 함께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 때, 조르바의 춤에서 인간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기 위해 펼치는 그 환상적인 몸부림이 처음으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 짜라투스트라의 하산을 서술하면서 “그는 춤추는 자처럼 걷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춤을 춰본 사람들은 춤을 잘 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하는 것을 안다. 어떻게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있을까. 조르바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듯이 몸이 가벼웠다. 일에 있어서는 두목에게 구속되어 있지만 삶 자체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 않았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삶의 움직임에 귀에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 육체와 영혼이 교감하게 된다… 자기 몸과 영혼이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삶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행하게 된다.“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조르바는 몸과 함께 영혼에도 먹을 것을 주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처럼 몸과 영혼을 동일시 했다.

조르바의 말하기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피로 쓴 것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사유하며 깨달은 바를 글로 쓰는,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 그 안에 자신의 넋을 담은 글을 말한다.”조르바의 말은 오롯이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의 말은 그와 분리될 수 없다. 조르바의 말은 삶과 체험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온 세계를 그대로 겪어온 그의 말은 사람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다. 우리는 살아내지 못한 글들, 머리로 짜낸 글들을 읽고 공부했다. 그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
좋아하는 인문학자 중 고전 인용을 잘하는 한 인문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2할, 인용을 8할을 할 만큼 지식 소매상이다. 한창 인문학에 관심이 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들을 때마다 나는 지적으로 한층 성숙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용문을 외우고 주변에 활용할 때의 쾌감은 정말 좋았다. 인문학을 배울 때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변치 않고 인용문을 소개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갑가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할까, 자신의 경험을 그럴싸한 문장으로 포장하는 지식 소매상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왜, 남의 말만 할까,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하고 속으로 외쳤다. 결국 그는 자기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인용과 그간 읽어왔던 텍스트 중심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 조르바의 말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땅이 되고 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신이 되어 살았다.(p198) 조르바는 자신의 심장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진인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환상가이자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살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사물이 낯설고, 주변이 아닌 그 사람만 보이는 경험을 해 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는 길, 직장에 가는 길이 너무 익숙하여 도중에 마주치는 사물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빛으로 다가온다. 나는 출근길 지하철 플랫폼에 섰을 때 익숙함이 아닌 낯설음과 호기심.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눈길도 주지 않던 그림도 응시한다. 지하철 플랫폼은 새로운 공간이 창조된다. 사물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 있다. 내가 변화함으로써 세계가 달라졌다. 이러한 경험을 지속하고 차츰 늘려가면 조르바의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피의 말하기이자 창조의 말하기를.

만약 내가 조르바가 된다면

매달 중순이 회사에서 계획한 사업계획 진척도를 보여준다. 회사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한결같다. 회사가 바라는 것은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다.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므로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 곧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열정적으로 화폐가치를 올리고 더 획득하기 위해 나와 주변을 채근하며 신나게 목표달성을 부르짖는다. 시장(고객이 있는 곳)은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다. 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으냐가 중요하다. 이곳에서 사업계획을 달성해야 한다. 사업계획은 직장인의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행동한다.“행동의 가치는 어떤 보편적인 잣대(기업은 화폐)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동이란 능력이나 지식, 욕망의 복합체로서,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양상에 다라 가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화폐를 획들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만 가치를 정한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행동이 된 노동은 바로‘화폐로 표현된 활동’, 다시 말해서 ‘상품화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생활 10년 이상이 되면 아래와 같은 고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부속품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자괴감, 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무참히 밟아 버리는 인간성 등. 회사의 기준이 나의 가치척도가 되어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르바를 보며 생각해 본다. 회사의 굴레 벗어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생긴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충동적인 선택은 할 수 없다. 조르바도 두목의 갈탄광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았는가.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조르바나 ‘나’는 비슷한 상황이다. 조르바의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우선, 나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했다.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회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믿고,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화폐를 벌어들이기만 했다. 나는 점점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 자본의 용어로 말하면 나의 노동력이 화폐의 가치로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직장생활에 쓰고 있는데 자본의 가치가 떨어지니 이후의 상황은 예상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회사의 가치’만을 생산효율에 따라 재생산하고 있다. 조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 만약 당신이 조르바가 된다면 직장생활 아니, 삶을 어떻게 사시겠소?”기존의 틀과 사고방식을 깨며 생산효율을 높여 봤지만, 틀에 벗어난 삶의 양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다. ‘정말, 조르바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함이 먼저 일어난다. 소설 속의 조르바의 일대기를 보면 , 조르바는 카사노바다. 나는 수줍음이 많다. 조르바는 몸의 반응속도가 빠르다. 나는 자본 사회의 교육을 받아와 머리와 먼저 간다. 조르바는 현재를 산다. 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다. 조르바는 날 것 그대를 보여준다. 잃을게 없다. 나는 날 것 그대로 보여 주다가 된통 당한적이 수회 있다. 그리고 잃을게 많다. 잃을게 많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 선택을 즉각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술하다보니 난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으며 조르바의 삶을 분석했다. 짜라투스트라와 조르바는 닮은 사람이었고,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위버멘쉬’가 현실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 ‘짜라투스트라’의 잠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했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조르바)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아니었다.(니체 전문가는 동일한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조르바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보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산투르 연주만 봐도 알 수 있다.“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p24)“두목, 내가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소? 산투르를 치려면 행복한 마음이 필요합니다.”(p426) 오르탕스 부인이 행복한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달콤한 거짓말도 한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했을 때의 자유.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하지 않아 두렵지가 않다. 현재를 즐기기 때문이다. 좋아는 것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상태가 충만하기에 더욱 바라는 것이 없다.
작가의 묘비명“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행복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면 무엇을 바라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자유로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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