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 Mr. Know 세계문학 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자들이 민중의 광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정치사상과 다른 의견을 의도적인 물리력으로 억제하기위해 흔하게 하는 짓거리가 분서焚書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자의 예로는 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의 분서행위를, 후자의 경우로는 멀리 진시황의 분서갱유부터 가까이로는 독일 나치 정권 치하에서의 분서사건까지 들 수 있을 것이다.

나치 정권하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레마르크의 작품들도 반전적인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분서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게르만의 영광을 재현하자며 유럽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나치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전쟁의 비참함을 알린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작품은 분명 눈에 가시 같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레마르크의 작품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아닌 “개선문”이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국내 유명 대학의 추천도서로서 수능 필독서이기에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두꺼운 두께의 책이지만 끈기를 가지고 읽어나갔고 내가 받은 인상은 주인공 라빅의 끝을 알 수 없는 절대고독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 외과의사인 라빅의 절절한 고독이 어린 나에게도 슬프고, 무겁게 다가왔다. 물론 그해 수능에 “개선문”에 대한 지문은 나오지 않았지만 동년배의 친구들은 느끼지 못한 절대고독을 느꼈다는 것과, 레마르크라는 대문호를 알았다는 지적허영은 수능문제 한, 두 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후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그늘진 낙원”등 그의 작품을 읽으며 전쟁이 꽃다운 청춘들에게 가하는 가혹한 폭력과 망명객의 마음 둘 곳 없는 고독함 등, 레마르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는 주제의식에 깊이 공감하며 그의 반전사상에 감명을 받았다.
이 같은 반전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이다.

소설은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으로 참전 했던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정의 과잉을 절제하며 사실적으로 전쟁의 비참함과 청년들을 사지死地 로 내모는 기성세대의 그릇된 권위와 위선 등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반전사상이라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어렵게 느낄 필요는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작가가 경험한 병영생활의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묘사돼있어 재미있으며 각자가 경험한 우리나라 군대의 병영생활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것 같은 수단 좋은 카진스키, 비열하고 악질적인 상급자 히멜슈토프 등은 우리가 군에서 만난 김병장, 장하사와 다르지 않다.
독일 작은 마을에서 주인공 파울 보이머를 비롯한 스무 명의 학생들은 허황된 애국심에 경도된 담임선생 칸토레크의 강압적인 권유로 군에 입대하게 되고 전장에서 그들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창한 기치가 아닌 단순히 살기 위해 살육의 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오직 먹고, 자고, 살아남는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고, 즐거움이 되어버린 그들은 점점 인간의 존엄성마저 상실해 가고, 결국엔 모두가 전사하지만 전쟁에서 소모품에 불과했던 그들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최고 사령부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란 공식 발표를 하며 소설은 끝맺는다.

소설은 취사차 앞에서의 다툼으로 시작해 시종일관 먹을 것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전장이라는 특성상 모든 욕구가 억압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욕구가 식욕뿐이기에 그런 것 같다. 심지어 식욕은 전우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다 그들 앞으로 배식된 음식을 살아남은 자들이 먹을 수 있음을 기뻐하게 만든다. 극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큰 욕구가 식욕이라니. 위로와 자기기만 없이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찧은 보리 한줌이 현실적인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존엄성의 사전적 의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고 엄숙한 성질 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게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회의적인 느낌이 든다.
또한 전쟁은 타인의 죽음에도 내성이 생기게 만드는 것인지 부상을 당해 죽음을 앞에 둔 케머리히의 가죽 장화를 탐내는 뮐러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우정이고, 전우애인가? 우리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았던 존귀한 가치 중 하나인 우정이 전쟁터에선 한낱 가죽장화 만큼의 가치도 없는 헛된 관념에 불과한 것 같아 슬프게 한다.
휴가차 귀향한 보이머에게 전황을 물어보며 진실을 외면 한 체 영웅적 활약상에 대해서만 듣길 원하는 동네 어른들, 학생들을 선동하여 죽음의 전장으로 몰아넣은 담임선생, 훈련소에선 전지적 신의 위치에서 어린 훈련병들을 괴롭히지만 실제 전쟁터에선 꽁무니를 빼며 두려워하는 분대장 히멜슈토프. 이러한 기성세대의 모습은 포격에 부상을 당한 신병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겨야함을 고민하는 젊은이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전쟁은 기성세대가 일으키고 그 피 값은 젊은이들이 치러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권위만 내세우는 기성세대를 작가는 비웃고 있다.

1930년대에 나온 이 소설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라고 하기엔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1차 대전 당시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주위에는 애국과 민족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쓴 국수주의적인 요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담임선생 칸토레크 같은 기성세대가 존재하고, 정치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발한 전쟁터에서 피 흘리는 젊은이들이 있기에 공감하며 읽어 나가게 된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성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좋은 작품은 시대와 연령에 관계없이 사랑 받으며 깊은 영감을 준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특정 세대에 더 큰 감동과 영향을 미치는데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젊은이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시대를 넘어 같은 고민을 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는 우리의 방황처럼 가슴이 시리다. 뜨거운 가슴을 안고 부조리한 세상에 휩쓸리다 산화해간 젊은이들의 기록은 그 자체로 우리들 청춘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쟁의 부당함과 비극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혀지는 전쟁문학의 최고봉에 있는 소설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 젊은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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