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지키는 사람
류츠신 지음, 곽수진 그림,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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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츠신의 불을 지키는 사람은 단순한 동화의 외피를 두른 채, 사실은 성숙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우화이자 철학적 사색의 장을 열어주는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림과 글이 서로 긴밀하게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감각이었다. 곽수진 작가의 몽환적이고 감성적인 일러스트는 류츠신의 신비로운 문장을 시각적으로 확장시켜 주었고, 덕분에 나는 마치 어린 시절 그림책을 펼쳐보던 때로 돌아간 듯한 동심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으며 동화가 단지 아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작품의 설정은 실로 낭만적이고도 독창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별이 있고, 그 별이 빛을 잃으면 병이 들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발상은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임에도 묘하게 현실적인 설득력을 지닌다. 주인공 사샤가 병든 연인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별을 수리하러 간다는 여정은 단순히 판타지적 모험을 넘어, 사랑의 본질과 희생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서사다. 사랑하기 때문에 별을 고치러 떠난다는 설정은 낭만적이면서도 동시에 몽환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류츠신은 책의 말미 작가의 말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고 실제 우주 과학 법칙에 부합하지만, 모든 기본 원리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갖추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이 세계가 어쩌면 진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딘가 저 먼 우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중 하나쯤은 싶은 그런 느낌이다.


태양에 불을 붙이는 불지기의 노동, 석탄을 캐고 기름을 짜는 반복적인 과정, 그리고 매일 새벽의 의식 같은 장면들은 우화적인 동시에 묘하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그 결과 이야기는 신비로운 상상력과 현실적인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독자를 매혹한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래의 서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늘을 날아 우주까지 갈 것 같은 장엄한 고래는 육지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지닌 무게에 짓눌려 죽음을 맞는다. 결국 그 거대한 생명체는 불을 밝히는 고래기름으로 전환된다. 이 장면은 아름다움과 잔혹함, 경이와 허무가 동시에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고래가 지닌 상징성은 무궁무진하지만, 나에게는 ‘꿈과 현실의 간극’ 혹은 ‘희생의 불가피함’을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끝내 빛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불을 지피기 위해 고래는 자신의 몸을 내어준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 아름다움과 비극이 맞닿아 있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정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불을 지키는 사람은 단순히 동화적 상상력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붙들고 있는 불과 같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사랑, 희생, 책임 같은 주제는 오래된 이야기일지 몰라도, 류츠신은 그것을 새로운 우주의 언어로 풀어냈다. 덕분에 “나의 별은 무엇인가, 내가 지켜야 할 불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마음에 오래 남는 건 환상적인 모험담 자체가 아니라, 그 모험이 상징하는 사랑과 헌신의 무게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정의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작품도 드물다. 나에게 이 책은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몽환적인 세계를 여행하게 해 준 동시에, 어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사랑의 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깊은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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