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셰프 NEON SIGN 10
서윤빈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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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우주, 특별한 음식점이 하나 있다. 나의 사연을 들려 주면 셰프가 걸맞은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 컨셉의. 이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내를 찾고 있다는 셰프 오멜레토 컴보의 애타는 노력이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각자의 사연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되지 않은 채 사그라들기도 하고, 어떤 때엔 만나 본 적도 없는, 평생 현실에서 단 한번이라도 접점이 있을까 싶은 사람에게 가닿기도 한다. <유니버설 셰프>는 말마따나 '사연있는 사람들'의 모든 필연과 우연을 그려냈다.


오멜레토 컴보는 이유도 모른 채 아내를 잃는다. 분명 살아있단 건 아는데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내는 작정하고 실종되어 버렸다. 컴보는 아내를 찾고자, 간판도 없고 허름함 그 자체인 우주선 식당을 연다. 취급하는 메뉴 이름은 '아무거나'. 적당한 바에서 칵테일 한두 잔 시키는 정도의 산 가격이 손님의 눈을 의심케 한다.


컴보는 화폐보다 손님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손님은 컴보의 의도를 수상쩍다며 의심하면서도 끝내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요리들이 주방에서 뚝딱뚝딱 맛있게 만들어진다. 고독한 손님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음식이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들에게 따끈한 음식으로 용기를 주는 컴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수확 없이 아내의 행방을 좇는 그의 모습은 그저 고독하기만 하다. 과연 컴보는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순간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사랑과 상실이라는 키워드로, 음식과 삶의 조밀한 연결성을 보여 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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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꽃
로카고엔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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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예 호러 작가 로카 고엔의 연작 단편집, <죽음에 이르는 꽃>. 호러, 이야미스적인 요소도 있고, 싫어하지 않는 장르다. 출간 즉시 아마존 재팬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고 하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미터 평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꽤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성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곳엔 사랑도 증오도 공존한다. <죽음에 이르는 꽃>은 누군가의 악한 마음을 양분 삼아 활짝 피어난 어두운 산타클로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니콜라이(니코)'라는 아름다운 남성이 '바바' 가문을 시험하고 또 시험한다.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 일가는 서로를 끈적하게 미워한다. 어느새 잔뜩 일그러져 버린 가족을 천사인지도 악마인지도 모를 존재가 마구 뒤흔든다. 누군가는 니코에게 축복을 받으며 다른 누군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일화에,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이라거나 도덕이라거나 상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히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어쩌면 신이란 이렇듯 추상적이며 즉흥적인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대체 바바 가문은 왜 이 남자에게 속절없이 홀려 버리고 말았는가? 수수께끼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종착지는...?


한 일족이 끝내 미쳐 버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어쩐지 불쾌한 이야기가 계속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좀먹는 기분이며 상당히 공포스럽다. 심신이 피곤할 때 보면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필력과 이야기 구성력을 가진 작가를 만난 듯하여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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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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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의 첫 아트 미스터리 소설 <제로의 늦여름>. 다양한 색채의 아름다운 청춘,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 냈던 그가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실화를 소재로 마치 도시전설 같은 수수께끼에 적절한 로맨스 요소를 섞어 스릴 넘치면서도 어쩐지 청량한 느낌의 작품이 탄생했다. 찾아보니 표지 역시 사실화를 사용해 디자인했다고…… 정말 놀랐다.


'나유타'라는 가명을 쓰며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실화 화가가 있다. 주로 인물화를 그리며 결과물은 흡사 사진을 방불케 한다.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사진 기술이 발달한 요즘, 사실화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는 여러모로 퇴색되고 있지만 나유타의 그림은 무언가 다르다. 그런 그에게 언젠가부터 사신이라는 별명이 뒤따른다. 나유타가 그린 인물은 무조건 죽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야기는 한때 재능 넘치는 화가를 꿈꿨던 카논이 나유타의 그림에 매혹되고 그를 취재하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흐름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기도 하며 딱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나유타에 대한 알쏭달쏭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는 순식간에 휙휙 넘어가 버리고 만다.


