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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빗 (스페셜 에디션)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들 잘 써놨으니 넘어가자.
번역은 원서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번역자는 중간중간 문장 몇개씩을 생략해가면서 번역하고, 생략되지 않고 번역된 원서의 문장도 의역이라고 할 수준을 넘어서 요약/정리 수준의 재서술을 거쳐서 재탄생된다. 달리 말하면, 역자는 원서를 읽으면서 정리를 한 다음에, 정리된 글을 가지고 자신이 풀어서 쓰는 2차 창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번역은 원칙적으로 2차 창작이다. 그러나 번역인 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역자는 이 선을 약간(?) 넘은 것 같다.
이런식으로 과감하게 생략, 요약, 재서술하는 방식이 요즘 유행인 것 같다.
책 분량도 짧아지고, 번역하기도 편하고, 대중을 위한 가독성도 높아지니 편집자나 출판사 입장에서도 좋은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번에도 완역인줄 알고 샀는데 편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서 매우 유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초판 13쇄 기준 105쪽
"특히 쥐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유사한 과정을 거쳐 신경 시스템이 진화해왔다. 보상을 얻고자 행동하고 그러다 우발적 사태를 경험하며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존을 학습했다. 이 말은 모든 포유류, 특히 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쥐의 뇌 역시 인간의 뇌처럼 학습 행동과 습관 행동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지 않을까? 이를 실험한 연구가 있다.
인간의 '전방 미상핵'과 유사한 연역인 '배내측 선조제 회로에 이상이 생긴 쥐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보상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즉, 보상과 신호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주17) 배내측 선조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쥐는 레버 누르기, 미로 탐색 등 먹이를 얻는 방법을 학습하지 못했다."
원문:
In a stroke of luck for research, all mammals acquire habits. People, dogs, and whales thrive by learning contingencies between actions and rewards. Our neural systems are structured in similar ways to learn from rewards. With enough practice, all can learn habit associations between contexts and the rewarded response.
Research with rats has yielded many important insights about human habits. And with rats, researchers can use more intrusive interventions than with people. In rats, for example, a particular brain area can be disabled to study effects that we humans would never willingly experience. Many medical breakthroughs that reduce human suffering can be traced to rat studies. Rats have difficulty learning what to do to get a reward after they are given lesions in the dorsomedial striatum circuit, an area of the rat brain similar to the anterior caudate in humans. (note 17) Rats disabled in this way do not easily learn to get rewards by pressing a lever in a cage or turning a certain direction in a maze.
번역문의 앞뒤 문맥을 다 찾아봐도 위에 밑줄친 원문의 문장들에 대한 번역은 없다. 나머지 부분도 원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결코 아니지만, 뭐... 그 취지는 보존하고 있으며, 잘 읽히니까 좋은게 좋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번역 안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꽤 많다. 번역본(초판 13쇄 기준)의 108쪽으로 가면 원문에는 있는 운전의 예시가 번역본에는 없다. 서술도 좀 많이 다르다.
역자는 'context'를 '상황'으로 번역하는데, '맥락'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맥락은 상황(situation)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2부 6장에서 저자의 정의를 보라. 번역서는 148쪽에 있다. 원저자는 context가, 나를 제외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규정한다. '상황'은 이보다는 덜 추상적이고 범위가 더 좁은 것을 가리키지 않나?) 번역서 108쪽의 예를 가지고 말해 보자면, 브런치를 먹는 시간과 날(time and day)은 그 자체로는 어떤 상황이라기 보다는 맥락적 요소에 가깝다. 뭐... 내가 심리학의 전문가는 아니고 번역자가 그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설명을 안 해줬으니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 더 헷갈리는 것은 역자가 'context'와 'situation'을 모두 '상황'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108쪽에서는 'context'가 '상황'으로 118쪽에서는 'situations'가 '상황'으로 번역되어 있다. 왜일까?
