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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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언어로 기억되는 이야기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고

1.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 뒤편에 실려있는 '작가의 말'을 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에 작가의 마음과 쓰고 난 이후에 작가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혹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가늠해 보는 일이 내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예열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넷플릭스 영화 개봉에 맞춰 새로 개정되어 나온 리마스터판이었기에 두 개의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었다. 2011년 4월에 작성된 '작가의 말'과 2024년 초입에 작성된 '새로 쓴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사이에 위로와 공감, 연대를 향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는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로기완을 만났다』를 쓰면서 공감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예열 단계에서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2.

작가인 '나'의 시점에서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추적해가는 이 소설은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인물들의 여정을 담고 있다. 연민에서 시작된, 선의의 마음으로 행했던 일이 타인을 곤경에 빠트리게 되자 '나'는 극심한 죄책감에 빠진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한 잡지에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를 접하고, 얼마 뒤에 그의 일기를 손에 넣게 된다.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 번 돈으로 벨기에로 향한 '로기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나'는 외면해왔던 내면의 죄책감과 다시 마주하며 근본적인 삶의 이유를 되짚어본다.

소설 속 '나'가 비관적인 전망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로기완'의 시간을 되짚어가는 동안 현실의 내가 발견한 것은 치유의 가능성과 증여되는 연대의 가치, 공감으로 이어지는 위로의 언어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는 '나(이니셜 K)'와 '로기완(이니셜 L)'의 삶이 실패를 감내하면서까지 독자에게 증여될 순간을 끝끝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게 참 좋았다.

3.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

4.

조해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여러 번 마음이 무너지곤 하는데, 『로기완을 만났다』에서는 아래 문장들이 그러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순간, 나 역시 불우한 땅을 딛고 있는 가엾은 존재가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p.64)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이 조심스럽게 준비해 놓은 구체적인 사건들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고는 믿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연인이 되자는 식은 선언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관통한 후에 손안에 들어온 서로에 대한 신뢰감, 이 사람이라는 안도감,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일과 일상, 그런 것들만이라도 나는 충분했다." (p.72~73)

"가장 아픈 진실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것이다." (p.74)

"희망은 하나여서 절박했고 절망은 그 후를 약속해주지 않아서 두려웠다." (p.108)

"어떤 사람에겐 위로도 뜻대로 해줄 수 없다. 그 위로의 순간에 묵묵히 소비되는 자신의 값싼 동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못한 감정은 이렇게 때때로 단 한번도 조우한 적 없는 타인의 삶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p.112)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죽은 자들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환멸과 눈물도 희생자의 수치, 그 체온 없는 수치로 수렴되어 추모의 비문(碑文)도 없이 매장되었던 것이다." (p.122)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p.138)

"그러나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p.151)

"우리가 사랑의 고백에 인색했던 것은 더없는 행복, 완벽한 충만, 한순간의 천국 대신 다만 끊임없이 우리 사이의 불충분과 관계의 결여를 원해서였던 것뿐이라는,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랑의 정체성이라는 그런 말을 간절하게 듣고 싶다." (p.205)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p.209)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p.222)

"소설은 독자에게 닿기 전에 작가를 꿈꾸게 하고 살게 합니다" (새로 쓴 작가의 말中)

"믿고 싶다. 결국엔 위로의 언어로 기억되기 위해 쓰여지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작가의 말中)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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