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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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철은 가수 김경호를 닮았다.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답게, 어쩌면 철학자보다는 예술가 쪽에 가까운 문장을 선보이는데, 그의 문장은 분명, 감각적인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꽤나 잘 읽히는 면이 있다는 얘기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후 <피로사회>는 한국사회에 회자될만 했고,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까지도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심리정치>를 읽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조금 유감이다. 그는 자신의 손이 짜부라뜨린 이 얼굴을 예상이라해도 했듯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름다움에 관한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근간 <아름다움의 구원>이 그것일텐데) 하루 빨리 이 책이 나오길 바란다!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담론은 이제 한계에 이른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심리정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빅데이터를 도구로 삼아 시민들을 분석하고 심리까지 조정한다는 것인가? 이 마이크로 타케팅 기법은 전작인 <투명사회>와 비교했을 때 어떤 변별점을 가지는가? 빅데이터 얘기는 <투명사회>말미에서도 나왔고 이번 책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고작 세운다는 것이 들뢰즈가 말한 "바보 되기"인데 이는 결국 불통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는 어떤 사유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단순 정보로써, 지식을 파편화시켜버리는데, 이를 지연시키는 바보되기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바놉티콘(banopticon), 즉 미국 데이터 회사 엑시엄이 지정한 웨이스트(쓰레기) 계급 되기와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자본이 갖는 유용성을 간과한 채 신자유주의만를 공격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 책의 대안은 현실적이기보다는 공허한 것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바보 되기'란, '시인 되기'이다. 알 수 없는 개인적 언어와 장광설로 점철된 한국 현대시들의 난해함은, 이 '바보'(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들의 말과 그리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로지 무용성을 향한 일보 전진은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있는 유용성에 대항하는 매력적인 주장이지만, 현실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면 이 '바보 되기'란 불가능하다.


 한병철 자신도 베를린 대학교수이고 돈을 버는 한 집안의 가장이고, "접속이 안 되면 불안해"(인터뷰 p.22)하는 디지털리언이 아닌가. 그에 따르면 디지털리언들의 손가락(디키투스)은 빅데이터-신자유주의의 (탈주체화된)성기(팔루스)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성기로 이 책에 마스터베이션을 한 것 아닌가? 한 마디로 문학-예술을 한 것이 아닌가? 문학은 섹스보다는 마스터베이션에 가깝고, 직선보다는 곡선에 가까운 선을 그린다. 한병철은 네러티브가 결론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정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측면일 뿐, 문학은 결코 결론적이지도, 직설적이지 않다. 그것은 에둘러가는 동시에, 세계의 최하층부로 내려간다. 형이상학이 굴뚝을 겨냥한다면 문학은 수도관에 머무른다. 그런데 이것은 무용한 것이다.


 결국 철학자와 작가는 한 시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탐사등의 스위치를 최초로 올리는 사람으로서, 한 권의 책은 그 스위치에 해당할 것인데, <심리정치>는 전작인 <투명사회>를 답습함으로써 담론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마스터베이션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거대담론이나 문제 제기 역시 어느 정도는 생산적인 측면을 지니고,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와 길항하면서도 유비 관계를 이룬다. 신자유주의를 겨냥한다는 저자의 총구를 오히려 자신에게 겨누는 꼴로 만든 것이다. 그(한병철)는 노동하고 있으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좀 과장하자면) 고해실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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