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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걷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평점 :
여백을 걷는 자의 윤리
─김솔의 『행간을 걷다』를 읽고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질문에 반응을 하는데,
그 방법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책만큼이나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만
책의 침묵을 듣고 이전 세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김솔, 「말하지 않는 책」 中
소설에 쓰인 문장과 문단, 즉 모든 문자가 '책의 음성'이라면, (김솔이 말했듯이) 여백은 '책의 침묵'일 것이다.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긴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간혹, 아니 자주 책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대다수의 독법은 대단히 잘못된 방식인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침묵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이 문장은 곧 여백을 거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김솔의 『행간을 걷다』에는 두 개의 자아를 지닌 화자가 등장한다. 금고 제작자로 살아온 주인공 '나'는 뇌졸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에 마비된 한 쪽 몸과 온전한 몸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온전한 쪽인 '나'는 마비된 쪽에 '너'에게 '쉥거'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이어나간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하천을 따라 걷고 인간 세상의 욕망을 들춰 보며, 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이어진 천변을 바라봄으로써 죽음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누어진 자신의 자아를 투영한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밤은 밤으로, 침묵은 침묵으로, 열기는 열기로, 빛은 빛으로, 허기는 허기로, 무위는 무위로, 꿈은 꿈으로, 공포는 공포로, 그리고 갈증은 갈증으로 이어지는 날이 계속"(188-189쪽) 될 뿐이다.
따라서 김솔의 『행간을 걷다』를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여백을 걷는 자의 윤리'를 열렬히도 파헤친 소설이라고. 단지 연명한다는 이유로 불안과 반복, 번뇌 속에서 고통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여백을 걷는 자의 행보를 충실히도 추적한 소설이라고. '책의 침묵'이라 일컬어지는 작품 속 여백을 통해 진리를 탐색하기 위한 시도를 기어이 이어나간 소설이라고 말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