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도 한잔 곁들였다. 참 오랜만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면서, 밀려간 시간들을 회복시켜갔다.
- 나도 누군가에게 단단히 말할 수 있기를 - P89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대하는 그 사람만의 취향인지, 벌써 많은 발자국들을 내고도 자꾸 내고 있었다. 수백 개도 넘어 보이는 발자국은, 어지럽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언젠가 언제쯤…… 돌아보게 된다면 내 인생의 발자국은.……… 어디에 어느만큼 제일 많이 찍힐 것이고, 그러다 어느 누구 앞에서 우뚝 멈춰 설 것인가.
- 바깥을 보세요 첫눈이에요 - P95
첫눈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잠시 뭔가에 푹 빠져 지내고 싶은 무작정의 무엇, 우리가 우리의 원래 상태대로 돌려지고 싶은 어쩌면 회귀의 욕망.....… 당신도 눈을 맞으며 슬퍼야 한다. 당신은 눈 속에서만 인간적으로 슬퍼할 수 있다. 그런 첫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 빠지게 기다렸던.
우리는 왜 첫눈이 오면 꼭 만나자고 약속을 했을까. 그리고 왜 첫눈 오면 만나자고 한 그것이 다였을까. 첫눈이 오는 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이미 어떤 약속이 잡혔는지도 모를 일인데 우린 참 어리숙하게도, 미련하게도 몇몇의 약속들을 배치하는 일에 열을 냈다. 지켜지지 않아도 좋다는 맑고 착한 말이어서 그랬을까. 그 말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그 순간만으로도 행복해서였을까. 사람들은 눈을 기다리며 기뻐할 준비와 슬퍼할 채비를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는, 또 약속을 하게 될까. 첫눈이 내리면 어디서 만나자고. 그래. 인생은 그런 것이겠다. 그 말이 다였으며, 그 말이 무의미한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인 것. 그러니 우리가 기약 없는 약속만으로 충분히 좋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거다.
첫눈이 온다는 건, ‘바깥을 내다보세요‘라는 당신에게 보내는 인사이니까. 그리고 첫눈이 온다는 건, 그 첫눈을 밟으며 당신이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아름다운 가능성일 테니까.
- 바깥을 보세요 첫눈이에요 - P96
당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무시하고 가벼이 여긴 수많은 일들이 판결해줄 것이다.
당신이 애써서 가장 좋은 시간을 내어준 친구들이, 사랑하는 대신 욕을 남기며 떠난다 해도 당신은 그 친구들을 맨 나중까지 사랑할 것이며
당신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젊음이라는 피부가 아니라 세월의 분자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기를 바라며
설령 당신이 어느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하나 남기는 것없다 하더라도 누군가 당신을 떠올릴 때 슬픔 대신 어느 믿음직한 나무 한그루를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나는 바란다.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순간에 단어 하나가 맴돌더라도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꺼내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죽음 앞에서 확연히 떠오르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거나 다 풀고갈 상황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살면서 미처 다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어리석게도 영원히 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 언젠가 그때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기는 것으로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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