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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 트로이 전쟁에서 마케도니아의 정복까지
김진경 지음 / 안티쿠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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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분명 고대사의 전문가이며 고대 그리스사에 대해 충분한 학문적 권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고대 그리스 역사 관련서를 이미 읽고 선행 학습이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쉽게 읽힌다. 


100자평에 재미없다고 쓴 사람이 있는데, 취향은 존중이지만 그렇게 재미가 중요하면 시오노 나나미 같은 사람이 쓴 비역사서인데 역사서인 척 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대학 1학년 학부생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가 이 정도 내용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강의를 해주는 역사 전문가가 옆에 있다는 전제 하에서...그렇다...죄송)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을 원래 저술의 목적에 맞추어서 입문서로 평가할 때 발생한다. 


우선 저자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간혹 가다가 설명도 없이 새로운 용어가 튀어나온다.


예를 들면, 11쪽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프라트리아"는 클레이스테네스의 부족 개편 이전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지역 형제단을 말하는데, 처음에는 혈연 집단인 씨족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시에는 더 이상 혈연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더 뒤에 나오는 메가라 조례 부분도 설명이 빈약하다.)


추측이지만, 가끔 가다가 저자는 자신이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에 설명했던 용어를 이미 책 속에서 설명한 용어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책 속에 있는 지도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책 속의 서술에는 등장하는 지명이 지도에는 안 나타난다. 나는 이 책 읽으면서 다른 고대 그리스사 책에 있는 지도와 영문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지도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글자로 된 지명을 읽기만 하는 것과 그 위치를 정확하게 이미지로 그리면서 읽는 것은 이해나 기억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낳는다. 이 점에서 보면 교육적으로도 이 책에는 문제가 좀 있다.


그리고 역사적 유물의 사진만 수록할 것이 아니라 그 발굴 장소나 제작 추정 시기, 소장 박물관 등과 같은 정보를 쓰는 것이 상식인데 그딴 건 다 무시해버렸다. 이거 저작권상으로도 문제가 있다.   


종종 역사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는 주장을 서술할 때 특정 입장을 그냥 단순히 참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말하지만 이건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오류도 있다. 263쪽에서 저자는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사고라스를 혼동한다. 그 전에 페리클레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반복되는 부분인데 앞에 했던 말을 스스로 뒤집는 꼴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전거나 출처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는 것이다. 


학자가 뭔가를 설명할 때는 본인이 직접 발견한 것이 아닌 이상 정확하게 출처를 인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단 한 개의 제대로 된 문헌 인용도 없다!!!

이건 학자로서의 지적인 정직성을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의 큰 오점이다. 대중적인 독자는 별 신경 안쓰겠지만,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해보려는 학자적 자세를 가진 사람 입장에서 보면 거의 충격적이다. 참고 문헌 목록 하나가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저자가 기껏 한다는 인용이란 학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뿐인데, 덕분에 나는 학자 이름+영문 주제어를 구글에 검색해서 문헌 서치를 하면서 책을 읽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학자적인 자세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필요하지만 그냥 대충 교양 좀 쌓아보겠다는 독자에게는 이런 수고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런 서술을 하는 근거가 정확히 무엇인지, 다른 역사서의 서술과 비교하면서 따져보고자 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게 아주 중노동이다. 


마지막으로 오타가 좀 있다. 특히 조사가 잘못 쓰인 경우들이 꽤 있는데, 편집자는 뭘 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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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빗 (스페셜 에디션)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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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들 잘 써놨으니 넘어가자. 


번역은 원서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번역자는 중간중간 문장 몇개씩을 생략해가면서 번역하고, 생략되지 않고 번역된 원서의 문장도 의역이라고 할 수준을 넘어서 요약/정리 수준의 재서술을 거쳐서 재탄생된다. 달리 말하면, 역자는 원서를 읽으면서 정리를 한 다음에, 정리된 글을 가지고 자신이 풀어서 쓰는 2차 창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번역은 원칙적으로 2차 창작이다. 그러나 번역인 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역자는 이 선을 약간(?) 넘은 것 같다. 


  이런식으로 과감하게 생략, 요약, 재서술하는 방식이 요즘 유행인 것 같다.  