112쪽에 나오는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대한 설명은 역자가 삽입한 것이지 원저자가 한 것이 아니다. 원저자는 비용-편익 분석이 자동적으로 과제 수행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고만 말한다. 특히 "뇌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에 대해 비용-편익 분석을 거쳐 자동으로 반응할지 아니면 의식적 자아라는 기병대를 소환할지 판단한다."는 역자가 사실상 자신이 이해한 바를 풀어서 해설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이렇게 쓰면 뇌가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모든 과제를 일일히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서 자동적인 매커니즘(습관)에 맡길지 아니면 의식적인 실행 제어를 할지를 계산한다는 것처럼 읽힌다는 것이다. 원저자는 이렇게 강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쳐서 의식적인 실행 제어 체계에 아웃풋을 제공하는 분석/판단 모듈이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 강하다.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진술을 보자.
"양적으로 제한된 정신력의 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뇌는 늘 극단적인 긴출을 택할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습관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우리는 모든 사안에 기병대를 투입할 수 없다. 실행제어 기능이 처리할 수 없는 임무에 대해서는 다른 영역의 힘을 빌려야 한다. 바로 습관 말이다. 그리고 습관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 모든 번역문(?)들에 대응하는 영어 문장은 원서에는 없다. 이거 하나 빼고. "Given the costly nature of control, we use it sparingly."
이렇게 역자 자신의 해설을 원저자의 것처럼 정성스레 넣어주면서, 왜 원저자의 설명이나 예시는 번역을 안할까? 이쯤 되면 분량 문제가 아닌 것 같다.
114쪽에서 스트룹 과제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원저자는 동물의 형태와 글자 사이의 충돌을 의식하면서 정답을 말하려는 노력이 우리 뇌의 dorsal anterior cingulate cortex를 활성화시킨다고 말하고, 주석 24번을 붙여놨다. (이 용어를 번역하자면 '상부 전측 대상엽'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번역이 안되어 있다. 앞뒤 문장들의 번역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역이라기 보다는 편역에 가깝다.
146쪽의 [역장이론] 소제목 아래의 두 문단(147쪽까지 이어짐)은 원서에서는 해당 장(Chapter)의 거의 뒷 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역자가 나름대로 요약해서 붙인 것이다. (원서의 96쪽. 해당 챕터는 98쪽에서 끝난다.) 이런 식으로 구성을 역자가 자기 멋대로 완전히 바꾼 부분이 꽤 있다. 본인 요약 노트도 아니고 번역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되지 않은가?
148쪽의 마지막줄에서 시작되는 문단과 그 위 문단 사이에는 무려 원서의 27개 정도 되는 문단이 번역되지 않고 빠져 있다. 저자는 기업의 마케팅 사례 등을 들면서 자신의 설명을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 긴 부분이 통째로 다 빠졌다. 레빈의 이론 설명과 6장의 후반부를 합체시키면서 중간 내용이 없어졌다. 대충 원서의 90-96쪽에 걸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라진 부분이 7장의 번역에 나오기 시작하고, 원서에 있는 7장의 내용은 다시 사라지고 번역서의 10장에 나온다. 그러면 10장의 내용은 어디로 간건가? 계속 이런 식이다. 이제는 원서의 내용을 역자가 맘대로 잘라서 붙이기를 하면서 역자의 편집본이 되어버린다. 이제 비교하기도 힘들다. 번역본의 이 문장, 이 문단이 원서의 여기 저기서 잘려나와 합체되어 있고, 원래 있어야 할 내용은 또 사라지거나 일부가 다른데 가서 붙어있다.
계속 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이제는 슬슬 화가 난다. 그만하자.
다시 말하지만, 이 번역서는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역자가 원서를 읽고 정리한 내용을 다시 번역자의 문장으로 다시 풀어서 재구성한 책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원저자가 이런 식으로 2차 창작을 심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계약 당시에 합의를 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원저자는 학자이며, 번역서의 2부처럼 공격적으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같이 법칙1-5까지 번호를 달면서 이거해라, 저거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학자인 저자(웬디 우드)는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된 것을 알면 분노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원서에 있는 삽화들이 번역본에는 없고 표들로 대체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저핵의 형태와 뇌 내부의 위치를 보여주는 삽화가 원서에는 있는데 번역본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