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던 책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니, 도대체 어떤 기억에 관한 것일까? 궁금하면서도 이것이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일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재밌는 것은 함께 구입한 책이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 1, 2>이었다는 작은 우연이다.  


친절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서상 살인자, 그것도 연쇄살인범이 소재로 쓰인 소설이 나올 거라 상상하지 못한 내 좁은 소견에 반성하게 된다. 


이 독특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책장을 넘기며 눈을 뗄 수 없었다. 장편소설이라지만 짧은 이야기를 읽는 거처럼 술술 읽어졌다. 그리고 최후의 몇 장을 남겨두고 혼란에 휩싸인 화자 김병수와 함께 나도 뒷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이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 어려워진다. 해서 같은 날 구입했다는 것 외에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이란 공통점이 있는 <악의 교전>을 들어 풀어본다. 



먼저 잠깐 악의 교전에 대해 설명하자면 하스미라고 하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살인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자이라기 보다는, [살인]이라는 어렵고도 강력한 방법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지키기 위해 서슴지 않고 흡사 영화의 한장면 마냥 즐겁게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기실 <살인자의 기억법>과 <악의 교전>은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기 매우 어렵다. 잘 읽힌다는 공톰점 외에는 죄다 다르다. <악의 교전>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에겐 "내 안의 선명한 악의를 보아라." 일 것이다. 


악의 교전을 읽는 내내 나는 블레이크의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인'을 떠올려야 했다. 



물론 <악의 교전>은 강력한 악이 선량한 희생자들을 삼키는 내용이 아니다. 되레 연쇄살인범인 하스미와 하스미 손에 살해당하는 피해자들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 어렵다. 살인이라는 수단을 제외하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얼마든지 상처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 다테누마나 하야미는 하스미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그저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하스미의 살인은 정당화되고, 그의 행동에 혐오감이 엷어지며, 동시에 내 안에 존재하는 악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살인자의 기억>은 김병수의 입을 빌려, 희생자들은 그저 그의 더 완벽한 쾌감을 위한 사냥감일 뿐이었음을 그린다. 그리하여 살인자의 기억은 동떨어지고 일그러진, 그러나 어느 틈에 우리 곁에 숨어 있는 순수한 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이상 완벽한 쾌감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살인에서 은퇴한, 잘하는 것이 오로지 살인 뿐이었던 화자가, 우연한 접촉 사고를 통해 자신과 같은 분류의 박주태를 만나 그를 알아보는 것으로 소설은 더 무겁게 변한다. 난생처음으로 필요에 의한 살인을 생각하는 화자.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도 이질적인 존재임을 깨달으며 말이다. 


젊은 살인범..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인생 3기, 살인에서 은퇴한 후 평온한 삶의 상징과 같은 딸, 은희를 노리는 박주태가 점점 주변을 죄어오는데, 알츠하이머는 점점 심해진다. 과연 마지막 숙명과 같은 박주태를 죽이는 일이 가능할까?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36~37p


사실 난 박주태가 주인공의 처음 아내가 데리고 사라졌다는 아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치매가 그에게 보내는 인생의 농담이듯. 


그러나 주인공의 뇌에서 점점 사라지는 기억과 함께 군데군데 이해하기 어려운 오류가 하나 둘 늘어나며 독자의 기대를 일거에 걷어내 버리는 듯한 혼란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리하여 김병수와 함께 나 역시도 멍하니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30 여년을 줄기차게 살인을 해오며 단 한번도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을 만큼 빼어난 살인범에게 '시간'은 잔혹한 농담이라도 하듯 다가와 일순 그의 모든 것을 허물어 뜨린다. 동시에 그 시간은 우리 앞에도 동일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 엄숙함에 숙연해진다.


해서 악의 교전을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살인자의 기억법은 애매하고 모호하며 그래서 더 섬뜩하다. 하여 곰곰이 이를 되씹으며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찾지 못한 어떠한 것의 흔적을 더듬듯이.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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