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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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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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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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철은 가수 김경호를 닮았다.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답게, 어쩌면 철학자보다는 예술가 쪽에 가까운 문장을 선보이는데, 그의 문장은 분명, 감각적인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꽤나 잘 읽히는 면이 있다는 얘기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후 <피로사회>는 한국사회에 회자될만 했고,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까지도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심리정치>를 읽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조금 유감이다. 그는 자신의 손이 짜부라뜨린 이 얼굴을 예상이라해도 했듯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름다움에 관한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근간 <아름다움의 구원>이 그것일텐데) 하루 빨리 이 책이 나오길 바란다!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담론은 이제 한계에 이른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심리정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빅데이터를 도구로 삼아 시민들을 분석하고 심리까지 조정한다는 것인가? 이 마이크로 타케팅 기법은 전작인 <투명사회>와 비교했을 때 어떤 변별점을 가지는가? 빅데이터 얘기는 <투명사회>말미에서도 나왔고 이번 책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고작 세운다는 것이 들뢰즈가 말한 "바보 되기"인데 이는 결국 불통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는 어떤 사유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단순 정보로써, 지식을 파편화시켜버리는데, 이를 지연시키는 바보되기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바놉티콘(banopticon), 즉 미국 데이터 회사 엑시엄이 지정한 웨이스트(쓰레기) 계급 되기와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자본이 갖는 유용성을 간과한 채 신자유주의만를 공격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 책의 대안은 현실적이기보다는 공허한 것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바보 되기'란, '시인 되기'이다. 알 수 없는 개인적 언어와 장광설로 점철된 한국 현대시들의 난해함은, 이 '바보'(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들의 말과 그리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로지 무용성을 향한 일보 전진은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있는 유용성에 대항하는 매력적인 주장이지만, 현실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면 이 '바보 되기'란 불가능하다.


 한병철 자신도 베를린 대학교수이고 돈을 버는 한 집안의 가장이고, "접속이 안 되면 불안해"(인터뷰 p.22)하는 디지털리언이 아닌가. 그에 따르면 디지털리언들의 손가락(디키투스)은 빅데이터-신자유주의의 (탈주체화된)성기(팔루스)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성기로 이 책에 마스터베이션을 한 것 아닌가? 한 마디로 문학-예술을 한 것이 아닌가? 문학은 섹스보다는 마스터베이션에 가깝고, 직선보다는 곡선에 가까운 선을 그린다. 한병철은 네러티브가 결론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정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측면일 뿐, 문학은 결코 결론적이지도, 직설적이지 않다. 그것은 에둘러가는 동시에, 세계의 최하층부로 내려간다. 형이상학이 굴뚝을 겨냥한다면 문학은 수도관에 머무른다. 그런데 이것은 무용한 것이다.


 결국 철학자와 작가는 한 시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탐사등의 스위치를 최초로 올리는 사람으로서, 한 권의 책은 그 스위치에 해당할 것인데, <심리정치>는 전작인 <투명사회>를 답습함으로써 담론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마스터베이션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거대담론이나 문제 제기 역시 어느 정도는 생산적인 측면을 지니고,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와 길항하면서도 유비 관계를 이룬다. 신자유주의를 겨냥한다는 저자의 총구를 오히려 자신에게 겨누는 꼴로 만든 것이다. 그(한병철)는 노동하고 있으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좀 과장하자면) 고해실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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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함께 읽기다 -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이야기
신기수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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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에 나온 영화 <위플래쉬>나 다른 음악 영화들을 보면 오케스트라나 밴드의 합주가 왜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어요. 뭐 <위플래쉬>야 플레처와 앤드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은 묻힌 것이 사실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이나 <노다메 칸타빌레>에는 그런 어려움들이 확연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독서토론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때 진행자는 지휘자에, 토론자들은 연주자에 해당할 텐데, 이게 말이야 쉽지,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론과 현실은 어쨌든 다르므로.


 그런데 이론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다른 점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는 없는 걸까. 다양한 가능성과 우발성으로 점철된 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틀과 그에 따른 규범, 손바닥 크기의 매뉴얼쯤은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독서토론에 대한 사용자 설명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서 책의 뒷부분만 간략히 훑어봤어요. 누락된 부분도 많을 테니, 필요하신 분들은 정독을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자는 독서토론을 하는 이유가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저는 일단 대화를 좋아하고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토론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는 편이에요. 그건 일차적으로 제 성향이 호전적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실제로 저는 학창 시절에 부모님을 학교에서 자주 뵀어요. 물론 도시락을 집에 두고 와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소가 있었거든요.


 아무튼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따라서 전과자는 면했으므로, 어떤 분은 제가 갱생되었다고 보실 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학교 때 토론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게 전환점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아찔한 기시감에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말았는지도.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곁길로 샜군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볼까요.


