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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 중 공통된 하나가 두께의 압박이 엄청나다는 거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 매 페이지마다 나오는 수많은 주석들은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 그리 만만한 소설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설에 조금 집중할라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괄호와 함께 펼쳐지는 작가의 지적과시는 감탄과 함께 불편한 양면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이사람 뭐 얼마나 잘났기에 이렇게 잘난 척이야’ 하며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니 이 작가 마리샤 페슬, 잘난척 할만하다. 우선 그의 독서량과 학업성적, 예체능에 이르는 여러 재능은 차치하더라도 그 미모가 정말 감탄할만한 수준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누가 이런 아름다운 여성을 그의 작중 주인공 블루같은 말라깽이와 비교할는지 그의 기우였다.
엄친딸 작가의 데뷔 소설인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고전문학과 철학, 정치, 사회학에 놀라운 지식을 가진 천재소녀 블루 반 미어의 1인칭 이야기로 전개되고 각 챕터는 36강의 강의로 이루어져있다.
나비 수집을 좋아하는 엄마의 영향으로 이름마저도 희귀한 나비이름을 따 ‘블루’로 지어진 블루 반 미어. 5살 때 어머니의 의문스런 자동차 사고 죽음 이후,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아버지와 함께 전국의 그저 그런 대학도시들을 떠돌아다니던 그녀는 고급 사립학교인 ‘세인트 골웨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
지적이고, 권위적이며, 냉소적인 좌파성향의 아버지의 교육 탓에 많은 고전영화와 학술서적, 문학작품에 정통한 천재소녀인 그녀는 그곳에서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여교사 한나 슈나이더의 추천으로 교내 인기학생모임 ‘블루블러드’와 어울리게 된다.
잘생긴 용모와 시니컬한 매력으로 여성편력이 심한 아버지와 블루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이는 한나, 매력적이지만 말 못할 아픈 상처를 지닌 ‘블루블러드’ 멤버들과 일상을 꾸려나가던 그녀는 한나의 자살이후 숨겨졌던 배신과, 음모, 거짓에 직면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소설은 표지의 문구처럼 미스터리 장르이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사실 많은 부분이 블루와 아버지 게레스 반 미어 교수의 현학적 대화와 둘의 세상을 바라보는 냉소적 유머로 가득하다.
얼핏 미스터리물이라기 보다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기를 괴짜 아버지와 함께 유머러스하게 엮어놓은 것 같다. 블루를 통해 보여주는 미국 고등학생들의 일상과, 고전문학에 대한 논의등이 작가의 지적 허영(?)을 보여주는 듯하다.
작가의 말처럼 <롤리타>를 차용해서 비틀어 보이는듯한 초기의 설정과 세인트 골웨이의 에피소드가 지나가고, 스모키산 국립공원 캠프에서 한나가 자살을 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미스터리로 접어든다.
과연 한나의 죽음은 살인일까? 자살일까? 그녀와 가레스 반 미어의 관계는 연인사이였을까? 블루의 엄마 나타샤의 자동차 사고는 사고일까? 자살일까? 알쏭달쏭한 모든 진실은 블루에 의해 파헤쳐진다.
우선 작품은 아는 만큼 보인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각 챕터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들의 제목을 소제목으로 붙여 그 명작의 내용과 블루가 들려주는 내용의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 작품 들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부터 레이몬드 챈들러의 ‘빅슬립’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연대를 가리지 않고 방대하며 마리샤 페슬이 만들어낸 가상의 소설 ‘밤의 음모’도 작중인물 스모크 하비의 작품이라며 떡 하니 끼여 있다.
또한 나이트워치맨이란 가상의 테러리스트(?)단체를 등장시키며 음모론적 이야기로 소설을 진행시키는 솜씨는 작가가 단순히 아는 것만 많은게 아니라 창작을 하는데에도 분명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준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읽으며 읽어본 작품보다는 안 읽어본 작품이 많았기에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렇기에 챕터 소제목과 내용을 연관시키는 재미도 느낄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또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너무나 잦은 주석이 글의 몰입을 방해했는데, 서문에서 확실한 근거를 남기기 위해 참고문헌을 꼭 밝히고, 그림을 활용하라는 반 미어 교수의 말을 통해 알수있 듯 사소하게 지나칠만한 문장도 세세하게 괄호로 주석을 달아놔 글을 힘들게 했다.
소설의 형식상 새로운 시도로 이해한다면 이 역시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겠으나 가뜩이나 두꺼운 내용에 책을 펼치기 두려워했던 나에게는 조금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요런 두껍다, 어렵게 느껴진다, 주석이 너무 방대하다 정도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그 다음에는 작가가 들려주는 지적이고, 흥미로운 내용과 유머에 정신을 빼앗기게 한다.
아름다운 시절에 만나게 되는 성장의 아픔도, 음모론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미스터리도 너무나 멋지다.
게다가 확실한 결말을 유보하고 독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작가의 열린 태도도 신선했다.
책의 두께에 주늑들지 말고 용기를 갖길 권한다. 인내를 갖고 읽다보면 지적인 미스터리의 정수를 만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재능있고, 아름다운 작가 마리샤 패슬이 소제목으로 정한 작품들을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읽는다면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알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