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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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들었는데 내게는 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복고풍 표지가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만지면 꺼끌꺼끌한 표지의 감촉까지 완벽.

찬호께이의 신작 고독한 용의자는 오랜만에 마주한 정통 범죄추리소설이다. 13·67과 망내인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점을 찍었던 그가 이번에는 코로나 이후의 홍콩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무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독특한 점이라면 사회파미스터리이면서도 본격 미스터리의 냄새를 꽤 많이 풍기고 있다는 점.

겉으로 보기엔 단출하다. 좁디좁은 단칭맨션 방 안에서 한 남자가 자살한 채 발견되고, 그의 옷장 속에서는 수십 개의 유리병에 담긴 시신의 일부가 나온다. 그 남자, 셰바이천은 무직에 장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은둔형 외톨이다. 누가 봐도 수상한 인물이다. 초반부만 보면 “이건 뻔한 전개 아니야?” 싶을 만큼 익숙한 흐름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형사가 진실을 추적하고, 반전 하나 정도 들어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이 뻔해보이는 소설의 분위기는 소설의 거의 90%에 해당하는 8장까지 이어진다. 무언가 기묘한 분위기를 흘리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간 읽어봤던 찬호께이의 작품들을 통해 쌓인 작가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을까 싶다. 찬호께이가 이렇게 작품을 뻔하게 끝낼리 없다는 확신.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마지막 9장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뭔가 어색하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 전까지는 평이하다고 여겨졌던 설정들이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은 더 이상 단순한 추리물이 아니다. 인간의 심연, 특히 외로움과 단절,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분노를 정교하게 끌어올리는 묵직한 이야기가 된다. 거기에 플러스로 반전이 끝내주는 도파민 뿜뿜하게 해주는 미스터리 장르의 재미까지 더해지는 것!

특히 셰바이천의 유서인 〈망자의 고백〉과 정체불명의 문서 〈소설 (제목 미정)〉을 병치해 서술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처음엔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이 두 문서가 사건과 맞물려 깊은 상징성을 띠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경계가 무너진다. 이 복잡한 서술이 결국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단순한 고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무관심으로 쌓아올린 구조적인 병이라는 것.

찬호께이는 이 소설을 통해 묻는다. 왜 어떤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 가족도 친구도 없이 렌털 애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여성, 정신적으로 한계에 내몰린 은둔형 외톨이, 그리고 아무런 의문 없이 사건을 덮으려는 경찰. 이들은 모두 고독이라는 이름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단지 그 고독이 어떤 이에게는 살인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침묵으로,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모습으로 표현됐을 뿐이다.

여담으로 500p가 넘는 벽돌책인 이 작품의 극 초반 75페이지에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 대한 스포일러가 대놓고 등장한다. 미리 알고 있던 나로선 웃음이 나왔지만, 만약 안 읽은 사람이었다면 꽤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지 않았다면 75p는 잠깐 건너뛰시길.

결론적으로 고독한 용의자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의 관심 밖에서 조용히 살아가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이들은 뉴스에도 오르지 못하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찬호께이는 그런 사람들을 소설 속으로 데려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단순한 반전의 충격을 넘어서, 묵직한 질문 하나를 안고 이 이야기를 기억하게 된다.

끝까지 봤을 때, 아 잘봤다! 하는 만족감이 느껴지는 미스터리소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오랜만에 뒤통수 띵한 반전이 제대로였던, 그러면서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운까지 제대로 담은 찬호께이의 고독한 용의자를 추천드린다.

내 예상대로라면 언젠가는 이 작품도 영화로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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