  

  책 분량도 짧아지고, 번역하기도 편하고, 대중을 위한 가독성도 높아지니 편집자나 출판사 입장에서도 좋은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번에도 완역인줄 알고 샀는데 편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서 매우 유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초판 13쇄 기준 105쪽

  "특히 쥐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유사한 과정을 거쳐 신경 시스템이 진화해왔다. 보상을 얻고자 행동하고 그러다 우발적 사태를 경험하며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존을 학습했다. 이 말은 모든 포유류, 특히 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쥐의 뇌 역시 인간의 뇌처럼 학습 행동과 습관 행동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지 않을까? 이를 실험한 연구가 있다.

  인간의 '전방 미상핵'과 유사한 연역인 '배내측 선조제 회로에 이상이 생긴 쥐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보상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즉, 보상과 신호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주17) 배내측 선조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쥐는 레버 누르기, 미로 탐색 등 먹이를 얻는 방법을 학습하지 못했다."


  원문: 

In a stroke of luck for research, all mammals acquire habits. People, dogs, and whales thrive by learning contingencies between actions and rewards. Our neural systems are structured in similar ways to learn from rewards. With enough practice, all can learn habit associations between contexts and the rewarded response. 

   Research with rats has yielded many important insights about human habits. And with rats, researchers can use more intrusive interventions than with people. In rats, for example, a particular brain area can be disabled to study effects that we humans would never willingly experience. Many medical breakthroughs that reduce human suffering can be traced to rat studies. Rats have difficulty learning what to do to get a reward after they are given lesions in the dorsomedial striatum circuit, an area of the rat brain similar to the anterior caudate in humans. (note 17) Rats disabled in this way do not easily learn to get rewards by pressing a lever in a cage or turning a certain direction in a maze. 


  번역문의 앞뒤 문맥을 다 찾아봐도 위에 밑줄친 원문의 문장들에 대한 번역은 없다. 나머지 부분도 원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결코 아니지만, 뭐... 그 취지는 보존하고 있으며, 잘 읽히니까 좋은게 좋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번역 안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꽤 많다. 번역본(초판 13쇄 기준)의 108쪽으로 가면 원문에는 있는 운전의 예시가 번역본에는 없다. 서술도 좀 많이 다르다. 


  역자는 'context'를 '상황'으로 번역하는데, '맥락'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맥락은 상황(situation)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2부 6장에서 저자의 정의를 보라. 번역서는 148쪽에 있다. 원저자는 context가, 나를 제외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규정한다. '상황'은 이보다는 덜 추상적이고 범위가 더 좁은 것을 가리키지 않나?) 번역서 108쪽의 예를 가지고 말해 보자면, 브런치를 먹는 시간과 날(time and day)은 그 자체로는 어떤 상황이라기 보다는 맥락적 요소에 가깝다. 뭐... 내가 심리학의 전문가는 아니고 번역자가 그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설명을 안 해줬으니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 더 헷갈리는 것은 역자가 'context'와 'situation'을 모두 '상황'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108쪽에서는 'context'가 '상황'으로 118쪽에서는 'situations'가 '상황'으로 번역되어 있다. 왜일까?


  112쪽에 나오는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대한 설명은 역자가 삽입한 것이지 원저자가 한 것이 아니다. 원저자는 비용-편익 분석이 자동적으로 과제 수행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고만 말한다. 특히 "뇌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에 대해 비용-편익 분석을 거쳐 자동으로 반응할지 아니면 의식적 자아라는 기병대를 소환할지 판단한다."는 역자가 사실상 자신이 이해한 바를 풀어서 해설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이렇게 쓰면 뇌가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모든 과제를 일일히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서 자동적인 매커니즘(습관)에 맡길지 아니면 의식적인 실행 제어를 할지를 계산한다는 것처럼 읽힌다는 것이다. 원저자는 이렇게 강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쳐서 의식적인 실행 제어 체계에 아웃풋을 제공하는 분석/판단 모듈이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 강하다.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진술을 보자. 


