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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메이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Tracy Chevalier의 <글래스메이커>는 베네치아 무라노 섬의 유리공 가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편소설이다. 중심에는 오르솔라가 있다. 그녀는 유리를 만드는 기술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또 답해가는 인물이다.

무라노의 유리 산업은 폐쇄적인 질서 위에 세워져 있다. 기술은 가문의 자산이며,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전수된다.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기를 기대받는다. 오르솔라는 그 구조 안에서 자라나지만, 자연스럽게 경계 바깥을 바라본다. 작업장의 열기와 유리의 변화는 그녀에게 금지된 세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렬한 유혹이다.

그녀가 불 앞에 서려는 선택은 단순한 직업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가 규정한 여성상에 대한 질문이다. 가문을 지키는 딸이 될 것인가, 기술을 배우는 장인이 될 것인가. 이 갈등은 소설 전반에 긴장을 만든다. 전통은 억압이면서도 뿌리다. 오르솔라는 그것을 끊어내기보다 내부에서 흔든다.
사랑은 그녀의 삶을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감정은 깊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관계가 흔들리고 이별이 찾아와도 오르솔라는 멈추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시간이 길게 이어지며, 그녀는 다시 작업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통과한 뒤 남는 것은 공허가 아니라 더 또렷해진 자의식이다.

이 작품의 서사 구조는 독특하다. 한 인물을 중심에 두되, 이야기는 수 세기를 건너간다. 역사적 변화와 사회적 격변이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유리공의 기술은 이어진다. 시간은 단절이 아니라 축적처럼 다루어진다. 과거의 선택은 다음 세대의 조건이 되고, 개인의 삶은 도시의 역사와 맞물린다. 오르솔라는 특정 시기에 머무르면서도, 동시에 시대를 넘어선 인물로 읽힌다.
저자는 장인의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녹아내리는 유리의 색, 형태를 잡는 순간의 집중, 식어가는 표면의 긴장감이 생생하다. 반복과 실패, 숙련의 과정이 인물의 내면과 나란히 전개된다.

<글래스메이커>는 빠른 성공이나 극적인 반전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오르솔라의 삶은 거창한 선언보다 지속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술과 전통, 노동의 의미는 점점 가볍게 소비된다. 이 소설은 느린 시간과 축적의 가치를 보여준다. 또한 특정 시대에 제한되었던 여성의 삶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한 인물을 통해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