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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 오스틴 지음, 나연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오스틴 지음 클레이하우스 출간 서평

에밀리 오스틴의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는 삶과 죽음, 종교와 정체성, 불안과 유머가 한데 엉킨 이 시대 청춘의 비망록이다.
주인공 ‘길다’는 죽음에 대한 집착과 극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20대 여성으로, 무료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들른 성당에서 얼떨결에 리셉션으로 채용된다. 무신론자이자 성소수자인 그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장하고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삶에 남겨진 사람들’의 무게를 다루는 유쾌한 미스터리로 전개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직접 읽기 전, 표지의 토끼와 왠지 모르게 따스한 그림체의 표지를 보고 이 소설을 힐링성장소설정도로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서점의 세부 분야가 미스터리/스릴러소설로 분류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해당 분야의 요소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으며 해당장르의 재미요소까지 충실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표지에 등장하는 토끼가 이미 살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스릴러소설의 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길다는 전임 접수원 ‘그레이스’의 죽음과 관련된 이메일에 거짓 답장을 보내고, 그 사건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면서 점차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한다.
이 소설은 ‘감자튀김이 먹고 싶어서 죽을 수 없다’는 익살스러운 문장에서처럼 무기력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특히 길다의 정신이 나가버린 것 처럼 되는대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과 ‘지금 내가 미쳐서 이런 일을 겪는 건가’라는 자기 반문은, 자조적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춘다. 현실과 감정의 시차에 괴로워하고, 존재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타인의 아픔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야기는 가톨릭의 절기 ‘대림절’부터 ‘부활절’까지 총 다섯 장으로 나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길다의 변화와 감정의 깊이를 조금씩 보여준다.
엘레노어와의 관계, 남동생 일라이의 방황, 주세페의 왠지 모르게 이상한 구애 등 모든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며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다는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길다는 ‘세상의 밝은 면을 봐야 한다’고 스스로 되뇔 만큼, 위태로운 균형을 잡으며 삶을 버텨내는 인물이다.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는 고통을 무겁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오히려 더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이 소설은 우울과 불안이 단지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디폴트’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길다는 실패하고 비틀거리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실감나는 인물이며, 가장 현실적인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웃기고 슬프며, 무엇보다 솔직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묻는 가장 오래된 질문을, 가장 솔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묻는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곁에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고, 그래서 또 공감되고 위로로 다가온다.
종교에 퀴어에 삶과 죽음의 의미까지 다루면서도 읽다 보면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에밀리 오스틴의 작품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를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