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함께 읽기다 -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이야기
신기수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최근에 나온 영화 <위플래쉬>나 다른 음악 영화들을 보면 오케스트라나 밴드의 합주가 왜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어요. 뭐 <위플래쉬>야 플레처와 앤드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은 묻힌 것이 사실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이나 <노다메 칸타빌레>에는 그런 어려움들이 확연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독서토론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때 진행자는 지휘자에, 토론자들은 연주자에 해당할 텐데, 이게 말이야 쉽지,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론과 현실은 어쨌든 다르므로.


 그런데 이론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다른 점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는 없는 걸까. 다양한 가능성과 우발성으로 점철된 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틀과 그에 따른 규범, 손바닥 크기의 매뉴얼쯤은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독서토론에 대한 사용자 설명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서 책의 뒷부분만 간략히 훑어봤어요. 누락된 부분도 많을 테니, 필요하신 분들은 정독을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자는 독서토론을 하는 이유가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저는 일단 대화를 좋아하고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토론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는 편이에요. 그건 일차적으로 제 성향이 호전적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실제로 저는 학창 시절에 부모님을 학교에서 자주 뵀어요. 물론 도시락을 집에 두고 와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소가 있었거든요.


 아무튼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따라서 전과자는 면했으므로, 어떤 분은 제가 갱생되었다고 보실 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학교 때 토론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게 전환점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아찔한 기시감에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말았는지도.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곁길로 샜군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볼까요.


 생각을 머릿속에 있는 작은 방에 비유해보면, 우리는 그 방을 들락날락거리면서 그 안에서 책도 읽고, 담배도 피우고, 섹스도 하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데 방안에만 있으면 아무래도 답답하니까, 가끔 친구도 만나고,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듣지요. 대화는 그 방을 나서는 순간에,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이 밖으로 나와 상대방의 생각과 정답게 악수하는 순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을에 연인과 같이 포석 위를 걷듯이. 그러다보면 풍경도 아름다워 보일 테고.


 외로움도 덜 할 거예요. 독서가 아무리 저자와의 대화라고들 하지만, 저자는 텍스트 너머에 있고, 만질 수도 없으며, 즉각적인 응답이 불가능한 대상이잖아요. 따라서 독서토론은 여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대안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현악기만 듣는 것 보다는 관현악기를, 관현악기만 듣는 것보다는 앞서 말한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드럼 소리를 같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는 영화에서 아주 훌륭한 드러머로 성장하죠.)


 자, 이제 우리는 무대에 섰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악기를 연주해야 하고 연주자는 지휘를 해야 합니다.(커피를 마시면서요.) 일단 악보가 있어야함은 물론. 당연히 그것은 책 한 권과 발제문에 적힌 논제겠지요. 여기서 책을 음정이라고 본다면, 논제는 박자와 템포 같은 거라고 봐요. '4분의 3박자', 혹은 '점점 빠르게'와 같은 것들 말이에요. 박자는 음정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끔 그것을 한정해 준답니다. 토론 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지도 몰라요.


 리듬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리듬을 조율하고 부드럽게 이끄는 이가 바로 지휘자이지요. 토론 전의 어색한 분위기는 연주자가 대기실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비슷합니다. 이때 연주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지휘자가 사용하는 각종 민간요법(?)들처럼, 진행자도 ‘가벼운 잡담’이나 ‘간단한 자기소개’ 등을 통해 토론자들의 근육을 이완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역발상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내요. 자신이 단점을 돌아가면서 말하면 상대방이 역발상으로 (즉, 장점으로) 돌려 말해주는 것. 가령,


 “제주도를 가보지 못했어요.”라는 상대방의 말에 “제주도를 못 가보셨다고요? 제주도가 하와이 뺨쳐요, 아직 못 보셨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제 그 환상의 섬을 보실 기쁨이 남았잖아요." 라고 답하든가, "너무 꼼꼼한 성격이라 힘들어요.”라는 말에 “꼼꼼하니 얼마나 좋아요. 저는 덜렁대서 늘 생활이 뒤죽박죽인 걸요.”라며 칭찬 일색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약간은 장난기를 발동할 수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한 사람씩 칭찬세례를 퍼붓다 보면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해진다. 한 사람씩 모두 하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다. (p.178)

뭐, 글쓴이의 말대로 이것이 최고의 방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토론이 시작되면 진행자는 “독후 소감 > 자유 논제 > 선택/찬반 논제 > 토론 소감”같은 형태로 진행해나갑니다. 이 중 ‘자유 논제’는 나뭇가지에, ‘선택/찬반 논제’는 뿌리(핵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흥미롭고 가벼운 주제와 질문으로 시작해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행자는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 진행자의 지휘가 시작되는 때는 ‘선택/찬반 논제’일 텐데요. 저 같은 파이터가 있는 경우, 진흙탕 싸움이 날 수도 있으므로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서로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또한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경우 반대 측에 후속질문을 제기해 균형을 잡아주기도 하구요.”(p.185)


 한마디로 대화의 리드미컬한 흐름을 유지하는 데에는 진행자-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한 셈이지요. 논제를 적은 발제문에 책의 간략한 개요를 적는 것도 필요합니다.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오신 분들도 있거든요. 또한 토론 중간에 의견이 바뀌는 배트맨(박쥐?)들이 생기는데, 이런 변화는 적극 권장하라고 글쓴이가 말합니다. 토론은 언어 게임이고, 찬성과 반대 측도 하나의 롤(역할)이므로, 저 같은 파이터를 만나더라도 너무 격앙되실 필요는 없다고요. 게임하다가 화내는 사람은 조금 바보 같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물론 저는 바보.)


 독서토론과 영화토론을 함께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영화토론을 관련 도서를 읽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최근에 <화장>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으니, 김훈의 소설(화장)을 읽고 그에 대한 토론을 나누는 식 말입니다. 책을 읽고 짧게나마 서평을 작성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머릿속에 입력된 책의 내용을 텍스트로 표출하는 작업이야말로, 글쓰기나 요약정리를 잘하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더욱 중요한 것은 무대 뒤의 다양한 악기들처럼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토론자 모두 자신과는 다른 의견의 상대방에게 반론은 하되, 예의는 지켜가면서 주장을 전개해야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 글에서 저를 파이터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악기로 비유한다면 타악기에 가장 가까울 것 같군요. 현악기처럼 부드러운 분들도 계실테고, 관악기처럼 이지적이신 분들도 계실테지만, 다 함께 공존하는 '책 읽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음처럼.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음악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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