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기쁨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림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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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그리고 성녀 리타


완벽한 이야기이다. 4개의 단편들이 각자 독자적으로 완벽성을 뽐내면서, 또 한데 모여 커다란 맥락을 만들어내 완벽한 단편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단편이 갖추어야 할 완전성, 이야기를 부풀리거나 독자의 눈을 우회시키려는 장치의 결여, 뚜렷한 주제 등이 힘을 합쳐 읽는 이의 눈을 거침없이 끌고 간다. 마지막에 첨부된 '작가 일기'는 소설에 대한 부가 설명이 아닌, 말 그대로 집필 당시의 본인의 일기이다. 몽글몽글 솟는 그의 생각들을 주저없이 옮겨 놓은 그 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에세이의 느낌을 준다.


작가의 철학적 관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것이 곧 각 이야기의 주제가 되고, 이것들이 모여 단편집의 컨셉이 된다. 선과 악의 대립 구도. 이 흔하디 흔한 소재를 신선하면서도 심오하게 표현한다. 대립할 듯하면서 대립할 수 없는, 결국은 일직선 상에 놓인 하나의 뿌리, 심지어 공존이 가능한 선과 악을 특별한 수식 없이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나니, 매우 맛깔나 보이더라.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이 바로 우리네 사는 모습이기에.


<생 소를랭의 이상한 여인>. 개인적으로 공감대가 가장 떨어지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흥미롭더라. 누구나 가질법한 주변인에 대한 증오, 그에 따른 분노, 스치듯 떠오르는 완벽 살인의 충동. 죗값을 치르고자 했지만 인간의 양심에 앞서는 보상심리. 기타 등등 많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으나 쉽게 정리되지 않던 이야기.


<귀환>. 네 작품들 중 가장 소름 돋게 빠진 이야기이다. 그만큰 공감대가 컸기 때문이랴.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 속에서의 고뇌. 입에 올려서도 안될 생각들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을 스쳐갈 때의 죄책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본능에 기반한 판단들.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소유욕과 그렇지 않는 것들에 대한 무심함. 짜릿한 스릴마저 느낄 수 있었던, 짧지만 강렬한 단편이다.


<검은 기쁨>. 이 이야기야말로 단편집의 큰 맥락을 명확히 짚어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카인과 아벨, 이들이 나중에는 아벨과 카인이 되는 이야기이다. 이 극단적인 형제는 일직선의 양 끝에 서 있으며, 이들 사이의 선 위 어딘가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위치를 자꾸 옮겨가면서.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카인과 아벨'은 대립되는 두 개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한 의미인 듯하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를 아우르는 말이 아닐까.


<엘리제의 사랑>. 이 단편집의 마무리로 손색 없는 이야기이다. 시간의 복도 속에서 방황하는 앙리와 카트린. 고통스러운 시차, 시간의 괴리. 대칭적으로 오고가는 선과 악들.


선과 악, 카인과 아벨, 성선설과 성악설...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증거 없는 논박의 연속이다. 때문에 위대한 철학적 질문만 남는 것이다. 대답은 없는 편이 더 완벽하다. 선과 악은 대립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대칭성을 띨 뿐이다. 그 사이의 모호성이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주관적으로 만들지 않나. 작가는 각 이야기마다 마치 보물을 숨겨 놓듯 '성녀 리타'를 출현시켰다. 절망적인 이유들의 마돈나, 불가능의 성녀. 이 이야기들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성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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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몬스터
김주욱 지음, 양경렬 그림 / 온하루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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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소설의 만남

​어떤 책을 읽던지 간에 그림이 삽입되어 있으면 책장이 가벼워진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어릴적 읽던 세계명작전집이 생각난다. 10 페이지 정도 넘기다 보면 의례 나오던 삽화, 얇은 펜으로 세세한 명암부터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전해주던 그 거친 삽화. 혹여 잉크 냄새가 더 날까 싶어 코까지 박아가며 면밀히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기존의 삽화가 하는 역할을 뒤바꿔 버렸다. 그림이 주가 되고 그림에 따른 이야기가 삽입된 형식이다. 물론 분량의 측면에서 보면 삽입이라 표현하기 그렇지만, 컨셉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주인이 되는 그림은 '미래의 피카소'라고 작가가 칭하고 있는 양경렬 화가의 작품들이다. 그림의 퀄리티, 책의 색다른 컨셉만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작품의 시작과 끝은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림을 내 나름대로 감상해보고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그림을 볼 때면, 그 단편 하나로 작가와 독자가 생각을 공유했다는 것이 확연해진다. 소설과 그림 사이에서 참으로 묘한 재미를 찾아 놓았구나.

양경렬 화가의 작품은, 작가가 '미래의 피카소'라고 표현했듯이 추상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내 얄팍한 식견으로 보았을 때 피카소의 추상주의와는 크게 다르다. 적어도 이 책에 수록된 양경렬 화가의 작품은 '반사(reflection)'기법으로 추상적인 표현을 했을 뿐, 전하려는 메시지가 강하게 표현되는 인상주의에 가깝다고나 할까. 뭐, 나는 이렇게 감상했다.


​약속된 기호를 통해 표현되는 소설이다 보니,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먼저 침범 받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작가다. 때문에 미술에 프로포즈를 했다고 하는데, 그 프로포즈에 멋진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에 대한 걱정이 기우일 것이라 믿고 싶다. 멋진 콜라보레이션을 응원한다. 차기작을 기대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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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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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일식 같던 사랑


아주 오랜만에 로맨스 소설을 접한다. <너의 이름은> 애니매이션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강력 추천작. 예전에 읽었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느꼈던 일본 특유의 로맨스가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로맨스 소설을 집어든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새로운 책을 집었을 때 습관처럼 책의 앞뒤 표지부터 살피고 한꺼풀씩 까보는데, 이 책의 뒷 표지 안쪽에 쓰여진'작가의 말'이 눈의 띈다. 연애소설을 쓰려고 보니, 주변에 열렬한 연애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란다. 격하게 공감되는 문구다. 말 그대로 작가가 그냥 읊어놓은 사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작가의 말'이 이 소설의 컨셉이었다. 열렬한 연애를 즐기고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요즘을 그대로 투영한 로맨스 소설. 특이하다.


