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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 p116
그의 유명한 말로 철혈재상이란 불린 비스마르크. 우리는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거나 또는 책을 통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프로이센과 독일 연합을 종식하고, 독일의 통일을 일궈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강력한 독일은 사실상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활동하던 19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강국이었고, 독일 연방은 35개의 제후국과 네 곳의 자유도시로 이루어진 느슨한 결합이었다.
하지만 이후 국가와 사회의 제도를 정비하고 완전한 정당 체제를 갖춘 독일제국이 되었다. 수도 베를린의 인구는 비스마르크가 탄생 시(1815년) 20만 명에 불과했으나, 그가 사망했을 때(1898년)에는 이미 10배나 증가한 2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 책의 서문에는 19세기에 독일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농업국가에서 강력한 산업국가가 되었다. 1900년쯤에는 철강, 제련, 화학, 전기공업이 모두 앞서나갔다. 무엇보다 교육의 발전으로 19세기 말쯤 문맹 비율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19세기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뤄진 폭풍 같은 변화의 시기, 비스마르크가 영향을 끼친 사례는 끝이 없다.” - p18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비스마르크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교과 복지제도다. 강력한 주변국에서 독일 연방을 지켜내고, 제국을 이룰 수 있도록 ‘다극외교’를 제대로 구사했다. 사실 우리나라도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사이의 복잡한 셈속에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극외교’를 잘 해야 한다. 감정에 이끌리기 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국의 이익을 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비스마르크의 외교술은 참조할만 하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보인 비스마르크는 30대 전까지는 방황 속에 살았다. 영주 가문에서 태어나서 방탕한 삶을 즐겼다. 음주와 가무, 도박을 즐기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껑충한 키에 깡마른 체구, 머리숱 많은 밝은 금발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던 17세 소년은 대학생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 p29
“비스마르크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확고부동한 목표를 향해 교육과정을 밟아나갔다.” - p32
그는 공직에 진출한 후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여전히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는 도박 빚으로 생활이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지역으로 전배를 요청했지만, 결국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농업에 열중했다. 주 목적은 도박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많은 책을 읽고, 사상적으로 더 발전하는 시기였다.
“빚 독촉에 시달리느라 아헨에서 생활이 곤란할 지경에 이르자 비스마르크는 포츠담시 정부로 전출을 신청했으며, 이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 p35
“비스마르크는 이 시기 동안 괴테, 실러, 장 파울, 울란트, 하이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서정시와 철학책을 열심히 읽었다.” - p37
그는 32살에 결혼(1847년)을 하고 나서 마침내 안정을 찾았다. 그는 190cm의 거구이지만, 의외로 마음은 여렸다고 한다. 겉으로는 매서운 입담을 자랑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방황의 시절을 겪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그는 통합신분제의회에 진출하여 정치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연설로 명성을 떨쳤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치인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중에 그의 연설문을 읽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와인을 마신 것처럼 즐거움을 느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의 연설은 수사학의 최고 경지를 과시할 정도로 대가의 솜씨였으며, 동시에 외교 전술의 백미였다.” - p69
그는 1850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맺은 ‘굴욕의’ 올뮈츠 협약에서 정부를 변호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사실 이 협약으로 프로이센은 연합을 포기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복귀해야 했고, 이면 조약으로 국경 지대에 배치한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이로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은 무산되고, 오스트리아에 주도권을 넘겨줘야 했다. 이러한 왕과 정부를 대변하면서 그는 마침내 36세에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을 지내면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을 키웠다. 또한 중요한 정치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성품과 목표, 야망도 꿰뚫어보았다. 11년의 외교관 생활 후 그가 47세에(1862년) 다시 프로이센 정부에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유럽 정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정치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수상과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말과 표정으로 프랑스와 함께할 수도 있다고 위협을 해야 오스트리아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작은 공국들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어 우리에게 훨씬 더 좋습니다.” - p91
이후 덴마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1867년 북독일연방이 결성되었고, 비스마르크는 연방 수상이 되었다. 1870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또 다시 승리하고, 독일 남부의 공국들과 함께 독일제국을 창설했다. 그는 마침내 1871년에 통일된 독일의 제국 수상을 맡았다. 1883년에 사회보장 입법을 시작해서, 의료보험, 재해보험, 상해와 노년 보장 보험도 만들었다. 그는 제국의 수상이 된 후 20년간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각종 사회 보장 제도를 입법화했다.
‘철혈재상’으로 불리고, 보수파의 우두머리로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반면 그를 추종하는 세력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던 독일연방을 통일해서, 독일제국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독일의 모습을 갖추게 한 것이다.
물론 그가 만든 독일제국으로 인해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빌헬름 2세(1888년 즉위)가 비스마르크의 충고를 듣고,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참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비스마르크의 퇴임과 더불어 균형추는 사라졌다. 이후 독일제국은 호전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붕괴하고 말았다.” - p276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비스마르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전쟁광이 아니고, 철저히 실리를 추구한 보수주의자였다. 전쟁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구했고, 이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저자는 그가 이루고자 했던 독일 통일과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비평과 호평을 함께 하면서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근대 독일 역사와 이를 둘러싼 국가들의 역사도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 한 줄 요약 : 비스마르크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독일 제국을 완수하고, 최초의 사회복지제도를 통해서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 생각과 실행 : 비스마르크의 ‘다극외교’ 전략은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의미 없는 전쟁이나 명분보다는 국민들을 위한 실익을 추구한 점이 본받을만하다. 또한 사회제도를 먼저 도입하여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추구했고, 국가의 내실을 다지면서 부국강병을 이뤘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