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나와 저기에 너, 그리고 우리
─내러티브온5 소설, 『눈송이 쥐기』를 읽고
1. 김영은의 「눈송이 쥐기」
나는 아무에게나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내가 아픈 만큼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누구에게?끝내 대답할 수 없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내 안에 남을 것이었다.p. 34
나는 아무에게나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내가 아픈 만큼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끝내 대답할 수 없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내 안에 남을 것이었다.
p. 34
언젠가 읽은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용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해야만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김영은의 「눈송이 쥐기」는 관념적으로 굳어진듯한 용서와 이해의 개념을 보다 강력한 주체성이 부여되는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어쩌면 용서는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지도 모른다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2. 조찬희의 「만한에서」
희망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 선윤은 그 사실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예스니아의 따스한 기운이 선윤에게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p. 58
희망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 선윤은 그 사실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예스니아의 따스한 기운이 선윤에게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p. 58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자리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조찬희의 「만한에서」도 그러하다. 타국의 소도시 '만한'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방인과 또 다른 이방인의 깊은 연대를 다루고 있다. 사람을 빛나게 하는 희망이, 쏟아져 내리는 따스한 기운이, 곳곳에서 더 자주 발견되기를. (다소 감상적인 생각이지만) 이 작품을 읽은 뒤에 든 마음이다.
3. 박소민의 「입에서 입으로」
우리는 농담이 아니잖아요.p. 109
우리는 농담이 아니잖아요.
p. 109
통역사로 일하는 '연우'는 기억을 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기록을 한다. 그는 "받아 적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기록이라는 점. 망각 속에서도 타인의 불편함을 신경 쓰고, 공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은 작품
4. 주이현의 「몬 몬 캔디」
그날 고다와 선요는 천천히 걸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란히 걷는 동안 그들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며, 남은 모든 말들을 속으로만 삼켰다. 다만 그들은 갈림길 앞에서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내일 개학이야, 늦지 마,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후 둘 중 누구도 울지는 않았다.p. 200
그날 고다와 선요는 천천히 걸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란히 걷는 동안 그들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며, 남은 모든 말들을 속으로만 삼켰다. 다만 그들은 갈림길 앞에서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내일 개학이야, 늦지 마,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후 둘 중 누구도 울지는 않았다.
p. 200
따뜻한 장면. 따스한 기운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장면. 그런 장면을 발견할 때면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치 진실처럼 느껴진다. 훼손되지 않는, 훼손될 수 없는 진실. 결코 현실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진실. 선요가 고다를 달래주고, 고다는 선요의 말을 진실이라 믿기로 하는 결말부의 장면이 내게는 그러했다.
5. 이지혜의 「잇기」
언제부터였을까. 경수의 그림 안에서 어둠 속을 나아가는 빛들이 마치 희미하게 연결된 점선 같다고 생각한 것이.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 수채화에서는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던 경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돌아왔다.p. 236
언제부터였을까. 경수의 그림 안에서 어둠 속을 나아가는 빛들이 마치 희미하게 연결된 점선 같다고 생각한 것이.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 수채화에서는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던 경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돌아왔다.
p. 236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한줄기 빛을 발견해 내는 이야기. 애도와 상실, 그로 인해 발생한 구멍을 '연결'이라는 희망으로 잇는 이야기.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 가슴속에 구멍을 간직하고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작품.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