   "양적으로 제한된 정신력의 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뇌는 늘 극단적인 긴출을 택할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습관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우리는 모든 사안에 기병대를 투입할 수 없다. 실행제어 기능이 처리할 수 없는 임무에 대해서는 다른 영역의 힘을 빌려야 한다. 바로 습관 말이다. 그리고 습관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 모든 번역문(?)들에 대응하는 영어 문장은 원서에는 없다. 이거 하나 빼고. "Given the costly nature of control, we use it sparingly."


이렇게 역자 자신의 해설을 원저자의 것처럼 정성스레 넣어주면서, 왜 원저자의 설명이나 예시는 번역을 안할까? 이쯤 되면 분량 문제가 아닌 것 같다. 


  114쪽에서 스트룹 과제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원저자는 동물의 형태와 글자 사이의 충돌을 의식하면서 정답을 말하려는 노력이 우리 뇌의 dorsal anterior cingulate cortex를 활성화시킨다고 말하고, 주석 24번을 붙여놨다. (이 용어를 번역하자면 '상부 전측 대상엽'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번역이 안되어 있다. 앞뒤 문장들의 번역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역이라기 보다는 편역에 가깝다. 


  146쪽의 [역장이론] 소제목 아래의 두 문단(147쪽까지 이어짐)은 원서에서는 해당 장(Chapter)의 거의 뒷 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역자가 나름대로 요약해서 붙인 것이다. (원서의 96쪽. 해당 챕터는 98쪽에서 끝난다.) 이런 식으로 구성을 역자가 자기 멋대로 완전히 바꾼 부분이 꽤 있다. 본인 요약 노트도 아니고 번역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되지 않은가? 

  148쪽의 마지막줄에서 시작되는 문단과 그 위 문단 사이에는 무려 원서의 27개 정도 되는 문단이 번역되지 않고 빠져 있다. 저자는 기업의 마케팅 사례 등을 들면서 자신의 설명을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 긴 부분이 통째로 다 빠졌다. 레빈의 이론 설명과 6장의 후반부를 합체시키면서 중간 내용이 없어졌다. 대충 원서의 90-96쪽에 걸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라진 부분이 7장의 번역에 나오기 시작하고, 원서에 있는 7장의 내용은 다시 사라지고 번역서의 10장에 나온다. 그러면 10장의 내용은 어디로 간건가? 계속 이런 식이다. 이제는 원서의 내용을 역자가 맘대로 잘라서 붙이기를 하면서 역자의 편집본이 되어버린다. 이제 비교하기도 힘들다. 번역본의 이 문장, 이 문단이 원서의 여기 저기서 잘려나와 합체되어 있고, 원래 있어야 할 내용은 또 사라지거나 일부가 다른데 가서 붙어있다.  

  

  계속 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이제는 슬슬 화가 난다. 그만하자. 


  다시 말하지만, 이 번역서는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역자가 원서를 읽고 정리한 내용을 다시 번역자의 문장으로 다시 풀어서 재구성한 책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원저자가 이런 식으로 2차 창작을 심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계약 당시에 합의를 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원저자는 학자이며, 번역서의 2부처럼 공격적으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같이 법칙1-5까지 번호를 달면서 이거해라, 저거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학자인 저자(웬디 우드)는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된 것을 알면 분노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원서에 있는 삽화들이 번역본에는 없고 표들로 대체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저핵의 형태와 뇌 내부의 위치를 보여주는 삽화가 원서에는 있는데 번역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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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강의 - 개정판
김진경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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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편은 너무 짧고, 스파르타 편은 무슨 논문도 아니고 너무 난삽하게 써서 뒤로 갈수록 지루하다.사실 사료로 치면 아테네에 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입문 강의로 쓴 책에서 분량 배분을 이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개별 저자들 재량에만 맡기고 누가 총괄로 지휘를 안한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 

 

뭐 이건 괜찮은데, 오류가 간혹 있음. 


p.104쪽에서는 아기아다이 왕가의 레오니다스 왕 이야기를 하면서 레오니다스 왕의 전신상 사진을 붙여놨다. 그런데 이건 테르모필라이 전투로 유명한 레오니다스 1세 왕을 기념하여 그리스에서 만든 상이다. 다른 레오니다스임. 


p. 130에서 필리포스 2세가 왕자 시절에 "기원전 364년에서 기원전 307년에 이르는 동안 테베에서 인질생활을" 했단다. 아니 무슨 즉위한 것이 기원전 359년이라고 윗줄에 써놓고... 인질생활을 50년 넘게 한다고? 왕하면서 인질도 같이 했다는 말인가?


