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XX 새소설 14
김아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6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한 김아나 작가의 <1990XX>를 완독했다. 의미심장한 제목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90년대, 불합리하고 가학적인 미신을 믿은 어른들에 의해 탄생조차 할 수 없었던 여자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누군가는 꼭 써야 했던 이야기. 김아나 작가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첫 단편부터 강렬했다.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다. 시부모님과 남편의 강요로 아기를 지워야 했던 무수히 많은 엄마들. 건강을 해친 것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도 바로 엄마들이었다. 태어나지 못한 딸들은 유령-아기가 되어 빈 자리를 떠돌았다. 소설 속 시공간의 불분명한 분열과 한평생 불리지 못한 이름들의 나열은, 그야말로 이 아기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길 바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낸 장면이었다. 슬픈 천도재가 뇌리에, 마음에 콱콱 박혀 들어왔다.

'백말띠 여자아이들은 기가 세다' '백말띠 여자 아이들은 팔자가 드세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낭설이 또 있을까? 도대체 세상에 태어나선 안 되는 아기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순히 딸이었기 때문에 지워져야 했던 무수히 많은 생명들…… <1990XX>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운명이 타인에게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주어진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서 그리고 버려지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길 택했다.

장손 중심주의, 남아 선호 사상과 더불어 백말띠 여자아이들에게 내려진 저주 아닌 저주에 대해 다룬 괴담을 적절히 배치함과 동시에 한국 풍속신앙의 공포스러운 면모를 조화롭게 섞어 굉장히 기묘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이런 장치는 1990년대의 비극을 온전히 담기 위한 최선의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서늘했던 이야기들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고 따라서 무척 만족스러운 일독이었다.

1990년에 자행된 '여아 집단 낙태' 사건은 한국 사상 최악의 성비를 만드는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도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끔찍한 사건은 이미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렸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잊혀 가던 안타까운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 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불합리하게 스스러져 간 생명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