영상화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개성이 그저 고스란히 담긴 것인지 문장 속에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색채가 듬뿍 담겨 신선했다. '죽음'이라는 불행한 키워드가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장의 매혹적인 그림이 만들어 낸 각 인물들의 교차점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얽혀, 부드럽게 정리되는 마무리는 정말 좋았다.


화가의 마음 속 어둠과 예술 작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이란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까?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 '나유타'와, 아무 수도 없는 0을 뜻하는 '제로'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예술, 사랑, 인연과 재능, 신뢰와 배신 그리고 생명과 죽음, 다양한 요소를 조화롭게 담은 완성도 높은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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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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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문학은 <돈키호테> 이래로 별로 접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내게는 조금 낯선 문화권이다. 그래서 그런지 <토끼들의 섬>은 내게 연신 독특한 느낌을 자아냈다. '환상과 악몽을 오가는 매혹적인 세계'라는 말처럼, 금방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날 듯하면서도 마지막 한 발걸음은 문 너머로 옮기지 않는 기묘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표제작 <토끼들의 섬>에선 내가 전혀 상상치 못했던 전개가 펼쳐졌다. 섬을 망가트리는 흰 새 무리를 쫓아내기 위해 풀어 둔 토끼 몇 마리가 어떤 재앙을 몰고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조금은 잔인하고,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는 절망적인 세계가 괴기스럽게 펼쳐진다.


이어 한쪽 귀와 발에 이상을 느끼고 그것을 숨기려는 여자, 집착이 심한 애인과 헤어지고자 하는 여자, 공중에 떠있는 할머니와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를 걷는 이야기, 마약과 정신병, 알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는 주인공, 페이스북에 얽힌 한 부부의 스토리와 가짜 결혼식, 점술과 메시지에 얽힌 이야기 등 초현실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쓰인 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며 독자는 무수한 환상을 맛본다.


태풍의 눈처럼 잔잔한 듯하면서도 금세 휘몰아치고 마는 엘비라 나바로의 세계관은 기묘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어딘가 비틀린 이 이야기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수수께끼스러운 면모가 바로 이 단편집의 주목할 만한 아닐까 한다.


많은 추천사와 독보적인 수상 이력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현대 스페인 문학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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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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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세운상가를 무대로, 청년 예술가들의 현실을 그린 소설 <노란 밤의 달리기>. 방황하는 2030 세대들의 불안정함이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전반적으로 어쩐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풍이 떠오르더라니 무심코 읽은 책 소개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봤다. 소외, 상실, 고독, 사랑 등의 키워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읽을 책.


"낮과 밤이 다 있는 사람이 좋아."


꿈을 좇는 청춘이 있다. 돈 안 되는 예술로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청년이 있다. 사랑과 예술이 전부였던 시간은 어느새 저편으로 멀어지고, 애인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현실로 떠나 버린다. 항상 축제같은 나날을 보내라고 지어진 '휴일'이란 이름이 아이러니하게도 반백수의 삶으로 이끌었다는 블랙 유머가 소소하게 웃기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겉으로는 안정적이어 보이지만 날 잡으면 속얘기로 하룻밤 꼬박 새울 불안정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도무지 버릴 부분이 없다.


사진을 그만두고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친구도, 매일매일 새로운 애인을 찾아 결핍을 메우는 친구도, 국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다른 종류의 일거리를 찾은 친구도. 늘 재개발과 공사가 이루어지는 세운상가처럼 이 예술가 청년들의 그림자도 출렁출렁. 이들은 마음껏 흔들리고 마음껏 달린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고 한탄하면서도, 꿋꿋하게 시간을 이어 붙이는 모습에서 말마따나 을지로 거리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옛 건물들을 연상해 본다.


과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농밀한 이야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안과 애정과 시간의 흐름을 맛봤다. 누군가는 유턴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직진만을 고집하는 인생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 내 20대가 생각나는 소설이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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