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
구라치 준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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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장편소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두툼한 볼륨만큼의 깊이감과 그만큼 넓은 세계관이 좋았으니까.

그런 내게 처음으로 단편 미스터리는 단편 만의 아이디어가 주는 한방의 임팩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작가가 바로 오늘 읽은 소설 시체로 놀지마 어른들아의 작가 구라치 준이었다.

구라치준의 제목도 무척 긴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에 수록되었던 6편의 단편 중 ABC살인이 바로 내게 단편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알려준 작품이었는데 그 당시에 발상 자체가 무척 신선했고 여운있는 마무리와 함께 단편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 같아 그 이후로 단편 소설들을 한동안 미친듯이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라치 준 작가의 데뷔 30주년 기념 작품집인 시체로 놀지마 어른들아는 수록된 네편의 단편소설 하나하나가 ABC살인 그 이상의 재미를 주고 있어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추천드리고 싶다.

표제작인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를 비롯한 네 단편에 대해 짧게 소개를 하자면.

첫번 째, 본격 오브 더 리빙 데드.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다.

모 베스트 셀러 작가의 인기작과 설정이 비슷하나 트릭을 비롯한 어떤 것도 스포일러 되지 않으며 심지어 작가에게 설정을 허락까지 받았다는 작가의 말로 시작하는 이 단편작품은 그 인기 작가를 밝히고 있지 않으나 왠지 이마무라 마사히로가 아닐까 하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든다.

고립된 별장, 원인불명의 좀비들 그리고 좀비에 물려 죽었지만 살아있는 인간의 악의가 느껴지는 사고까지.

본격 중에서도 본격, 특수설정 미스터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단편은 트릭자체가 무척 충격적이고 기발해 앞으로 어떤 좀비 미스터리 소설을 보든 한번쯤은 이 작품의 트릭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두번째, 당황한 세 명의 범인 후보.

도쿄도청 공무원 범죄상담사 미야타에게 세 명의 범인 후보가 찾아와 자신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각각의 범인 후보는 권총, 잭나이프, 망치를 손에 쥔 채 시체앞에서 깨어나지만 사람을 죽인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세 명의 상담자. 세 구의 시체.

그들은 왜 같은 일을 당했을까.

그들을 덮친 재앙의 정체는 무엇일까. 189p

첫 단편이 트릭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면 두번째 단편은 사건 그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무척 흥미롭고, 범죄 상담소라는 설정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세번째 단편의 제목은 '그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서로 목을 졸라 사망한 남자와 여자의 사건, 얼핏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파고들면 둘의 사망시각에 차이가 나고 먼저 죽은 시체에 의해 두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기묘한 사건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표제작인 '시체로 놀지마 어른들아'가 구라치준의 데뷔 30주년 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한다.

안락의자 탐정을 조금 더 독특하고 세련되게 표현한 이 작품에는 아직 어떤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사건을 술집에서 친구의 이야기만 듣고 풀어버리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단순한 단편집이 아니라 연작단편집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선물한다.

마지막 옮긴이의 말이 크게 가슴에 와닿는다. 시체로 더 놀아주세요, 작가님.

작품 속 등장했던 독특한 매력의 등장인물들과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묘한 트릭으로 무장된 단편들을 또 읽고 싶다.

무거운 장편은 펼치지 부담스럽지만 미스터리 소설 특유의 반전이 주는 재미는 즐기고 싶은 분들께 구라치 준의 연작단편집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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