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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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법조인으로 활동해 온 도진기 작가가 8년 만에 선보인 신작 단편집 법의 체면은 법정 미스터리를 기반으로 스릴러와 SF 장르까지 넘나드는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법과 인간, 그리고 시스템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특히 표제작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는 저자가 실제 판사로 재직한 경험 없이는 절대 떠올릴 수 없었을 법한 소재와 시선이 인상적이다. 두 작품 모두 사법 시스템에 대한 깊은 회의와 날 선 비판을 담고 있으며,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상보다 ‘법의 체면’을 지키는 데 더 골몰하는 현실을 정교한 플롯과 반전을 통해 드러낸다. 법의 체면은 장물 취득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노인의 억울한 항변을 시작으로, 독자를 점차 사법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과 마주하게 만든다. 반전의 묘미를 넘어서, 이 작품은 법이 외면할 수 있는 진실의 실체와 ‘법관의 체면’이라는 그들만의 명분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한편 완전범죄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다. 부작위(행동하지 않음)에 의한 살인을 소재로 다룬 이 단편은, 등장하는 법조인이 의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사건 자체의 색다름과 함께 독특한 깊이를 제공한다. 단순히 법적 해석의 영역을 넘어, ‘어떤 결과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과관계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검사, 판사, 변호사 각각의 입장에서 법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를 주요 소재로 자연스럽게 활용함으로써, 사회적 편견과 차별 문제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법정 추리소설을 넘어선 확장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법의 체면에는 이 외에도 꿈과 현실이 뒤섞인 SF 애니, 인간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행복한 남자, 그리고 물체 전송 기술이라는 상상력 가득한 컨트롤 엑스까지 다채로운 장르가 수록되어 있다. 추리, 스릴러, SF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르적 실험을 시도한 이 단편집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단순한 오락을 넘어, ‘법이 과연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작품집이다.

도진기라는 이름이 왜 ‘한국 본격 추리소설의 새 지평’이라 불리는지,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goldenbough_books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진기 #법의체면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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