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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걸어가
이상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
... 그런데 혹시 당신 한국 사람인지? 맞아요, 그럼 2NE1이랑 친해요? 아니요. 당신은 살만 루슈디랑 친해요? 네, 저희 작은 할아버지예요.
25
... 두 사람은 하나의 시대에서 부여 받은 감각으로 자신을 통과해나가며 아마 서로를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30
... , 정부는 난민들에게 더 나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라 소리치며 해가 저물 때까지 행진했다. 가두 행렬 밖의 한 남성이 난민들이 강간을 하고 다니는 걸 알고도 이딴 시위를 벌이냐 소리쳤을 때, 케이와와가 너네들은 난민들이 들어오기 천년 전부터 강간을 일삼고 다녔지만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너네들이 주도적으로 성폭력 반대 시위를 벌이는 걸 본 적이 없다 받아쳤다.
33
새하얀 벽지를 바른 가게 안으로 아노락 입은 남자애가 포마드 발린 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올리며 들어오자 주인은 어디 나치한테서 머리를 깎이고 왔냐 빈정댔고 남자애는 고개 저으며 아버지는 그때 너무 무서워서 태어나지도 않았잖아요,라고 그죠? 할머니의 양 볼에 입맞춤했다. 가게를 나와 숨을 들이마셨다. '이들의 작은 마음들에 은총을.'
76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약간 쌀쌀해져 팔짱을 꼈다가, 푸딩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는 비키에게 벗어놓은 카디건을 걸쳐주고, 멀리서 전화 통화하는 사브리나를 발견한 비키와 함께 그녀에게 손 흔들어주다가, 손 흔드느라 입 밖으로 뭉개진 푸딩 조각을 조그맣게 흘리는 비키를 보며 아마 언젠가는 모두 기억나지 않겠지, 비키는 이렇게 물소리가 빛처럼 쉼 없이 흘러오는 정원을 기억해내면서도 지금 곁에 앉아 입가의 푸딩을 닦아주는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젠가 레즈비언인 백인 양어머니를 원망하고 또 이해하게 되고 자랑스러워하고 보고 싶어 울게 되고 친구들과 아니면 홀로 처음으로 아시아 여행을 하게 되고 그때 잠시 라디오를 켜놓은 택시 안에서 국가 소유의 어느 오래된 별장과 메종 마르지엘라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양어머니와 부드러운 푸딩 향, 팔등에 닿는 물방울의 감촉을 순식간에 떠올리면서도 기억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는 약간의 답답함은 아주 잠시일 뿐이고 다시 택시로 돌아와 더운 창밖의 하복 입은 아이들을 감상하고 차창 뒤로 멀어지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어쩌면 그렇게 두 눈으로 마주하여 바라보지 않고 지나온 것들보다 더 지금의 아이가 결국은 잊어버릴 기억 속에서 새삼 그것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늘이 물러나는 자리로 햇볕이 물보라로 무너지면서 이렇게나 한 사람의 눈앞에 앉아 있고 동시에 희미해지는 기분이 새로웠다.
81
이 코트에서 오사마와 농구를 해보거나 그의 움직임을 녹음하고 싶었는데 과정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자연스러움을 기다리다 놓쳤던 다른 여러 일이 생각났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두고서 기다린, 돌이켜보면 이미 충분히 자연스러웠던 일들.
88
선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럴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결국 선량함을 증오하게 되는 건 아닌지. 응급실에서 난동을 피우다가도 이내 눈물이 맺힌 채 잠든 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링이 말해와, 그렇게 타인의 역사와 본성 등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려는 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유리한 일일지도 몰라, 나도 알지 근데 그런 식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야. 어느 때는 하루 종일 그들을 모조리 산 채로 해부해버리는 상상만 하니까.
144
... , 빛 없이 폭파되어 스스로에게 무한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는 젠의 슬픔이 마지막 한 조각까지 소멸되길 참을성있게 기다려줬고, ...
162
공연을 마치고서 샤워기 아래에서 땀을 씻어낼 때마다 그는 매일매일 자신이 조금씩 더 나아져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비누칠하는 척 양팔로 자기 몸을 감싸 금세라도 몸 밖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행운을 다독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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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들을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단지 내 마음을 위해 죽은 이들을 떠올리는 일은 가장 수치스러운 중독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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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에 함께 자전거를 탄다면 네가 좋아하는 책을 데려와도 좋아.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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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은 그제야 표정을 숨길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며 어둠을 도둑맞은 듯이 입을 다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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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로비에 앉아 빈자리 기다리다 자리 나면, 먼저 온 저를 알아주고 자리를 양보해주는 학생들의 고갯짓에서 때때로 빛이 새었습니다. 책을 펼치고 앉은 그들이 지닌 밝은 불안이 창 곁으로 역광을 만들어내어, 고개 숙여 자신의 어스름 속으로 가라앉는 얼굴들을 저는 장례처럼 지켜봤어요. 해가 지면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천천히 혹은 빠르게, 잊혀가는 속력의 감각만큼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 어디선가에 멈춰 선, 악의가 닳은 이들의 다리 모양새 제각기 다르면서 비슷했지요.
200
석양이 스민 강가의 들판에 누워 페이스타임 하며 웃던 여성이 전화를 끊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지요. 좁은 강물을 따라 물결만큼 몸짓 미세한 오리 떼가 흐르고, 노을이 살며시 물안개처럼 저 멀리 밤이 밀어낸 방향으로 흩어져 떠나갈 동안 들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계속 흐느꼈지요. 과자와 술병을 들고 각자 다른 리듬으로 경사면을 따라 내려와 등 뒤로부터, 주위를 둥그렇게 감싸고 모여 장난치거나 위로해줄 친구들이 영영 오지 않을 장소에서 어느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두 팔 안아 껴안고 있는 외로움이 어쩌면 그릇된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의 역사를 돌이키며 슬픔의 자격을 버린 채 젖은 손바닥에 구르는 눈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의심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