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흙수저.. 수저 색 논란은 이제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게 들리는 일상적인 얘기죠.
여러 사건이 뉴스에서 보도되고 사회적 파장이 일었었지만(최근에도 뭐,,) 논란만 클 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변한 것 없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 보여요.
여기에는 다른 복합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일단은 개인적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울분을 토하고 한숨을 내쉬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불평등은 당연한 거라 생각했지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기에 의문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미 '그들만의 리그'라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유리하게 제도를 이용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수저를 물려주고 있는지 등 관심이 적었습니다^^;;
다행히도 책을 읽으며 그 당연한 것들을 어떤 식으로 유지하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불평등이 시작되는지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네요.
그전까진 개인의 능력,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지
'개인'의 영역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제도적, 환경적 차원으로 조금 다른 시점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너무나 자주 불평등 담론은 상위 1%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
나머지 99%는 모두 비슷하게 불행한 처지라는 듯이 말이다.
1%의 최상류층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중상류층인
우리가 다수 대중과 같은 배를 탔다고 믿기 쉬워진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상위 1%에 속하는 사람은 매번 변하는데,
들락날락하는 이들 대부분이 상위 20%의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1:99가 아닌 1%가 속해있는 20:80의 사회였던 거죠.
상위 20%인 중상류층의 규모와 그들이 집합적으로 가진 권력은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교육 제도를 장악하고 노동 시장을 변형시킬 수 있다.
또 중상류층은 공공 담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자, 싱크 탱크 연구자, TV 프로듀서, 교수, 논객이 대부분 중상류층이기 때문이다.
상위 1%를 포함한 20%인 중상류층들이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지에 대해
그 배경들을 설명해나가면서 여러 사례들을 다루고
마지막에 해결 방법을 제시하며 마무리되는 책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뒷받침되는 사례들은 바다 건너의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에 비춰봤을 때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첫 장에서 친절하게도 저자가 책의 내용을 요약해놔서 뒤에서부턴 내용을 예상하며
편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흐름을 잘 알 수 있었단 이야기지 내용이 술술 이해되는 건 아니었어요)
배경지식의 한계가 있어 저자가 주장하는 모든 근거들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불평등의 배경과 저자의 주장은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불평등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저자는 중상류층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양보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가진 자가 덜 기회를 가진 자에게 양보를 해야 변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변화를 통해야만 우리가 정당한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변화조차 그들 손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
저자의 외침에 한편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는데요
아무래도 쥐고 있는 손을 펴는 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저자와 같이 불평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조금이나마 깨어보길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20%에 초점이 맞춰진 터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을 위한 해결책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니 어쩌면 방법을 얻은 것도 같네요.
어떤 식으로 우리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가, 어디서부터 불평등이 시작되는가를 알았으니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외쳐야 할 부분은 외치고(사회제도적으로),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불평등을 그저 수긍하며 불평하기보단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부분들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켜나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위에서는 자신의 환경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불평등을 개선해나갈 수 있게 양보하고 베풀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계층 간의 벽을 깨고 이상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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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20퍼센트 중 최상위 1퍼센트를 제외한 19퍼센트는
현재 미국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중상류층의 경제적 분리를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짧게 답하자면 임금과 배우자(아내)다.
인적 자본에 대한 수익이 높아지면서 고소득층의 임금은 계속 증가해왔다.
동시에 고학력 여성들이 고학력 남성들과 함께
소득 사다리의 꼭대기에 진입했고 그들과 결혼했다.
인구 대다수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가운데서도
고학력 수준과 소득 수준의 관련성은 더 강해졌다.
학사 학위가 일반화되면서 중상류층 진입의 표식으로서
석박사 학위가 갖는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중상류층은 자신과 비슷한 배우자를 만난다.
이에 더해 중상류층은 점점 더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웃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건강도 생산성과 소득에 기여하는 인적 자본의 한 형태다.
더 건강해지는 데 투자했다면 교육에도 더 많이 투자하려는 인센티브가 생긴다.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므로 교육받은 것을 활용할 일도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상류층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건강하다.
좁히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격차는 여행, 책, 가정 교사 등
'자녀의 풍성한 경험을 위한 지출'의 격차다.
계급적 지위는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능력 본위 시장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여러 가지 '능력'을 가져야 하고
아이에게도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체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한다.
그 결과 소득 상위 계층에 세대 간 경직성이 생긴다.
중상류층 지위가 사실상 세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쪽의 경직성이 바닥 쪽보다 심하다.
인적 자본 육성에서의 격차는 태내에서부터 시작된다.
산모의 건강과 건강 관리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상류층 아이들은 부모가 계획을 해서 태어난 아이들이고
임신 기간 내내 엄마가 신경 써서 건강을 관리한 경우가 많다.
소득 수준에 따라 '육아 격차'도 크다. 더 양질의 육아는 소득 분포의 위쪽에서 더 많이 관찰된다.
중상류층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이는 좋은 학교에 아이들을 넣는다.
중상류층의 아이들은 사립학교를 가든지 공립 학교를 가든지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학과 외의 교육 기회도 풍성하게 누린다.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중상류층에서 떨어질 경우
더 깊게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깔아 주고자 할 동기가 커지며,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원도 있다.
중상류층 아이들은 노동 시장에 진입할 무렵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능력을 갖춘 상태여서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선다.
미국의 능력 본위 시스템은 계급의 장벽을 부수기는커녕
유지하고 영속화하는 메커니즘으로 변질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적 자본 형성기에서의 격차를 좁히는 것이다.
특히 생애 첫 20년 사이에 생기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
이는 화목하고 안정적인 가정, 헌신적인 양육, 양질의 교육 환경 등 중상류층 아이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을 더 많이 아이들이 누리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상류층은 사립 학교, 명문 대학, 전망 있는 첫 직장과 같이
희소하고 가치 있는 기회들을 다른 계층 사람들보다 많이 누린다.
중상류층이 더 많은 기회를 분배 받는 데에 개인의 성과와
하등 상관없는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면
반경쟁적인 기회 사재기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세 가지의 기회 사재기 행태를 지적하고자 한다.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분배다.
부모는 아이가 잘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권리를 갖지만 아이에게
'경쟁 우위'를 부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권리는 없다.
내 아이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잘 사는 것을 도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회 사재기는 가치 있고 희소한 기회들이 반경쟁적인 방식으로 분배될 때,
즉 분배가 개인의 성과와 관련 없는 요인들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