 생각을 머릿속에 있는 작은 방에 비유해보면, 우리는 그 방을 들락날락거리면서 그 안에서 책도 읽고, 담배도 피우고, 섹스도 하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데 방안에만 있으면 아무래도 답답하니까, 가끔 친구도 만나고,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듣지요. 대화는 그 방을 나서는 순간에,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이 밖으로 나와 상대방의 생각과 정답게 악수하는 순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을에 연인과 같이 포석 위를 걷듯이. 그러다보면 풍경도 아름다워 보일 테고.


 외로움도 덜 할 거예요. 독서가 아무리 저자와의 대화라고들 하지만, 저자는 텍스트 너머에 있고, 만질 수도 없으며, 즉각적인 응답이 불가능한 대상이잖아요. 따라서 독서토론은 여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대안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현악기만 듣는 것 보다는 관현악기를, 관현악기만 듣는 것보다는 앞서 말한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드럼 소리를 같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는 영화에서 아주 훌륭한 드러머로 성장하죠.)


 자, 이제 우리는 무대에 섰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악기를 연주해야 하고 연주자는 지휘를 해야 합니다.(커피를 마시면서요.) 일단 악보가 있어야함은 물론. 당연히 그것은 책 한 권과 발제문에 적힌 논제겠지요. 여기서 책을 음정이라고 본다면, 논제는 박자와 템포 같은 거라고 봐요. '4분의 3박자', 혹은 '점점 빠르게'와 같은 것들 말이에요. 박자는 음정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끔 그것을 한정해 준답니다. 토론 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지도 몰라요.


 리듬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리듬을 조율하고 부드럽게 이끄는 이가 바로 지휘자이지요. 토론 전의 어색한 분위기는 연주자가 대기실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비슷합니다. 이때 연주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지휘자가 사용하는 각종 민간요법(?)들처럼, 진행자도 ‘가벼운 잡담’이나 ‘간단한 자기소개’ 등을 통해 토론자들의 근육을 이완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역발상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내요. 자신이 단점을 돌아가면서 말하면 상대방이 역발상으로 (즉, 장점으로) 돌려 말해주는 것. 가령,


 “제주도를 가보지 못했어요.”라는 상대방의 말에 “제주도를 못 가보셨다고요? 제주도가 하와이 뺨쳐요, 아직 못 보셨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제 그 환상의 섬을 보실 기쁨이 남았잖아요." 라고 답하든가, "너무 꼼꼼한 성격이라 힘들어요.”라는 말에 “꼼꼼하니 얼마나 좋아요. 저는 덜렁대서 늘 생활이 뒤죽박죽인 걸요.”라며 칭찬 일색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약간은 장난기를 발동할 수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한 사람씩 칭찬세례를 퍼붓다 보면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해진다. 한 사람씩 모두 하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다. (p.178)

뭐, 글쓴이의 말대로 이것이 최고의 방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토론이 시작되면 진행자는 “독후 소감 > 자유 논제 > 선택/찬반 논제 > 토론 소감”같은 형태로 진행해나갑니다. 이 중 ‘자유 논제’는 나뭇가지에, ‘선택/찬반 논제’는 뿌리(핵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흥미롭고 가벼운 주제와 질문으로 시작해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행자는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 진행자의 지휘가 시작되는 때는 ‘선택/찬반 논제’일 텐데요. 저 같은 파이터가 있는 경우, 진흙탕 싸움이 날 수도 있으므로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서로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또한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경우 반대 측에 후속질문을 제기해 균형을 잡아주기도 하구요.”(p.185)


 한마디로 대화의 리드미컬한 흐름을 유지하는 데에는 진행자-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한 셈이지요. 논제를 적은 발제문에 책의 간략한 개요를 적는 것도 필요합니다.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오신 분들도 있거든요. 또한 토론 중간에 의견이 바뀌는 배트맨(박쥐?)들이 생기는데, 이런 변화는 적극 권장하라고 글쓴이가 말합니다. 토론은 언어 게임이고, 찬성과 반대 측도 하나의 롤(역할)이므로, 저 같은 파이터를 만나더라도 너무 격앙되실 필요는 없다고요. 게임하다가 화내는 사람은 조금 바보 같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물론 저는 바보.)