필리포스가 테베에 있던 기간은 368-375 BC이다. 개정판이라면서 이런 명백한 오류를 안 고친 건 왜일까? 개정판이라면서?


p.143에서는 쾌락주의 설명하면서 난데없이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 이야기를 한다. "쾌락주의자들은 마음의 평정, 즉 아파테이아를 얻으려고 했으나..." 아파테이아 아니고 아타락시아겠지. 편집자가 출판 전에 원고들을 정독 한번만 했어도 이런 오류는 안 나온다. 그리고 헬레니즘 철학사에 대한 설명이 기껏해서 그 옛날 입문용 철학사책 한국어 번역인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라는게 말이 되는가? 앞에서는 앤소니 롱이나 다른 학자들의 전문적인 문헌을 살짝 인용하더니... 이건 거의 확실한 것이, 저자가 헬레니즘 철학사에 대한 전문 문헌을 제대로 안 읽고 대충 땜질한 것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아마도 저자의 전공이 사상사가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국내 전문가들이 쓴 책이라고 광고해서 믿고 샀는데, 읽으면서 기운빠진다. 저자에 따라서 내용의 품질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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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변명 -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의 불편한 진실
베터니 휴즈 지음, 강경이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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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자가 고생한 것 같기는 하다. 이것 저것 조사해서 역자주를 많이 달았다는 것은 좋다. 다만 역자주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출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마틴의 <고대그리스사> 정도 말고는 출처 인용이 없다.) 원서에 있는 참고문헌목록의 2차 문헌 목록은 아예 수록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책이 완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서는 544페이지며 한국어로 완역을 했다면 그 두 배 정도, 대충 천 페이지가 넘어갔을 것이다. 역자는 소위 <프롤로그>로 제목이 달린 앞부분에서 작가가 쓴 상당부분의 소개글을 그냥 거의 통째로 삭제해버린다. 원서에는 'Introduction', 'The dramatic story of Socrates -sources and approach', 'Dramatis Personae'의 부제가 달린 상당한 분량의 소개글이 있다. 자신의 저술의 기초가 된 문헌 출처와 자신의 연구 방법 등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다 날아가 버렸다. 아마도 번역자나 편집자는 이런 부분을 일일히 다 번역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번역서를 지나치게 길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대중용 번역서를 만든다는 목적 아래 다 번역하지 않고 한방에 뭉뚱그린 것 같다. 뭐 이해는 된다. 그러나 나 같이 의심되면 출처를 찾아보고, 다른 자료와 대조해보고, 원저자가 이 부분은 어떤 방법론이나 의도에 근거해서 출처를 해석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독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미주도 선택적으로 번역되었으며 상당부분이 삭제되었다. 특히 짜증나는 것은 원저자가 인용문들의 출처를 밝힐 때 학계의 정확한 인용 관행에 따라서 페이지 번호를 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페이지 번호를 다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스테파누스 쪽수가 다 날아갔다. 


중간중간 번역자는 문장들, 심지어는 긴 단락들을 그냥 번역하지 않고 넘어간다. (나는 지금까지 아마존 킨들로 구입한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해 보면서 원서의 20퍼센트 정도를 읽었으며, 여기까지 대조해본 결과가 이거다.)


어쨌든 정말 중요한 점은 역자가 정확하게 이 책은 완역이 아니라 편역임을 밝혔어야 했다는 것이다. 편역서를 읽는 것과 완역서를 읽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적인 정직성은 학계에만 적용되는 가치 기준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천병희 교수의 원전 완역의 <일리아드>를 읽는 것과 중역/편역판을 읽는 것의 차이를 한 번 생각해보라.) 뭔 대중서 가지고 뭘 그리 깐깐하게 구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데 원저자는 자신의 책이 편역된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번역서가 잘 읽힌다는 점에서 좋고, 책의 두께와 과다한 정보(?)를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빠른 시간에 완독했다는 보람을 추구하는 다수의 독자들의 소위 '니즈'에 부합했다는 점에서는 꽤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제대로 공부해보려는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책이 아니다.  


