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의미하게, 즉 추구할 만한 대상이 못 되게 만들어 악마를 이긴다. 더 정확히는 이반이 이기려 하지도 않았는데 악마 스스로 이반에게 진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바보의 ‘순수성‘에서 나온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수성이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와 비견되곤 하는 바보 주인공을 내세운 도스토옙스키(DEAop AoCroÉRCRun의 《백치>를 보자. 주인공 미쉬낀 공작은 러시아말로 ‘유로지비,urodiny‘, 즉 ‘성스러운 바보‘
라 불린다. 유로지비는 동방정교에서 바보 행세를 하며 수행하는 수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공작은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조금 전까지도 당신을 백치로 여겼어요! 하지만 당신은 남들이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세속의 통상적인가치와 단절한 바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실은 어리석은 탐욕과 악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