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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 -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임수정 지음 / 밥북 / 2025년 11월
평점 :
*이글은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늘 궁금했었다. 왜 '님을 위한 행진곡'의 후렴구는 '앞 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일까? 이 가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위를 할 때 누군가 시위를 이끌고 구호를 선창하고 먼저 나아가면, 그 뒤를 다음 사람이 이어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민주화의 혜택이 더 이상 혜택이 아닌 시대에 태어난 MZ세대 나의 궁금증이었다. 왜 꼭 이 노래에 삶과 죽음이 담겨야만 할까. 그것이 나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가사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게 된 것은 작년 12월 3일이었다.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고, 경찰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의원들은 담을 넘은 그날. 장갑차가 출동하고, 헬기가 내려 앉고, 시민들이 모이던 그날 밤을 기억한다. 그날 머리 속에 80년의 광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두려웠다. 그리고 화가 났다. 진짜 죽으면 그 다음은? 그제서야 '님을 위한 행진곡'의 후렴구 의미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아 산 자가 따르겠구나.' 그리고 그 공포의 밤이 지나고 우리는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한남동에서, 거리에서 단결하고 투쟁하고 싸워 헌법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늘 그러했듯 보통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가 말이다.
그처럼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 자의 의무는 그렇게 민주주의의 재단에 뿌린 피의 의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다. 앞섰던 이가 흔들었던 깃발을 다시 이어받아 흔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가 문제였다. 앞서서는 안되는 사람이 앞서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열사 송광영과 그 어머니 이옥순의 이야기다.
그녀의 아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기 전 그의 삶은 평범했다. 그리고 고단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 남편의 무관심과 무능력 속에서 그녀는 살았다. 살기 위해 머리에 짐을 이고 돗자리 장수로, 방문 판매원으로 나섰고, 공장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은 부조리한 세상을 그냥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그녀의 아들 송광영 열사는 민주 투사로 이름을 남겨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송광영 열사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혹은 자기자신과 형제들과 같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이 그저 조그마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스스로를 희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신 화상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떨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들의 장례식마저 방해하고, 추도비까지 훔쳐가 버리는 저 잔혹한 정권의 압제가 얼마나 억울헸겠는가. 그렇게 송광영 열사는 끝내 전태일 열사의 길을 걷고야 말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자신의 소중한 막내아들이 분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때 그녀의 옆에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낀 열사들의 부모님들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의 길을 따라 걸었다. 광장에서 독재에 맞서 처절하게 투쟁했다. 산 자의 의무를 해야만 했다.
그녀가 왜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냐만은 아마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먼저 간 아들에게 부모로서 미안하기에 그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이루어 주고 싶었고, 다시는 아들과 같은 고통을 다른 어미의 아들들이 겪지 않기를 원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유와 인권이 살아 숨 쉬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삶을 이옥순 스스로도 내면화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한다.
산 자에게는 죽은 자를 기억할 의무가 있다. 먼저 간 벗 윤동주를 문익환이 따랐듯이, 먼저 간 아들 송광영을 이옥순이 따랐듯이, 4.19와 5.18, 6월 민주항쟁의 역사를 우리가 따라 걷듯이. 이제 이 옥순은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또 다른 별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복합적인 사람이다. 가부장제에 짓눌린 여성, 억척같은 삶을 영위한 가장, 소중한 어머니, 민주투사. 이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호칭이 이옥순이라는 이름에 녹아서 조화를 이룬다. 그 모든 이름이 이옥순이며, 어느 하나를 떼 놓고서 이옥순을 말할 수 없다.
정치 제도인 민주주의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어머니의 사랑, 투쟁과 연대, 권력에 대한 분노와 타인을 향해 뻗는 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 민주투사와 엄마. 이 모든 가치는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이옥순은 몸소 보여주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조화될 수 없었던것 처럼 보이는 소중한 가치들이 어떻게 융화되는지를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나간다는 것을 이옥순은 그리고 2025년 내란의 잔불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이옥순을 기억하고, 이옥순과 송광명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산 자의 의무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추웠던 2024년의 겨울 거리에서 함께 손을 맞잡으며, 얼굴 모를 이에게 선결제로 커피를 건네고, 함께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했던 동지들. 그리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름 모를 동지들에게 이옥순의 삶이 담긴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