대학 동아리 내에서 시작된 첫사랑.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흔하디 흔한 대학생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사랑을 아직 해보지 못한 이들은 그것이 아무 아릴 것이라 하더라도 열망하게 되고, 첫사랑이 지나가버린 이들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한들 돌아가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시대를 탓하지는 않지만, 내 눈에 비추어지길, 첫사랑은 더이상 추억이 아니다. 기억일 뿐이다.


남을 공감하는데 탁월한, 하지만 나를 표현하는데에는 한없이 인색할 수 밖에 없는 정신과 의사 후지시로. 그의 사랑은 지나는 삶의 일부이다. 열정이 사라진 채 유지되는 사랑. 비단 남자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다. 상대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커플의 이야기를 읽는데도 이상한 점을 못느끼겠다. 열정적으로 사랑이 시작되었을지라도 이를 유지하는데에 있어 열정은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열정이 강하면 소위 말하는 바람둥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작가는 쓰고 싶었나 보다.


사랑이 시작되던 열렬했던 순간의 기억. 그 기억의 편린으로 사랑은 유지된다. 그 편린이야 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증거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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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공감을 위한 서양 미술사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술의 모든 것
박홍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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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역사




상식선에서 알기에는 조금 높은 수준을 '지적 공감'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센스가 멋지다. 미처 모르고 접한 책인데, 표지를 넘기고 나서야 얼마 전 뜻깊게 읽었던 "생각의 미술관"의 저자 박홍순님이 집필하셨더라. "생각의 미술관"에서 철학을 미술로부터 끌어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역사다.

 

서양 미술작들을 연대별로 나열하니 역사가 보이고, 몇개의 시대로 묶음을 해보니 경향이 보이더라. 경향을 세분화했더니 세세한 패턴들이 보이고, 각 미술작들의 시대적 배경을 가볍게 첨가했더니 훌륭한 미술책인지 역사책인지의 구분이 무색할 책이 탄생한 것 같다.

10여년 전, 서유럽을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뤼브르 박물관은 나홀로, 로마의 바티칸은 가이드와 함께 감상했더랬다. 둘의 차이는 확연했다. 스스로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미술 감상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사회도 나 자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특히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시원한 만족감을 준다. 마치 스타강사의 강의를 듣는 듯한. 나중에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도록 색인마저 훌륭하다.

원시 사회의 미술 분야에서는 마치 역사책의 한 부분을 읽는 듯하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작품들을 박물관보다 교과서에서 더 많이 접한 탓이리라.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이집트 미술에 이르면 영화나 소설 속에서 머릿속이 간지러웠던 부분을 해결하는 느낌이 든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미술 분야를 읽고 있노라면, 유럽에서 박물관 투어를 하는 듯해서 재미가 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한다. 근대 미술은 무수하게 접했던, 소위 말하는 명화들이 나온다. 그리고나면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두께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 미술 분야가 나타나는데, 정말이지 아는 바가 없더라. 왜 그렇게 오래된 과거에서 나의 미술적 지식이 멈췄는지 모르겠다. 무궁무진하게 변화할, 그리고 방대하게 뻗을 현대 미술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크나큰 공부였지 않나 싶다.


배우던 선생에게 계속 배우는게 낫더라는,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선입견이 있다. 박홍순 작가를 스승 삼아 그의 저서들을 계속 살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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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캐빈 10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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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한 폐소공포

'새로운 스릴러 거장의 탄생'이라는 문구는 식상하면서도 믿음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동시대에 수없이 쏟아지는 스릴러들 중에서 단연 앞선다는 뜻인 듯하다. 여러 추리소설들을 가리지 않고 읽다보면 앞의 문구로 선전된 책들의 진가를 더 알 수 있더라. 어찌했든 '루스웨어'라는 또 한명의 스릴러 거장이 탄생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소규모의 초호화 크루즈의 초대장을 운좋게 거머쥔 기자 로라 블랙록. 총 10개의 선실 중 9호실에 머물면서 옆방 10호실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낌새에 집착한다. 시체나 범인도 없으며, 딱히 피해를 입은 자도 없는,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목격했다고 믿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그래서 낌새라고 표현했다. 공황장애에 대한 정신과 약물 복용 중, 크루즈 여행 직전 당한 강도 사건, 습관적인 음주 등 주인공이 갖고 있는 많은 과거력들이 결국 복선이 되어 우리에게 더 큰 공포를 심어준다. 몽롱함과 멀쩡함의 경계에 머무는 정신상태, 강도 사건으로 급격히 악화된 공황장애, 바다 한가운데서의 고립감, 좁고 답답한 공간들, 최소한으로만 설치된 창문들, 칠흑같은 어둠. 전반적으로 불투명한 이미지가 짙게 깔린 것은 작가의 의도임이 분명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정도 가질 법한 폐소공포증을 잘 자극하여 쉽사리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한 장치가 아닐까. 읽는 내내 주인공이 된 마냥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이 소설에서는 기가 막힌 반전이나 스토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심을 함께 느끼도록 하는 점이 백미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형사가 출연하지 않은 부분도 마음에 든다. 루스 웨어의 다음 작품은 전혀 새로운 재미가 될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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