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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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노르웨이의 숲>을 청년 와타나베의 '갱생기'로 보았습니다. 이전 세대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 실격>에서 드러낸 인간의 맨 얼굴이,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통해 철저히 기각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 <노르웨이의 숲>은 놓여있던 것입니다. 진정성이 상실된 인간은 수치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무슨 도 닦듯이 섹스를 해대는 나가사와와, 남자친구도 아닌 사내에게 음란한 말을 해대는 미도리, 나오코가 도착했던 요양원은 내면이 없는 '고백 전시관'이었으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와타나베는 테엽이 망가진 인형처럼 무너집니다. 이것이 바로 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인들이 안고 가야 할 운명이었으며, 동시에 하루키와 동시대의 작가들이 짊어지고 가야했던 무거운 짐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노숙을 하던 와타나베가 어부에게 건네받은 5000엔을 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차라리 감동적입니다.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의 근본 감정일 테니까요. 

 제가 이 소설에서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하루키의 '체위'입니다. 왜 이 소설에는 이토록 많은 정사씬scene이 삽입되어 있는가, 따라서 <노르웨이의 숲>은 그냥 통속 소설 아니냐, 하고 치부해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차라리 섹스를 하루키의 '언어 그 자체'라고 봤습니다. 진정성이 사라진 말은 실패할 테니까요. 타나베와 나가사와가 긴자의 한복판에서 여자들을 꼬일 때, 그 달콤한 말에 섞인 진실의 순도는 몇 프로라고 보시는지. 말의 분절성,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결코 온전히 그려내지 못할 것입니다.(와타나베의 편지는 결국 불에 타죠) 관념 속에서 진정성을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육체라는 물질 속에서는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하루키의 문제의식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숲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기즈키와 나오코의 두 죽음은 상징적입니다. 나오코의 대사 즉 "우리는 보통 남녀 관계와는 많이 달랐어. 몸의 어떤 부분이 그냥 달라붙은 것 같은 관계였지."(P.223)가 가리키는 것은 두 사람이 곧 ‘하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두 사람은 섹스에 실패합니다. ‘하나의 몸’이 할 수 있는 성행위란 섹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스터베이션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의 어떤 시인*은 태초의 인간이 ''女+男', '男+男', '女+女'등의 한몸으로 붙어 있었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원래는 자웅동체였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너무도 완벽한 인간은 기고만장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노한 신이 인간의 몸을 두 개로 쪼갰으며, 이 분리된 인간들이 평생동안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떠돈다는...다소 감동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에 따르면 기즈키와 나오코의 관계는 그 자체로 인간이 넘지말아야할 선, 즉 금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금기를 위반한 대가. 즉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은 원죄를 짊어지지 않은 데에 대한 형벌을 치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오코의 말마따나 그들은 "지불해야 할 때 대가(성장의 고통)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를 죽음으로써 돌려받는 것입니다. 

 한편 나오코의 말을 미도리는 이렇게 받습니다.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P.419) 그렇다면 이 세계 어딘가에는 운명이라는 고리대금업자가 있고, 이러한 이유로 와타나베와 나오코 등은 그 '비스킷 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일들을 견뎌내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과자 봉지에는 운명론자의 체취가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괴로운 일을 수치화 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양의 괴로움을 나눈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불행에 관한 한 모두 평등하다는 것. 언뜻 동의가 되다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지 공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풍기지 않나요. 마치 일본의 네코 신, 마네키네코를 연상시키는 고양이스러움이 이 소설에는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고양이스러움이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지요. (물론 하루키 상의 얼굴은 고양이보다는 원숭이 쪽에 가깝겠습니다만) 실제로 해외 여행을 가던 차에 기르던 고양이를 맡길 곳이 없었던 하루키는 "내 고양이를 맡아주면 소설 한 편을 써드리겠습니다"라고 고단샤 출판부장과의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쓰인 것이 바로 이 <노르웨이의 숲>이고요. 그 연관성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며, 그의 여행 에세이<우천염천>에도 느닷없이 수도원의 고양들을 걱정하는 대목이 있어요. 무려 그리스까지 와서 말입니다. 애묘가는 박애주의자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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