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옥구슬 민나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3
김여름 외 지음, 김다솔 해설 / 열림원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방으로 흩어져 사방이 되는 이야기들

─『림: 옥구슬 민나』를 읽고

1. 김여름의 「공중산책」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장례미사가 있는 날이다."

김여름, 「공중산책」

그리고,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먼 곳에서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그럼 나는 비로소, 완전히.

투명해진다."

김여름, 「공중산책」

처음과 끝의 간격을 가늠해본다. 삶과 죽음의 거리를.

귀신의 모습을 하고 '공중산책'을 이어나가는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안쓰러운 존재였다. 인간은 매 순간 안쓰러웠다. 어쩌면 인간을 잘 아는 자는 인간이 아닌 자일지도 몰랐다."

소설을 읽고 나니 문득 '공중산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귀신이 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공중달리기도 해보고 싶고, 공중수면, 공중독서, 공중식사도 해보고 싶다. 투명해져야만 가능할까.

그런데,

비로소, 완전히, 투명해진 사람의 마음은 온전할 수 있을까.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처음과 끝의 간격을 가늠해 볼 필요가 없을 때. 삶과 죽음의 거리를 계산해 보지 않아도 괜찮을 때. 그때는 '공중산책'을 할 수 있을까.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것만 같다.


2. 라유경의 「블러링」

소설의 제목인 '블러링'은 '흐려짐, 흔들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흐려지고, 무엇이 흔들린다는 뜻일까.

"언니의 몸이 기억나지 않는다."

라유경, 「블러링」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나'는 '언니'의 몸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니가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언니의 몸이 "촛농이 불에 녹듯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액체로 녹아 원목 의자에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녹아내린 언니를, 그러니까 흘러내리는 액체를 텀블러에 담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어디를 가더라도 언니와 함께 구입한 그 텀블러를, 녹아내린 언니가 담겨 있는 그 텀블러를 항상 챙겨 다니기 시작했고.

소설 속 '나'는 인터넷 로드뷰 사진 중에 문제가 될 만한 장소나 이미지를 골라 '블러링' 처리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흐려지고, 흔들리게 하는 일을. 흐려지고, 흔들리는 언니를 텀블러 속에 담고 다니면서.

생각한다.

"만약 로드뷰에 찍힌 나를 발견한다면 블러링 처리할 필요 없이 뒷모습이기를 바랐다."

라유경, 「블러링」


3. 서고운의 「정글의 이름은 토베이」

『림: 옥구슬 민나』를 읽으면서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작가 노트'가 함께 실려있었다는 점이다. 서고운 작가의 '작가 노트'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냥 비행기를 타고 싶을 때. 비가 많이 오는 날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마시멜로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일 뿐. 현실은 언제나 끈덕져서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올여름도 여느 때와 비슷하다. 비슷한 속에서 풀이 자란다. 계속 자란다. 나는 풀을 베기보단 그 옆에 또 심기를 선택한다. 씨앗을 심고 물을 준다. 그럼 무엇이든 자라나니까."

서고운, 「정글의 이름은 토베이」

'작가 노트'를 읽고 난 뒤에 나는 생각했다. 이 소설은 '언제나 끈덕져서 발을 떼기가 쉽지 않은 현실'과 같은 작품이라고. 그러니 화자인 '순지'에게 "왜 나의 지구는 맨날 망할까'라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현실은 결국 우리 발밑에 있는 것이라고.


4. 성혜령의 「대체 근무」

성혜령의 「대체 근무」를 읽고 생각했다. 관계에 균열을 내는 행위가 '너'라는 한 사람의 세계를 무너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또 하나.

생각보다 우리 삶이 '관계'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과 '관계' 안에 놓여있는 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주름이 매끄럽게 정돈된 삶. 보풀이 인 옷은 버리고 새 옷을 살 수 있는 삶. 단강도 그런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었다. 단기 계약직이라도, 당분간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전임자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잠시 착각할 수 있었다."

성혜령, 「대체 근무」

(다른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의) '대체'란 단어는 왜인지 정이 잘 붙질 않는다. 도대체 언제쯤 누군가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미묘한 인물들의 관계와 마음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설이다.


5. 예소연의 「통신광장」

소설은 1997년 개봉한 장윤현 감독의 영화 <접속>을 모티프로 삼는다. 영화처럼 '통신광장'에서 만난 두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은 우연한 접촉, 혹은 접속이 새롭게 태어난 질서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광장에선 어디로 가든 나가는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소연, 「통신광장」

예소연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쓰고 보니 정말 우리가 불규칙한 회로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간신히 서로를 더듬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소설을 읽고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고,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기묘했다.

문득 광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 가든 나가는 방향"인 곳에.


6. 현호정의 「옥구슬 민나」

현호정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 형식. 소설의 형식을 크게 따지지 않는 편인데도 형식에 놀라고, 내용에 한 번 더 놀란다.

우주를 만드는 것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는가─

그를 만드는 우주가 득에게 무엇이 되는가─

득을 만드는 그는 무슨 우주가 되는가─

우주가 된 그는 무엇을 만드는가─

<득>

현호정, 「옥구슬 민나」

신화적인 요소를 활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치 창세기의 실사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

명확한 답은 (할 수가) 없고 사유가 깃든 질문만 남는 소설.

그래서,

곱씹어 보게 되는 소설. 새롭게, 다시금 소설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현호정 작가는 그런 소설을 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