과감하게 요약: 맘에는 안 들지만 번역자 수고했음. 빨리 빨리 잘 읽힘. 그런데 완역 아니고 편역인데 왜 이야기 안해줌? 그리고 고전 인용 다음에는 제대로 해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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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돈 2021-02-0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번역된 부분들도 ... 초월번역은 아니지만 의역이라고 보기에는 심할 정도로 변형 번역(?)이 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다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가독성 향상 번역이라고 역자가 변명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롱 버전을 본 것으로 생각하겠다.
 
앨런 튜링, 지능에 관하여
앨런 튜링 지음, 노승영 옮김, 곽재식 해제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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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책이라서 샀다. 대학원 다닐 때 튜링의 논문을 몇 개 읽어보았었는데, 이 중요한 논문을 번역한다니, 출판사의 시도는 참 좋다. 


그러나 해제부터 오류가 나온다. 10페이지:

멈춤(halting) 문제는 결정문제(Entscheidunsproblem)가 해결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불가능하다고 증명되는 문제이며, 엄밀하게 말해서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해제하는 사람은 양자를 혼동한다. 독일어로 "Entscheidung"은 "결정", "decision"으로 번역된다. 실제로 영어 문헌에서도 이 문제의 번역은 "decision/decidability problem"이다. 


번역은 어떤가? 일단 읽어 본다. 

26 페이지의 (d)의 조건문 번역이 걸리지만 넘어가자. 

그러나 27페이지에서 오역이 나온다. 마지막 문단 첫째 줄을 보라. 


"괴델 및 그 밖의 정리에서 비롯하는 논변(반론(d)의 기본 바탕은 기계가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능의 조건이 아니다."

 

원문은 이거다: "The argument from Goedel’s and other theorems (objection (d)) rests essentially

on the condition that the machine must not make mistakes. But this is not

a requirement for intelligence." 


이렇게 번역하는 게 낫다: 괴델과 다른 정리들로부터 나오는 논변은 본질적으로 다음의 조건에 의존한다. 기계가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조건. 그러나 이것[즉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은 지능을 갖기 위한 요구조건이 아니다. 


이전 맥락을 본면 실수를 범하는 것은 지능의 정도 차이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지능의 결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논증을 튜링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계가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니! 이게 뭔 소린가!


그냥 <The essential Turing>을 읽는 게 낫겠다. 


내 도서구입비는 그냥 출판사에 기부했다고 생각해야 겠다. 


제가 나중에 취직해서 정규직 되면 저랑 번역 하나 합시다... 이면 좋겠지만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번역이냐. 논문이나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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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 2019-11-1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번역자입니다.
지적하신 내용을 정오표에 반영했습니다.
http://socoop.net/Turing/corrections/

임명균 2019-12-01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노승영 번역자님
저는 eBook을 사려고 하는데요, eBook에 이미 수정사항을 반영하셨나요?
아직 안 하셨다면 바로 반영해주실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승영 2019-12-02 13:43   좋아요 0 | URL
전자책 출간 및 수정 사항 반영은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거라서 제가 답변드리긴 힘들 듯해요. 조만간 2쇄를 찍을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전에 반영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에이치비 프레스 2019-12-17 16: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담당 편집자입니다. 수정사항을 반영한 ebook은 12월 19일부터 서비스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웰에오웰로 2020-03-03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번역가를 소환하고 책을 수정해버리는 당신은 멋쟁이

끄알루어히 2020-05-1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이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인데요. 번역 오류가 위의 예시 외에도 있나요? 읽어도 내용에 크게 문제가 없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풍돈 2021-02-14 01:05   좋아요 0 | URL
아이구야... 댓글에 이제야 답을 남기네요. 근데 제가... 원문대조하면서 읽느니 그냥 원문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냥 영어 텍스트로 봤어요. 그래서 오류가 더 있는지는 모릅니다. 죄송해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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