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어머니는 왜 딸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까.


에밀레종의 아이, 바다에 빠진 아이, 날개를 잃은 선녀, 버려진 바리 ... 처음에는 한국 설화를 새롭게 변주한 이야기 정도로 읽었다. 하지만 소설을 따라갈수록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한 여성의 삶이었고, 끝내 딸에게 직접 설명하지 못한 기억과 상실의 언어였다.



남극 연구기지에서 반중성미자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엘사는 어머니의 임종 이후 가족의 과거를 더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부모 세대의 삶,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이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침묵의 시간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흔적을 찾던 과학자는 어느새 가족의 역사와 자신의 뿌리를 탐색하고 있다.




소설 속 네 편의 설화는 작품의 또 다른 줄거리다. 에밀레종 설화를 바탕으로 한 「종속의 여자아이」, 심청 설화를 변주한 「바다에 빠진 아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뒤집은 「선녀 가정주부」, 그리고 바리데기 설화를 새롭게 풀어낸 「바리 자매」. 이 이야기들은 희생과 버려짐, 이별과 귀환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 세대의 삶과 포개진다.


특히 「바다에 빠진 아이」가 오래 남았다. 어릴 적 읽었던 심청은 효녀의 표상이었지만, 이 소설의 심청은 바다를 건너는 존재다. 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건너가고, 상실을 통과한 뒤 다시 돌아오는 인물이다. 책을 덮고 나니 심청은 효녀가 아니라 귀환의 인물로 기억됐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이민자들의 삶과도 어딘가 닮아 있었다.



어머니가 왜 그런 이야기들을 딸에게 들려주었는지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직접 설명하기 어려웠던 삶을 이야기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전쟁의 기억, 이민자로 살아가는 고단함, 미국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설화의 언어로 번역해 딸에게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겪는 인종차별의 경험도 놓치지 않는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오스카르의 이야기는 그 질문을 더욱 넓힌다.  그의 이야기는 국적보다 기억이, 혈통보다 이야기가 정체성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있다. 바로 죽은 언니다. 엘사의 곁에서 함께 성장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언니 유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를 흐린다. 소설은 그 존재를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설화와 유령, 과학과 신화를 같은 세계 안에 나란히 놓는다. 반중성미자를 연구하는 과학자인 엘사가 죽은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이 소설이 현실의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켄싱턴 룬 석판 역시 흥미롭다. 북유럽인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북미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담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진다. 그러나 소설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일보다 사람들이 왜 자신의 기원을 확인하려 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돌에 새겨진 기록도, 설화도, 가족이 전해주는 이야기들도 결국은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오로라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같은 오로라를 바라보면서도 북유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하늘을 가로지른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신들의 흔적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과학은 오로라의 원리를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만의 기억과 신화를 덧입힌다. 그 장면을 읽으며 이 소설이 왜 설화를 품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간은 사실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한다.


엘사가 연구하는 반중성미자도 그런 의미를 품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손에 잡히지 않지만 흔적을 남기는 것. 가족의 기억도, 떠난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도 그렇다.



<우리, 메아리처럼>은 설화와 과학, 이민과 입양, 역사와 신화를 한데 엮어낸 독창적인 소설이다 . 딸이 뒤늦게 어머니의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 그리고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이야기의 힘이 묵직하다.


메아리는 원래의 소리와 똑같지 않다. 시간과 거리를 지나며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도 처음 울렸던 목소리의 흔적만은 남는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그랬다. 오래전 건네진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삶 속에서 다시 울린다. 제목 그대로, 메아리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