 독서토론과 영화토론을 함께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영화토론을 관련 도서를 읽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최근에 <화장>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으니, 김훈의 소설(화장)을 읽고 그에 대한 토론을 나누는 식 말입니다. 책을 읽고 짧게나마 서평을 작성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머릿속에 입력된 책의 내용을 텍스트로 표출하는 작업이야말로, 글쓰기나 요약정리를 잘하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더욱 중요한 것은 무대 뒤의 다양한 악기들처럼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토론자 모두 자신과는 다른 의견의 상대방에게 반론은 하되, 예의는 지켜가면서 주장을 전개해야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 글에서 저를 파이터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악기로 비유한다면 타악기에 가장 가까울 것 같군요. 현악기처럼 부드러운 분들도 계실테고, 관악기처럼 이지적이신 분들도 계실테지만, 다 함께 공존하는 '책 읽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음처럼.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음악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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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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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노르웨이의 숲>을 청년 와타나베의 '갱생기'로 보았습니다. 이전 세대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 실격>에서 드러낸 인간의 맨 얼굴이,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통해 철저히 기각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 <노르웨이의 숲>은 놓여있던 것입니다. 진정성이 상실된 인간은 수치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무슨 도 닦듯이 섹스를 해대는 나가사와와, 남자친구도 아닌 사내에게 음란한 말을 해대는 미도리, 나오코가 도착했던 요양원은 내면이 없는 '고백 전시관'이었으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와타나베는 테엽이 망가진 인형처럼 무너집니다. 이것이 바로 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인들이 안고 가야 할 운명이었으며, 동시에 하루키와 동시대의 작가들이 짊어지고 가야했던 무거운 짐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노숙을 하던 와타나베가 어부에게 건네받은 5000엔을 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차라리 감동적입니다.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의 근본 감정일 테니까요. 

 제가 이 소설에서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하루키의 '체위'입니다. 왜 이 소설에는 이토록 많은 정사씬scene이 삽입되어 있는가, 따라서 <노르웨이의 숲>은 그냥 통속 소설 아니냐, 하고 치부해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차라리 섹스를 하루키의 '언어 그 자체'라고 봤습니다. 진정성이 사라진 말은 실패할 테니까요. 타나베와 나가사와가 긴자의 한복판에서 여자들을 꼬일 때, 그 달콤한 말에 섞인 진실의 순도는 몇 프로라고 보시는지. 말의 분절성,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결코 온전히 그려내지 못할 것입니다.(와타나베의 편지는 결국 불에 타죠) 관념 속에서 진정성을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육체라는 물질 속에서는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하루키의 문제의식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숲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기즈키와 나오코의 두 죽음은 상징적입니다. 나오코의 대사 즉 "우리는 보통 남녀 관계와는 많이 달랐어. 몸의 어떤 부분이 그냥 달라붙은 것 같은 관계였지."(P.223)가 가리키는 것은 두 사람이 곧 ‘하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두 사람은 섹스에 실패합니다. ‘하나의 몸’이 할 수 있는 성행위란 섹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스터베이션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의 어떤 시인*은 태초의 인간이 ''女+男', '男+男', '女+女'등의 한몸으로 붙어 있었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원래는 자웅동체였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너무도 완벽한 인간은 기고만장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노한 신이 인간의 몸을 두 개로 쪼갰으며, 이 분리된 인간들이 평생동안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떠돈다는...다소 감동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에 따르면 기즈키와 나오코의 관계는 그 자체로 인간이 넘지말아야할 선, 즉 금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금기를 위반한 대가. 즉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은 원죄를 짊어지지 않은 데에 대한 형벌을 치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오코의 말마따나 그들은 "지불해야 할 때 대가(성장의 고통)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를 죽음으로써 돌려받는 것입니다. 

 한편 나오코의 말을 미도리는 이렇게 받습니다.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P.419) 그렇다면 이 세계 어딘가에는 운명이라는 고리대금업자가 있고, 이러한 이유로 와타나베와 나오코 등은 그 '비스킷 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일들을 견뎌내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과자 봉지에는 운명론자의 체취가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괴로운 일을 수치화 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양의 괴로움을 나눈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불행에 관한 한 모두 평등하다는 것. 언뜻 동의가 되다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지 공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풍기지 않나요. 마치 일본의 네코 신, 마네키네코를 연상시키는 고양이스러움이 이 소설에는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고양이스러움이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지요. (물론 하루키 상의 얼굴은 고양이보다는 원숭이 쪽에 가깝겠습니다만) 실제로 해외 여행을 가던 차에 기르던 고양이를 맡길 곳이 없었던 하루키는 "내 고양이를 맡아주면 소설 한 편을 써드리겠습니다"라고 고단샤 출판부장과의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쓰인 것이 바로 이 <노르웨이의 숲>이고요. 그 연관성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며, 그의 여행 에세이<우천염천>에도 느닷없이 수도원의 고양들을 걱정하는 대목이 있어요. 무려 그리스까지 와서 말입니다. 애묘가는 박애주의자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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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 2004년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4
프로이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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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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